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4. ETIC/41_스크랩

통일교의 모태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13. 07:08
반응형

신비주의에 몰입, 수도원 세워

백남주를 스승으로… ‘어린양 혼인잔치’로 메시아 소동




  
 ▲ 임웅기 소장 

김백문의 출생과 활동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원산 예수교회를 설립한 백남주 밑에서 생활했던 인물이다. 김백문은 1940년대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김백문은 1917년 10월 19일(양력)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인의동 448번지(현재는 경북 구미시 인의동 488번지)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백문(金百文)에 대한 학력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의 의전전문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3년)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김백문은 형 김이문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경상도 출신 여성 김남조를 만난다. 당시 김백문의 나이는 만 17세가 되던 1934년이었다.


김백문과 백남주의 만남


김남조는 첫 만남에서 김백문의 비범함을 보고,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그를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걷게 했다. 이때부터 김남조는 김백문의 ‘신앙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회령 청진 주을 나남 등지의 신비주의 기도파들에게 김백문을 소개시켜 주었다. 결국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백남주에게 소개해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백문은 원산 신학산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주님을 만나서 자신에 대한 사명과 미래에 일어날 역사와 기독교의 난해한 성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김백문은 성주교를 비롯해서 신비주의 집단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시작했으며, 세 권의 저서 <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을 남기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백문은 함경도 방면의 신비주의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인의 딸 조선애(趙善愛)와 혼례를 치렀다.


이스라엘 수도원의 탄생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 서울에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했다.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를 떠나 조선신학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다. 후에 감옥에서 나온 김백문은 김헌(金憲)이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현재는 율곡리)에서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다.


1946년 3월 2일에 수도원에서 수도생들과 신도들이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었는데, 기도회를 하던 중에 천지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수년 동안 김백문이 집회를 가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수도원은 매년 3월 2일을 ‘개천(開天)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으며, <신조내의>(信條內意)라는 것을 발표했다.


수도원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문용명이라는 20대 중반(25세)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문용명은 후에 문선명으로 개명하는데, 그가 바로 통일교의 문선명이다.


김백문의 종말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백문은 부산 동래로 피신했다. 이때 김백문은 <타락, 복귀원리>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문선명은 그 원고를 교정보겠다고 가지고 가서 6개월 이상 가져오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김백문은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제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자녀 된 맹세’라는 것을 선포하고,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걸게 된다. 그리고 12월 25일 제1기 수사인 김정애를 신부로 맞아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를 치렀다. 전처 조선애와는 1962년 4월 20일에 이혼을 하였다.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는 스승 백남주가 원산 신학산에서 거행했던 ‘천국결혼 잔치’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김백문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원 김백문은 정릉 3동 산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처를 옮기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했다.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묘번 3456번)에 묻혔다.


+++


통일교를 위한 논리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 중심한 섭리(문선명)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 중심한 섭리--1945.10월 ~ 1946.4월


1. 김백문金百文 목사와 ‘예수교 이스라엘수도원’


이용도 목사를 중심삼고 3대의 계대를 이은 이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김백문입니다. 이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이 집단은 세례 요한격의 집단입니다.38 그는 하늘로부터 하나의 수도원을 소유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재림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세력을 준비하라고 들었습니다.39


김백문씨와 나는 가인과 아벨,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백문이란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뭐 선생님이 김백문의 제자니 뭐니 하는데, 선생님이 그의 제자가 될 게 뭐예요? 그 사람은 기독교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근본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신령한 면에서는 당시 기성교회의 최고 신앙 기준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40


그리고 당시 김백문은 이승만 박사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례 요한 입장에 세우고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41


2. 이스라엘수도원 상도동上道洞교회


그 집단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선생님이 찾아갔습니다. 그 때가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이었습니다.42 선생님이 맨 처음 이 길을 출발할 때, 1944년, 1945년입니다. 그때는 상도동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했습니다.43


선생님이 그 집단에 가서 6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뜻은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상속받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들이지 못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지도 못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기도하던 마루에는 눈물이 얼룩져 가지고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상에서와 같이 공작해서 사람을 슬쩍 빼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은 참이기 때문에 참의 가치를 알 수 있는 때를 기다려서 하나님의 복귀의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그 집단에서 발굴해 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단 속에서 말없는 종살이를 했습니다.44


3. 세 여인의 증거와 김백문 목사의 축복


만일 선생님이 그 영적 집단으로부터 한 남자와 그리고 그 남자와 일체가 된 세 여자들을 복귀할 수 있었더라면, 그것에 의해서 해와의 복귀를 위한 모든 조건들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늙은 여자, 결혼한 늙은 여자에 비유될 수 있고, 신약시대는 약혼은 하였으나 결혼할 수 없었던 여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 그 늙은 여자는 할머니에 비유될 수 있고, 신약시대의 여자는 어머니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약시대의 여자는 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의 자매를 뜻합니다. 김씨가 선생님을 축복하기 전에, 거기에서 선생님에게 주님을 증거했던 세 여인이 있었습니다.45


