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2_Biography

북으로 간 어느 노간첩의 이야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24.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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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출처: http://online4kim.net/xe/bbs_pub/19273


이 이야기는 비전향 장기수로 2000년 북의 가족에게 돌려 보내진 남파 간첩 김석형씨와 그가 함경남도 정치 보위 부장으로 있을 때 말살 시킨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 성직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다만 이 글의 논지는 사실을 알리는 것 일뿐, 어떤 종교와 연결된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증오나 복수의 감정을 들먹이는 것도 아님을 먼저 밝혀둔다.

몇 년 전 내 사무실 부근에 점포를 가지고 있는 사장님의 연락이 있었다.

그 분의 따님이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 대구 수녀원)에 있다는 말은 들은바 있었는데 바로 그 수녀 따님이 종신 서원이라는 의식을 한다고 초대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것은 수녀들이 일생을 하느님에게 바치겠다는 의식이라는데, 하여간 나는 여자들만 있다는 수녀원을 구경할 수가 있다는 은근한 호기심에 그냥 응락 하고 말았다. 수녀분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일요일, 버스로 내려가서 의식도 잘 참관하고 수녀들이 직접 준비 했다는 점심도 잘 얻어 먹고 수녀원 구경을 하게 되었다. 깨끗한 수녀원 여기저기를 둘러 보고 작은 박물관 같은 곳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눈에 띄는 한 사실을 발견 했다.

베네딕토 수녀원은 독일의 툿찡(Tutzing) 수도원이라는 곳에서 한국에 진출하여 그 토대를 연 곳 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자리를 잡은 곳은 대구가 아니라 지금은 북한 땅인 함경남도 원산 이었다.

▲ 덕원 수도원의 성직자들, 상당수가 북한의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과거 기독교나 천주교들이 선교의 중심지로 택했던 곳이 북한 땅에 많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소련군이 북한을 접수하고 이어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수도원과 수녀원은 폐쇄 되고 성직자들은 감금되어 무려 28명의 순교자가 발생 했다.

베네딕토 박물관에는 북한의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 수녀들이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살아 남기위해 투쟁하던 독일인 수녀들이 추위를 버티려고, 헌 실을 모아 만든 초라한 장갑과 모자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독일인 순교자의 이야기는 책 께나 읽었다는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여기서 몸서리치게 싫은, 김일성 집단이 장기로 삼는 살육의 냄새를 또 맡고, 떨어져 있던 정나미가 더 떨어졌다. 지금의 관광객 살해에 이르기까지...

한국 전쟁 때는, 세상 물정 모르던 대원군이 사람들을 떼죽음 시키던 19세기도 아니었고, 한반도가 뉴기니아 같이 식인종이 우글우글했던 미개지도 아니었다. 자기들과 사상이 다르면 그냥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면 되었지 힘 없는 외국인 수녀들의 목숨까지도 빼앗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먼저 지금 남한 국민들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함경남도 덕원에 1920년대에 독일 성직자들이 찾아와 수도원을 열고 운영하게 된 내력을 한국 카톨릭계의 출판물을 통하여 한번 알아보자.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 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 맡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Abbot-Bishop Boniface Sauer, OSB) 주교는 독일의 투칭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의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 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 반은 후에 "호수 천신 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Priory)으로 승격 되었다. 원산 포교 베네딕도 수녀원과 베네딕토회 덕원 수도원은 남매 격이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Sr. M. Mathilde Hirseh) 수녀가 임명 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유치원", 본당활동, "호수 천신 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1936년에 신설된 회령(會寧)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 약방, 보통학교 등을 운영 하였고, 1933년에 신설된 고산(高山)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 "해성 유치원",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 등을 운영 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咸興)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과 학교에서의 선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淸津)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 활동을, 1948년 신설된 홍남(興南) 분원에서는 본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 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 당하였다.

▲ 덕원 수도원

해방후, 소련군의 만행은 체면을 떠난 막무가내 식이었다. 그들은 진주하자 말자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 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개척으로 얻은 농토도 몰수 하였다.그러나 뒤이은 김일성의 정권의 탄압은 비인간성의 극치를 다한 것이었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의 습격 및 체포로 모든 성직자들이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 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 왔으나 곧 해산 당하였고 서양 수녀들은 서양 신부·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 하였다.

한국 전쟁중인 1950년 10월에는 6명이 피살되었고, 평안북도에 있던 수용소 생활에서 겪었던 5년간의 긴 억류생활에서 17명이 옥사(獄死)했다. 타지에서의 순교까지 합치면 총28명의 순교자가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에서 나왔다.

