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목은선조님 신도비문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1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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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가네 카페 (http://cafe.daum.net/genius2family/)에 학촌 이일구 할아버지께서 2011년 1월 24일 올리신 글입니다.


오늘은 태종때에 그리도 말이 많았든 권양촌의 목은문집의 행장을 보고 하호정 선생이 찬하신 신도비 번역문을 목은집에 있는 대로 옮겨 올려 놓으니 많이들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설때 복사도 하여 집안들 끼리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목은선조 신도비(神道碑) 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의 원(元)나라로부터 조열대부(朝列大夫)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本國)에서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 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정(文靖)인 이공(李公)의 신도비(神道碑)병서(幷序) [하륜(河崙)]

문인(門人) 분충장의정란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겸 판상서사사 수문전대제학 감춘추관사 영경연서운관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大提學監春秋館事領經筵書雲觀事)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은 찬(撰)하다.

중조(中朝)에서 진사가 되었고, 이학(理學)으로 동방을 창명(唱鳴)하고 지위가 왕국(王國)의상상(上相)에 이른 이는 한산 (韓山) 목은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성산(星山) 초은선생(樵隱先生)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함께 과시(科試)를 관장하였는데,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다행히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제자(弟子)의 예를 가져온 지 어언 30 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공이 작고했을 적에 직사(職事)로 인하여 영위(靈位)에 가서 곡(哭)을 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 슬픈 생각이 그지없다. 지금 공의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찬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내가 참으로 공의 훌륭한  덕을 제대로 형용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의리로 보아서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색(穡),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인데,  대대로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曾祖)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고,조(祖)휘 자성(自成)은 원조(元朝)로부터 비서감승(祕書監丞)에 추증되고 본국(本國)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었다.