6개월 후에 김씨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는 선생님의 머리에 자기의 손을 얹고, 전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선생님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했습니다.46 3월의 부활절을 맞이해서 그의 식구들을 중심삼고 하늘의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식구들 앞에서 선생님을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상속 계대를 이은 것과 같은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흰 옷을 입고 축복을 해 주는 것입니다.47


원리관으로 볼 때에, 아벨은 가인을 하나 만들지 않고는 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되면 남자 세계를 통일해 가지고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가 딱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종적인 역사시대를 횡적으로 세워 가지고 완전히 탕감복귀한 승리의 기반이 생긴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48


4. 축복 후의 책임분담


선생님에게 그렇게 축복을 해 주고 나니까 그 집단에서 신령한 은혜의 역사를 하는 부인들이나 식구들 전부가 김선생을 따르지 말고 문선생을 따르라고 하는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내세우거나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앞 뒤를 전부 다 갖추어 놓았던 것입니다.49


김백문은 선생님이 솔로몬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축복을 했는데, 그는 그 진정한 뜻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일언반구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선생님이 자진해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50 그는 선생님에게 모든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었습니다. 아무튼 선생님은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선생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을 상속 받았습니다.51


새로운 영적 운동을 받아들이는데는 항상 인간의 책임이 따릅니다. 2천년 전에도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인간의 책임인 겸손한 자세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인간에게 책임분담이 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52 더구나 그 사람의 비행을 내가 다 알고 잘못도 다 알지만 말 안 합니다. 아는 사람은 보호해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더우기나 종교인,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겠느냐 이거예요.53


5. 김백문 교단 불신의 결과


만일 김씨 집단이 선생님과 하나되었더라면 바로 그것이 완성단계의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또 다른 기독교 집단을 찾아야 했고, 그 집단과 함께 기성교회 목사들을 연결시켜야 했습니다. 그 후에 연결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가 정부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3수를 만듭니다. 그것은 김씨집단이 완성단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종적인 섭리가 끝날에 횡적으로 복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세 여인들이 선생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선생님과 하나가 되어야 했으나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선생님은 그러한 세 여인과 한 남자를 복귀하기 위해 모든 조건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54


김백문이 받건 받지 아니하건 선생님으로서는 충고하여 청산하지 않고는 심정적인 재출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에게 열 여덟장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을 다 찢어버린 것입니다. 그 후, 선생님은 책임 다 한 입장에서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이 날이 없이는 평양에 갈 수 없었습니다.55


다음은 계속되는 말씀 하나 올립니다.


**** 선생님을 증거한 김백문****

이제 선생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복귀역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용도 목사를 중심삼고 3대의 계대를 이은 이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김백문입니다. 김백문은 남자를 중심삼고 에덴 복귀의 사명을 짊어진 두번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집단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선생님이 찾아갔습니다. 그때가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이었습니다. 이 집단은 세례 요한격의 집단입니다. 거기에 찾아가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탕감복귀역사를 해야 됩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축복해 준 것처럼 반드시 축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탕감역사를 해야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그 집단에 가서 6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뜻은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상속받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들이지 못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흘린 눈물을 여러분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은 상상하지도 못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얼룩져 가지고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상에서와 같이 공작해서 사람을 슬쩍 빼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은 참이기 때문에 있는 인적 자원을 그 집단에서 발굴해 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단 속에서 말없는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가 가르쳐 준 진리의 내용을 비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계시라도 받아서 입만 열면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아무 말없이 봉사하는 생활을 계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같이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영이 맑은 사람들이라 하늘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3월의 부활절을 맞이해서 그의 식구들을 중심삼고 하늘의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상속 계대를 이은 것과 같은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축복을 해 주는 것입니다. 무슨 축복을 해 주느냐 하면 솔로몬 왕의 축복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선생님은 그럴 수 있는 시간을 바랬습니다. 선생님에게 그렇게 축복을 해주고 나니까 그 집단에서 신령한 은혜의 역사를 하는 부인들이나 식구들 전부가 김선생 따르지 말고 문선생을 따르라고 하는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거 이상하지요? 지금까지 정성껏 모셔 오던 김선생을 따르지 말고 문선생을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내세우거나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앞뒤를 전부다 갖추어 놓았던 것입니다. 준비할 수 있는 기준이 다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났을 때 그 집단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또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선생님이 바랐던 것은 무엇이냐? 그 시대에 사명을 받은 부인이라면 그 부인 자식은 자기가 해와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와는 타락 이후에도 해와입니다. 따라서 `나는 여호와의 부인이다'라고 말하는 부인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부인이다' 그 다음에는 `인류의 어머니다' 하며 엉뚱한 말을 하는 부인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증하는 부인이 나야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런 역사를 하는 부인이 삼천리 강토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 다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은 박재봉 목사라든가 이호빈 목사를 잘 압니다. 그 사람들의 신앙 기준이 어떠한가 다 테스트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있는가 선생님은 다 압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