그 무렵의 북한 조선 노동당의 정치 보위부라는 것은, 소련의 KGB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비밀 경찰 조직으로서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

여기서 덕원 수도원과 산하 각 종교기관이 강제로 폐쇄되고 이들 외국인 남녀 성직자들이 끌려간 곳이 정치 보위부의 교화소라는 구절에 유의하자. 덕원 수도원을 박살내기에 앞장서서 이 처럼 많은 순교자를 발생시킨 주역은 함경남도 정치 보위부장 김석형 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 사실을 발견 했다.

그가 떼죽음으로 내 몰았던 덕원과 원산 성직자들 중 겨우 살아 남은 독일 성직자들이 2년간의 본국 휴식을 끝내고, 헐벗고 힘든 한국에 다시 찾아 온지 4년이 지난 1960년, 전직 함경남도 정치 보위부장 김석형도 유유히 한국으로 들어왔다.

▲ 노인이 된 전 정치 보위부장 김석형

불행한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봉사하겠다는 독일 성직자들과는 전혀 반대의 임무인 남한을 전복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휴전선을 넘은 그는 물론 간첩이었다. 그는 보위부장의 보직 뒤에 조선 국제여행사 함흥 안내소 소장과 평양 국제 여행사 평양 상점 부지배인등의 공산당 간부 생활을 하며 편히 지냈었다. 왜 그가 남한에 보내졌는지는 모르지만 김석형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남한 혁명을 위해서 자원했고, 아무 남파 훈련도 받지 않고 집에서 바로 휴전선으로 와서 안내원을 따라 우이동 쪽으로 넘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소박 맞은 열 여섯 살 아래 나이의 여자를 현지처를 거느리고 신분 위장 목적의 사업을 하다가 한국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32년 간이나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냈다. 비전향 장기수로서 오기로 버티다가, 1992년 석방 되어 남한에서 살던 그는, 2000년에 북한으로 송환 되었다. 그가 교도소를 나와서 재야 진보파들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무슨 집회니 시위니 하는 곳에 얼굴을 내밀면서 운동권이라는 곳에 이름이 많이 알려지자 한 젊은 학자가 이 사람을 장기간 24번이나 인터뷰 하여 그의 말을 모두 기록했다.

그가 떠나고 다음해인 2001년, 그의 인생 회고담은 "나는 조선 노동당원이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다. 저자의 주관이 섞이지 않은 김석형 만의 구술을 그대로 옮긴 학문적인 목적으로 구성된 책이다.

▲ 김석형, 여러 집회에 참석했었다.

이 책을 보면 시공을 뛰어 넘어 50년대 치열한 이데오르기 투쟁 때의 화석 같은 인간 의식들이 튀어 나온다. 김석형은 칼 맑스와 김일성을 제일 존경한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는 그가 존경하는 김일성이가 죽은 뒤, 이 대한민국의 땅에서, 마치 옛 효자들이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앞에서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듯 삼년간 머리를 길게 기르고 그를 돌아가신 아버지 처럼 조문 했다. 그는 삼년의 시묘살이가 끝나고 나서야 머리를 깎았다.

그의 회고는 그가 일생을 통하여 조선 노동당의 가치에 저항 하거나 배치되는 것들에 얼마나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투사"로 살아 왔는가를 완고 하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보위부장으로 반공인사를 때려 잡고 한국에서는 전향을 강요하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저항해서 "가열" 차게 투쟁했던 대목이 중점적으로 구술 되어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함남 보위부장 시절에 집중 되었다 마치 쾌걸 조로가 악당을 두들겨 잡는 듯이 활약 했음을 신바람 나게 회고 했다.

보위부장 김석형은 북한에서 반공인사들이나 전쟁 중에 투입된 KLO 부대원들을 전투 부대를 직접 지휘해서 체포하거나 처형 했다. 때로는 저항 하는 반공인사를 직접 현장에서 권총으로 사살 하기도 했다. 그는 자랑스럽게 이 사실을 회고했다.

그의 적들에 대한 투쟁은 남한의 교도소 안에서도 계속 되었다. 전향을 강요하는 교도소 당국에 맞서 비전향 장기수들과 매일 매일 "학습"을 하며 절개를 지켰다. 그가 암에 걸린 후배 간첩에게 했다는 말에서 섬득한 느낌이 든다. 후배 간첩이 위암을 선고 받자 교도소에서 전향하고서 빨리 수술을 받으라고 설득했다. 수술을 안해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향시킬 목적으로 달랬던 모양이다.