고(考)휘 곡(穀)은 원조의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고, 본국에서는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가 되었는데, 호는 가정(稼亭)이고, 시호는 문효공 (文孝公)이며, 원조의 원통(元統) 계유년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시문(詩文)이 한 시대에 뛰어났으며, 문집이 세상에 행해지고있다.비(妣)김씨(金氏)는 원조로부터 요양현군(遼陽縣君)이되고,본국에서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 되었는데, 천력(天曆)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글을 읽는 족족 외워 버렸다.  지정(至正)신사년에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14세 때인 무자년에는 가정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되었으므로, 공이 관례에 따라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으로 들어가서 학문이 더욱 진취되었다. 경인년에는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명년 정월에 작고하자, 공이 분상(奔喪)하여 삼년상을 마쳤다.계사년 여름에는 본국의 과거에장원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고, 가을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향시(鄕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오년 봄에는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참예하여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한것이 독권관(讀券官)의칭상(稱賞)을 크게받아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하여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겸 국사원편수관 (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칙수(勅授)되었다. 그 후 본국에 돌아와서 등용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해 주었다. 을미년 봄에는 왕부(王府)의 필도치(必闍赤)가 되고 내사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되었다. 이로부터 본국에서 벼슬을 제수함에 있어서는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시켰다. 여름에는 경사에 가서 본원(本院)에 임용되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 되었는데, 공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본국 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는 본국의 관제(官制)가 바뀜에 따라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에 제수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시정(時政)에 관한 여덟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ㆍ병부의 인재 선발하는 규정을 복구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므로, 이 임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유 년에는  시국자좨주 지각문(試國子祭酒知閣門)이 되고, 이어 왕부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전임되었다. 무술년에는 동료들이 모두 시사(時事)를 말한것 때문에 권귀(權貴)에게 거슬리어 좌천되었는데,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고, 추밀원우부승선 (樞密院右副承宣)에 승진 임명하였다. 그 후 누천(累遷)하여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무릇 7년 동안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왕을 성심으로 인도한 것이 매우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왕이 남쪽으로 행행하게 되자, 공이 왕을 시종하면서 호위하고   협찬하여 회복(恢復)의 공을 이루어 냈으므로, 일등공신(一等 功臣)으로 책록(策錄)하여 철권(鐵券)을하사하였다. 계묘년에는 원조(元朝)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제수되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고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의 호가내려졌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을사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되어,책을 휴대하고 과장(科場)에 들어가는 자를 수검(搜檢)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시켜 답안지(答案紙)를 일률적으로 고쳐 쓰게 하는 법을 시행할것을 청하였다. 정미 년에는 원조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제수되었다. 무신년에는 판개성(判開城)으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였다. 이때에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을 고쳐짓고 한 시대의 경술(經術)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생도(生徒)들을 나누어 교수(敎授)하게 함으로써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 하게 되었다. 이때 공은 매일 여러학관들과 더불어 생도들에게 교수를 마치고    나서는 서로 모여 앉아 토론하고 변석하면서 종일토록 피곤함도 잊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잘못된 구습(舊習)을 고치게되어 유풍(儒風)이 일신되었다. 여름에는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들에게 육경(六經)의 경의(經義)를 시험보여 7인에게 급제를 내리면서 공에게 명하여 시권(試券)을 읽게 하였다. 기유년에는 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삼장(三場)을 통고(通考)하는 법을 시행 것을 청하였다. 이전에 왕이 왕륜사(王輪寺)의 동쪽 언덕에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지었는데, 그 땅이 협소하다 하여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골라서 더할 수 없이 으리으리하게 지으려고 하므로,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상서하여 그것을 정지하도록 간하자, 왕이 노하여 유탁을 하옥시키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공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에게 유시하는 글을 지으라고 하자, 공이 그 죄명(罪名)을 물으니, 왕이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 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요, 또 법으로 보아서도 죽음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유탁 등이 상서하여 영전의 일을 정지할것을 청하였으니, 비록 이일로 죄준다 하더라도 국인(國人)들은 반드시 상서했기 때문이라고 할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점을 생각하소서.”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 더욱 급히 재촉하자, 공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더욱 몹시 노하여 정비궁(定妃宮)으로 처소를 옮겨 가서 진선(進膳)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튿 날 행신(幸臣) 신돈(辛旽)이 왕의 노염을 풀게 하기 위해 왕에게 청하여 공을 하옥 시키고 왕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적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포의(布衣)로부터 갑자기 달관  (達官)에 이르렀으므로, 항상 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만 있으면 반드시 숨김없이 진달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유 시중(柳侍中)을 죽이려고 하므로, 신이 감히 할 말을 다한 것은 다만 왕의 명성이 천하 후세에 불미스럽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였는데, 옥관(獄官)이 공의 말을 갖추 왕에게 아뢰자, 왕이 마침내 느끼어 깨달아서 유탁 등을  석방하고, 사람을 시켜 공에게 이르기를, “명일에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라. 내가 장차 사과하겠다.” 하였다. 그 후로는 왕이 더욱 공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신해 년에는 지공거가 되었다.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 (文忠保節贊化)라는 공신의 호가 더해졌다. 왕이 매양 공을 소견(召見)할 적에는 반드시 방을 청소하고 향을 피우면서 이르기를,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견줄만한 사람이 드문데,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명년 6월에 왕이 명하여 본직(本職)에 기복(起復)시키려 하였으나, 공이 극력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갑인년 가을에는 왕이 훙하였다. 공은 요양현군이 작고한 후로 지나치게 슬퍼한 것이 병이 되었는데, 게다가 왕이 훙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후 7년 동안이나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사년에는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保節同德贊化)의 호가 더해지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계해년에는 다시 한산군에 봉해졌고, 갑자년에는 부원(府院)이 더해졌다. 을축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병인년에는 또 지공거가 되었다. 공은 모두 다섯 번 시험을 관장하여 지명인사(知名人士)가 많이 나왔다. 무진년에는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행군하여 압록강 (鴨綠江)에 이르렀을 때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의거(義擧)로 회군(回軍)하여 최영등을 체포해서 물리치고 공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 불화가 있는데, 왕은 어려서 친조(親朝)할 수 없고 집정자(執政者)가 의당 가야겠으니, 노신(老臣)이 감히 자청한다.” 하니, 왕과 국인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있다 하여 굳이 만류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신이 지극히 두터운 국은(國恩)을 받았기에 항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자(天子)에게 국명(國命)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사는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마침내 입조(入朝)하여 그간의사실을 자세하게 아뢰니, 고황제(高皇帝)가 두터운 예로 공을 대우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가을에는 병으로 인해서 바쁜 직무에서 해면되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은것을 꺼리던 자가 있어 공을 탄핵하여 장단현(長湍縣)으로 폄척 하였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옮겨 졌다. 5월에는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공등 수십인을 청주(淸州)로 체포 해다가 장차 준법(峻法)을 적용해서 죄를 얽어 만들려고 하여 일이 자못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공은 천명(天命)으로 자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비가 아침부터 정오까지 내리어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넘쳐서 성문(城門)이 붕괴되고 관사(館舍)가 모두 물에 잠기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부여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참을 통하여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모두 방환 (放還)하도록 윤허하였다. 그래서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이르기를, “청주가 생긴 이후로 이렇게 극심한 수재(水災)는 없었 으니, 이는 자못 공 등이 신명을 감동시킨 소치이다.” 하였다. 왕은 본디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고 누차 소환(召還)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가 매양 다시 폄척하곤 하였다. 신미년 겨울에는 공이 함창으로부터 소환 되어 한산부원군에 다시 봉해졌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척  되었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7월에는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던 자가 공에게 거짓 죄를 얽어서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 하기를, “나는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무복(誣服)을 한단 말인가. 죽어도 곧은 귀신이 되면 또한 혐의 로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해지자, 왕이 공을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안치시키니, 공과 동시에 폄척된 사람들도 공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이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서 공을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친구의 예로 대우 하였으며, 공이 왕을 뵙고 물러나올 적에는 왕이 반드시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병자년 5월에는 공이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避暑)를 한다고 청하였다가, 7일에 병이 위독해졌다. 이때 어떤 중이 와서 공에게 불도(佛道)를 말하려고 하자, 공이  손을 내저으 면서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없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작고하니,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 하였으며, 사자를 보내어 치제(致祭)와 부증(賻贈)을  내려서 예장(禮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로 돌아와서 11월 갑인 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하고 학문이 정밀하고 예민하였으며,  일찍부터 가훈(家訓)을 받들고 중국의 태학(太學)에  들어가 글을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힘써 다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와서는 후생(後生)들을 힘써 진취 시키면서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학자들이 공을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숭앙하였다. 국가의 사명(辭命)을 수십년 동안 관장할 적에는 항상 중국조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는 붓을 잡은 즉시 써 내려갔는데, 사리(辭理)가 아주정밀하여 한 시대에 절묘(絶妙)하였다. 문집 55권이 있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박학하고 감식 (鑑識)하는 안목이 있어 전배(前輩)들을 논함에 있어서도 인정을 하는 일이 드문데, 유독 공에 대해서 만은 칭탄하여 마지않으 면서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天才)이다.” 하였다. 공이 평상시에 인물(人物)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혼연한 일단(一段)의 화기(和氣)뿐이지만, 벼슬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할 적에는 논의가 지극히 적절하여 확고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힘써 견지하고 조금도 명예를 추구하는 누(累)가 없었다. 평생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았고 비록 끼니를 자주 거르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히 지내면서 이따금 산수(山水)의 사이를 유람하여 심심소일을   하였는데, 그간에 방외인(方外人) 이라도 혹 종유하려는 이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요구하는 이가 있어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공처럼 이치를 달관한 명철함으로써 어찌 불가(佛家)의 환망(幻妄)된 설(說)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 임종 시의 한마디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부인(夫人)영가권씨(永嘉權氏)는 원조(元朝)의 명위장군(明威將軍)이 되고 본국에서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조에서 태자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고 본국에서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이 된 한공 (漢功)의 손녀인데,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여 있고 없는것 때문에 공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3남을 낳았다. 장남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그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나,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그다음 종선(種善)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인데, 임술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밀직(知密直)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맹유(孟㽥)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이고, 그다음 맹균(孟畇)은 을축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직제학 (藝文直提學)이 되었으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이다.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서령군(瑞寧君)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첨총제(僉摠制)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는6남을 두었는데, 장남 숙야(叔野)는 사재소감(司宰少監)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사수주부(司水注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副司直)이고, 그다음 숙묘(叔畝)는 공조의랑(工曹議郞)이며, 그다음은 숙복(叔福), 숙치(叔畤)이다. 딸은 정윤(正尹)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집의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계주(季疇)이고 둘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직 한산의 뛰어난 영재       / 維韓之英