후배 간첩은 김석형에게 상의했다. 그러나 김석형은 냉혹했다. "지금 현대 의학으로도 위암은 못 고쳐! 언제가는 죽어, 그러니까 그것을 자연 수명으로 알고 정신 똑똑히 챙기고 편안히 살다가 가는게 좋다우."

▲ 교회에서 주관했던 기자회견장에도 나갔다. 뒤에 십자가가 보인다.-맨 오른쪽

전향하지도 말고 암수술도 받지 말고 그냥 죽으라는 말이다.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그 후배 간첩은 정말 얼마 못 살고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인간이라면 사람이 이지경이 되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니까 마음에 없어도 전향서에 싸인 하고 수술 부터 받으시오."하는 것이 도리 일텐데, 그는 이처럼 비정했다.

그중 그가 북관지방의 외국 성직자들과 주민들이 힘들게 이식시킨 카톨릭의 뿌리를 뽑아 버린 덕원 수도원 박살내기에 관한 구술은, 그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김명학이라는 함흥의 의사 이야기를 하다가 곁가지로 나온 이야기였다. 김명학씨는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의사로서 함흥에서 개업하고 있다가 1.4후퇴 때 남으로 피난 나와서 남한의 의료계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의술에도 뛰어났지만 만능 스포츠맨으로 대한 축구 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작가 전광용씨가 62년에 쓴 "꺼삐탄 리"의 주인공 이인국씨 박사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 1969년 작고했다.

해방된 후에 어떻게 됐는가?

소련군이 물밀듯이 나오면서 함흥 베네스트 수도원(베네딕토 수도원을 잘못 기억한 명칭) 갖다 접수를 했거든, 접수를 해 가지고 자기네 군대를 거기다 주둔 시켰단 말이야. 그러니까 베네스트 수도원에서 로마 교황에다가 보고를 했던 말이야 그래서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이 스탈린에게 연락했거든, "조선에 나와 설레무네 우리 교단을 전부 다 접수를 했대는데 이거 내주시오."

"그러니까 스탈린이 급작스레 이제 스티코프 대장(나중에 북한 소련 대사, 정치 장교 출신) 한테 명령을 떨궈 가지고 그걸 다시 내줬단 말이야. 근데 지금 함흥 수도원에 있는 작자가 어드런걸 했는가 하게 되면, 반 맑스주의 제강을 짜 가지고 각 수도원에 돌아가면서 강의를 했거든, 그게 우리 정보망에 걸렸던 말이야. 강의 원고가 우리에게 접수 됐던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일시에 그 걸 접수를 했단 말이야. 덕원, 함흥, 흥남, 북청 할 것 없이 일시에 덮쳤단 말이야, 덮쳐서 수색해 보니까, 그 사람들의 원고 원본이 발견 되었는데 라틴어로 썼거든. 그러다 보니까, 라틴어를 갖다가 번역할 사람이 없단 말이야. 김명학이가 독일 유학했거든, 그러니까 라틴어에 능통했단 말이야. 그래서 불러 가지고 전부 번역 시켰단 말이야."

라틴어로 썼다는 것을 보면 강사는 독일인 신부이고 덕원 신학교 교재로 작성했던듯하다.

▲ 덕원 수도원의 식구들

함흥 정치 보위 부장이었던 사람의 회고와 카톨릭 교계의 기록에 있는 정치 보위부 교화소로 끌려 갔다는 기록과 일치함을 보면 이번 교난의 주동자가 누군지를 물어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이것으로서 함경남도 정치 보위부장 김석형에 의해서 교화소(교도소)로 보내진 한국과 독일의 성직자들은 모진 운명에 빠지게 되었다. 평양 교화소에 구금된 연로한 샤우어 원장이 제일 먼저 비인간적인 처우에 버티지를 못하고, 1950년 2월 세상을 떴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터졌고 그 해 10월, 북한이 퇴각할 때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던 6명의 덕원 수도원 성직자들이 총살 당했다. 이글을 쓰면서 추가 자료를 찾다가 20년 전에 덕원 수도원의 베네딕토 남매인 원산 수녀원 소속으로 교화소를 끌려 갔었던 수녀들의 이야기를 집필 했었던 수녀분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 그 분과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에 계시는 베로니카 수녀였다. 그녀는 그 무렵 아직 생존해 있던 많은 한독 성직자들을 인터뷰 하고 독일에서 많은 자료를 모아서 원산 수도원 수녀들의 수난사를 썼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수녀가 된 베로니카 수녀님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로서 서울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서울 애화 학교"라는 청각 장애자 학교 초대 교장까지 지내신 분 이었다. 칠순의 나이인 지금도 정력적으로 집필 생활에 여념이 없으신 중에 통화가 된 그 분은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 평양에서 옥사했던 샤우어 대주교, 살아 있는 성인으로까지 불리던 인자한 분이었다.

금강산 관광객 살해 생각이 나서 먼저 말해 둘 사항이 있다. 북한의 공산당들이 죽음을 안겨 주었던 것은 남자 성직자들만 아니었다. 원산 수녀원 소속 두 분의 한국인 수녀가 이들에게 무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들에게 약한 여자들 죽이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 모양이다.

원산 수녀원 소속의 박 루시아 수녀는 북한군이 후퇴 중인 1950년 10월 11일 평남 순안에서 아무 이유 없이 평안북도 정치 보위부에 끌려 가서 총살 당했다. 원산 수녀원의 헌신녀였던 다른 장 안녜타 수녀는 김석형에 의해서 함흥 교화소에 수감 되었다가 그해 10월에 유엔군이 진격할 때 역시 둔기에 맞아서 살해 당하고 우물 속에 던져졌다. 헌신녀는 기혼자로서 비공식 수녀의 신분을 얻은 분을 일 컫는다. 그외에 소속은 다르지만 메리놀 수도회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 원장인 장수녀(장면 박사의 남매)가 학살 당했다.

외국인 남녀 성직자들은 자강도 강계군 전천면 별하리에 있는 수용소에 끌려가서 짐승 같은 취급을 받으며, 1954년까지 5년간 노동을 해야 했다. 이곳을 성직자들은 "옥사덕"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가혹한 수형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15분의 독일 남자 성직자가 순교했고, 두 분의 독일인 수녀가 세상을 떴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도 않고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워도 마구 노동에 내몰았으니, 어떤 천하 장사라도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두 수녀들도 열이 40도가 오르내리는 인사불성 상태에서 며칠을 살다가 결국 하느님의 곁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이 베로니가 수녀님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이 베로니카 수녀님이 알려주는 두 독일인 수녀들은 "에바 슈츠(Sr. M. Eva Schütz)" 수녀와 "프룩트오사(Sr. M. Fructuosa Gerstmayer)" 수녀인데 그곳에서 생을 마친 독일 남녀 성직자들은 아직도 그 얼어 붙은 동토에 잠들어 있다.

▲ 덕원 수도원 성당 미사, 남녀석이 나뉘어 있다.

김석형에 의해서 교화소에 보내진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김석형에게 끌려가지 않았던 덕원 수도원(원산 수녀원) 수녀와 신학생등은 전쟁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월남하여 부산과 대구의 성당등에서 기식했지만 그들은 가진 것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미군 옷을 세탁해주며 한동안 걸인처럼 연명해갔다. 이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있던 성직자로서 만주의 연길 교구에서 피난 온 성직자들도 있었다. 그 곳에서도 중국 당국에 의해서 장기형을 살다가 옥사한 신부들이 있었다.

전후 복구가 시작 되고 덕원 수도원과 연길 교구에서 피난 온 베네딕토회 소속 성직자들은 외국의 도움으로 왜관에 자리를 잡고 덕원 수도원의 명맥을 이을 수도원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베네딕토 남매라고 할 수있는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이 역시 해외의 도움을 받아 대구에 문을 열었다. 지금의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이다.

그 뒤, 덕원 수도원(원산 수녀원)에서 김석형에 의해서 연행되어 평안북도의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독일로 송환되었던 독일의 남녀 성직자들이 다시 하나 둘 씩 폐허의 땅,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베로니가 수녀님이 기억하는 (김석형에 의해서) 교화소로 보내진 원산 수녀원 소속 독일인 수녀들은 20명이다. 그 중 두 명이 이역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18명이 독일로 송환 되었다가, 그 중 건강이 허락하는 10명이 고생을 마다 않고 전쟁의 상처로 아프게 앓고 있던 가난한 한국으로 와서 헌신과 봉사의 노력을 다 했다. 죽음의 땅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외국의 수녀들은 독일의 수녀들 외에도 대한 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했던 에케르트(Franz Eckert)의 외손녀 되는 수녀로서 국적이 프랑스였던, 임마쿠라타(Immaculata Martel) 수녀도 있었고, 독일 수녀들보다 먼저 청진의 일본인 수용소로 끌려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탈출 했었던 일본인 "사베나 노무라" 수녀도 있었다.