훌륭한 가정이 있었으니        / 有翼稼亭

주옥같이 화려한 문사로        / 瓊琚厥辭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였고     / 射策帝庭

 

아 혁혁한 문정공 에게          / 於赫文靖

실로 경학을 전수 하였네       / 實維傳經

문정은 일찍 태학에 들어가    / 蚤入辟廱

그 명성 크게 전파하고          / 大播其馨

 

연이어 을과에 급제하여        / 聯中乙科

뒤이어 한림원에 들어가서     / 繼踵玉堂

명성이 더욱 크게 알려지니    / 厥鳴益大

국가의 광영이었네               / 國家之光

 

그만두고 동으로 돌아와선     / 斂而東歸

온 나라의 사범이 되었는데    / 師範一方

의리는 정하고 치밀하여         /義理精微

위로 정자(程子) 장자(張子)를 접하였고    / 上接程張

 

문사는 고상하고 고아하여                    / 文辭高古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을 내려 보았네 / 下視蘇黃

도가 그 몸에 축적되었기에     / 道積厥躬

처사가 안온하고 자상했으며   / 處事安詳

 

덕과 연치가 함께 높아서        / 德與齒尊

지위가 조정의 으뜸이었네      / 位冠巖廊

사명 받들고 중국에 가서는     / 奉使專對

천왕에게 예우를 받았고         / 見禮天王

 

돌아와선 사직을 요청하니       / 歸來乞閑

진퇴를 다 바르게 했 도다        / 進退其臧

오직 시기가 어려움이 많고      / 維時多艱

하늘의 뜻 또한 아득하여         / 天意杳茫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니       / 狼尾之疐

나라 사람들 마음 아파 했네     / 國人心傷

태산이 마침내 무너지니          / 泰山之頹

길 가는 사람도 눈물 흘렸네     / 行路涕滂

 

아 선생이여                         / 嗚呼先生

훌륭한 덕음을 잊을 수없네      / 德音不忘

자손들이 모두 계승했으니       / 子孫其承

복록이 길이 다하지 안으리      / 福祿未央

 

내 명이 아첨한 말 아니니        / 我銘不諛

이로써 먼 후세에 보이리라      / 用示攸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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