원산 수도원에 두 명의 일본인들이 있었는데, 그중 다른 분인 "막달레나 무로" 수녀는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로 심리상태에 이상이 생겨 돌아오지 못했었다.

▲ 북한 수용소에서 고난을 같이 했었던 독일 수녀들과 신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찍은 사진이다.

전후 힘든 세상을 헤쳐 온 한국인들과 일생을 같이 했던 독일 수녀 분중에, 지금도 95세의 나이로 생존해서 대구의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에 있는 분이 있다. 한국명 채인숙, 벨트비나(Sr. M. Bertwina Caesar) 수녀인데 청각만 약해졌을 뿐 아직도 정정하시다.

▲ 덕원 신학교 학생들과 신부들, 학생들중 상당수가 후에 한국의 주교가 되었다.

쓰라린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의 고통을 잊고 남한 땅에 자리 잡은 베네딕토 수도원과 수녀원은 한국과 독일의 성직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의 노력으로 놀랄 만큼 발전 했다.많은 성당과 분원을 열었고 병원도 열었다.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 소속인 병상수 800개의 대구 파티마 병원은 일반인이 아는 베네딕토 수녀원의 성장 크기를 가름할수있는 척도이다. 처음에는 동네 의원 크기로 시작했던 병원이 이처럼 성장했다. 또 베네딕토 수도원도 미국에도 넓은 수도원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보위부장 김석형이 철저히 밟아서 그 존재를 말살 시키려던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와 민들레 씨앗처럼 남한에 연약한 뿌리를 내렸던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의 후예들이 오늘은 거목처럼 커진 것이었다.

김석형은, 1992년, 전향에 관계 없이 나이 70이 넘고 수형생활 30년이 넘는 전직 사상범들을 전향했건 않했건, 모두 석방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78세인 1992년 형 집행 정지의 조치에 따라 성탄절 특사로 출소 하였다. 정부의 석방 방침을 알게 된 그는 통일이 되면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정작 출소 되자 못 이기는 체 바깥 세상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아산 요양원에 보내져 몇 개월 동안 아산 생활을 했다.

앞의 강제 수용소에서 나약한 수녀들까지도 학대하여 죽게 만든 인간들의 처사를 알고 다시 읽어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 그에게 보여준 대전 교도소 최모 교무 과장의 인정 있는 배려가 인상적이다.

최 과장은 자기의 차로 김석형을 아산 요양원에 모시고 와서 전직 대학 교수였다고 소개하고 잘 모시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아무도 그가 전직 간첩인 줄은 몰랐다. 그의 구술을 통해서 봐도 간첩 김석형을 나이 80이 다 되도록 건강하게 관리했던 한국 교도소의 인간미는 아무리 전쟁 기간이라지만, 죄 없는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어 놓고 정녕 멀쩡했던 여자까지 죽게 만든 북한의 강제 수용소 인간들의 그것과 대조가 된다.

사실 그는 체포 초기 고문을 받았던 일과 박과 전 정권 때, 전향 공작만 빼고는 강제노동도 없이 그런대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말하고 싶은 것 다 말하고, 읽고 싶은 신문 다 읽고, 떼 쓸 것 다 떼 써 가면서, 교도소장을 비롯해서 교도관으로부터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받아 가며 그 긴 세월을 괜찮게 지냈다. 앞의 외국인 성직자들의 비참한 떼죽음을 알게 된 후, 다시 읽어보니 느껴지는 바가 있어 굳이 다시 덧 붙여 본다.

김석형은 출소 후 한국 사회에서 8년간 살았다. 그 세월 운동권과 재야 단체가 접촉을 많이 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특히 민가협의 이야기가 그의 회고에 많이 나온다.

출소 후, 민주화의 바람과 진보세력의 탄생은 그가 비전향 장기수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동정과 호기심을 일어나게 했으며 그를 엉뚱한 통일의 일꾼으로 만들어 여러 대학을 다니며 젊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했다. 자기 말로도 수 없는 곳을 다녔다고 한다. 평양에서 박해를 받고 남쪽으로 피난 온 숭실 대학교에 가서도 젊은 학생들 앞에서 주체사상의 위대함에 대해서 강의 했었다.

그와 종교 단체와의 교분은 이미 대전 교도소에 있을 때 부터 맺어져 왔었다. 그는 재소자 시절의 종교인 접근을 자신을 전향시킬 불순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비뚤어진 시각으로 회고하고 있었지만, 출소 후에 종교 단체에서 자신에게 보여준 인정에 대해서는 그저 덤덤하게 구술 하고 있다.

▲ 이런 노인분[왼쪽]이 어떻게 그런 일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 대 타격을 주었던 카톨릭 사람들이 그에게 베푼 배려는 특히 두들어 진다. 그가 출소하여 아산 요양원에 자리 잡은지 열흘도 안되어 찾아왔던 최초의 종교인은 부천의 윤모 신부였다. 윤 신부는 김석형이 한국에 있는 동안 연락을 주고 받으며 그를 돌보아 주었다. 시설이 열악했던 아산 요양원에서 그를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서울로 모시고 온 사람도 송 모 신부였었고, 그가 그의 주선으로 편히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했던 집의 주인도 카톨릭 신자였었다. 그리고 최 모 씨라는 정의 구현 사제단 총무 사제가 그를 찾아와서 돌아보고 매달 일정한 액수의 용돈도 지급했다. 그는 자신이 비전향 장기수 후원회 총무도 겸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다.

그가 강의를 다닌 곳 중에 윤 모 신부의 초대로 찾아 갔던 부천의 갈산 성당도 있었고 명동 성당의 수녀들 모임도 있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카톨릭 인사가 또 있다. 그를 북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 김대중 대통령도 카톨릭 교인이었다.

그가 북한에서 뿌리를 뽑아 버렸던 카톨릭이야 말로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대로 그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 말한대로 그는 2000년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북으로 갔다. 그리고 김정일은 "절개"를 지킨 이들에게 주택 제공과 새 배우자 제공등의 엄청난 환대를 했을 뿐더러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에도 이들을 동원해서 100% 활용했다.

궁금한 것은 조선 노동당원인 김석형의 내면에 숨겨져 있을 인간 김석형이 그가 죽음으로 내 몰았던 덕원 수도원의 성직자들 후배인 신부들과 수녀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직하게 따라서 베풀어준 사랑을 깨닫고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의 책에서는 이 점에 대한 아무런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글의 북으로 간 전직 함남 보위부장이었으며 전직 간첩이었던 김석형의 이야기다.

여기에 간단히 요약해서 나름대로의 몇 가지 주석을 달아본다. 이 글을 보고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은 왜 진짜 빨갱이 김석형을 처형하지 않고 송환했느냐고 노발대발 할 것이다. 그러나 반인륜의 흉악범이 아닌 간첩에게 사형은 너무 과하다하는 현대의 법정신에 나는 공감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정신 병자 수준의 화석같은 사람을 죽여서 얻을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김신조나 김현희의 불처벌 같은 관대한 법적조처는 물론, 전향을 했건 안했건,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송환 경우 같이, 송환해주자 치료해준답시고 미국에 까지 그를 보내서 선전 쇼우를 벌린 김정일이 덜된 인간이지, 그가 체제 선전의 풍각쟁이를 한다는 이유로 우리까지 머리가 화석같이 굳어 정상적인 대화마저 힘든 그들을 한국 사회에 붙들어 둘 이유는 없다. 차라리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북의 가족들과 보내게 하는 것이 남한이 북한과 다른 인간 존중의 풍모를 확실히 보이는 길이다.

단지 김석형등의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등과 거금 투입으로 북한 방문의 기회를 잡았던 김대중 정부가 왜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국군 포로들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6;15선언에 포함 시키지 않았던가 하는 사실만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김석형에게 남쪽의 젊은 학생들과 여러 종교계의 인사들이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것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을 28명의 베네딕토 순교자들도 잘했다고 격려 해줄 것이다.

이번 일은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어서 말해 본다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추구할 궁극적인 가치는 사랑이라던가 용서라던가 화해라던가 포용이라던가 하는 것이지 결코 투쟁이니 대결이니 증오니 해방이니 하는 단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선문답 같지만 위의 김석형이가 끝까지 신봉했던 가치와 그를 용서하고 보살펴 남한 인사들의 가치를 비교해보면 이해가 되리라 본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왜관의 수도원에서 순교한 덕원 및 원산 성직자 28위 포함 36위의 순교자들을 복자로서 시복하기 위해서 바티칸 교황청에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나야 잘 모르지만 모든 일이 다 잘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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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형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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