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단편소설 - 어느 산사의 노을 - 작가 해리 이선명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2. 13. 05:17
반응형


어느 산사(山寺)의 노을

 

작가李海里

 

   서울 김포 공항을 출발한 노스웨스트 항공 001편 여객기는 일본의 하네다 공항과 알라스카의 앤커리지 공항을 거쳐 미 대륙 북부 상공을 밤새 비행한 끝에 뉴욕 시를 서서히 접근해왔다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솜사탕의 운해(雲海)를 뚫고 나온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뉴욕은 이제 막 옆으로 살짝 비켜선 구름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아침 이슬이 반사되어 촉촉한 윤기를 뿜어내며 솟아오른 맨해튼의 웅장한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NW 보잉 747기가 이제 뉴욕항 입구에 위치한 앨리스 섬에서 큰 횃불을 들고 우뚝 선 자유의 여신’ 상을 발견하 자 반가운 듯 은빛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손짓하면서 서서히 속력을 줄여 대서양으로 빠지는 이스트 강변을 끼고 왼쪽으로 선회하다 저 먼 발치에서 빠른 속력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활주로에 육중한 기체를 사뿐히 내려놓았다이 순간 거대한 이 인조(人鳥)는 거친 돌풍에 휩싸여 (…)하고 굉음을 지르며 한참을 슴가쁘게 달리다 점점 속력을 줄여 5번 청사 가까이 일단 가볍게 멈쳐선다.

   이 때 상냥한 여자 목소리의 어나운스멘트가 흘러 나왔다.

   “우리 여객기는 방금 미국 뉴욕에 위치한 케네디 국제공항에 안착했습니다지금 현지 시간은 8 15기온은 화씨 61도입니다여러분께서는 비행기가 승강장에 접안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계속 자리에 않아계시기 바랍니다저희 노스웨스트 항공사를 이용해 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곧 다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윽고 조종사가 지상 가이드의 신호에 따라 기체의 출구를 청사의 램프에 대 자 탑승객들은 오랜 비행 끝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데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숙연해졌다이들은 곧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한 후 옆좌석에 앉았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머리 맡의 기내 휴대품 보관함을 열어 부산하게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꺼내느라 기내가 잠시 소란스러웠다이윽고 승강구의 문이 열리자 손님들은 앞 좌석에서부터 두 줄의 통로를 따라 차례차례 출구를 빠져나가며 승무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들 여객들 틈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한국 여인이 갈색 코트를 걸치고 출구를 천천히 빠져 나간다칠 년 동안 헤어졌던 남편과 재회의 순간을 맞는 감회에 젖어 잔뜩 긴장한 그녀는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무척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다비행기 출구를 빠져나서 자 갑자기 냉기가 그녀를 덥쳤다몽롱하던 정신이 깨면서 그녀는 갑자기 심한 피로감이 쏟아져내려와 몸의 균형을 가누기 힘들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돌이켜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별이었다부산에서 소규모의 편의점을 경영하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고등학교 선배의 주선으로 외항선 선원으로 취직이 되어 한 동안 일본과 홍콩 등지를 드나들며 외제 물건들을 조금씩 들여다 팔아 빚을 갚아나가면서 재기의 희망을 되찾았다그러나 이내 또 다른 불운이 찾아왔다어느 무더운 여름 날 밤이었다외아들 영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뒹굴어 체했겠지 하고 소화제를 먹이고 배를 쓰다듬어 주며 달랬다그리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차도가 없어 먼동이 트면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러나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몸이 싸늘해져 있었다급성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악화되어 배가 터졌다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남편은 외항선 타는 것도 그만두고 밤낮으로 술에 빠져 소일했다때로는 며칠씩 집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그러던 남편이 하루 저녁은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와서는 내일 아침 일찍 미국을 왕래하는 외항선을 타게 되었다며 간단히 짐을 챙기라고 했다모처람 차려준 저녁상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잠에 떨어졌다.

    이렇게 떠난 남편한테선 한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다어느 날 남편의 선배가 찾아와서 남편이 미국의 마이아민가 하는 곳에 짐을 풀던 배에서 줄행낭을 쳤다고 알려줬다칠 년 전의 일이다그리고 몇 개월 후 남편으로부터 자리를 잡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는 반신 주소도 없는 간단한 편지가 날아오고는 소식이 끊겼다.

    삼 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영호 아빠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이성희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영호 엄마얼마나 고생이 많소그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오자리를 잡으면 연락한다고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이렇게 늦었오.그러나 난 단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멀지 않았소.

    “나는 마이아미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일하다가 2년 전 이곳 뉴욕에 와서 전세 택시운전을 하고 있오곧 기반을 잡는 대로 당신을 초청할 테니 조금만 더 참고 견디도록 해요.

    이 여인은 남편한테서 기별이 있은 후 김해의 시가에 내려가 3대 독자로 가문을 지켜야 할 아들이 미국에 가서 종적을 감춘 후로 홧병에 몸이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일을 거들었다자상한 시아버지는 며누리를 끔직히 사랑해 주셨다.

    “얘야그래 그 쓸개빠진 녀석을 믿고 기다리는 네가 가엽기만 하구나하지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너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머지않아 자비를 베풀꺼여옛 선인들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말씀하셨지...

    그러나 시아버지는 어느 날 농삿일을 거들다 논에서 쓰러지셨다그는 얼마 후 결국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운명 직전 시아버지는 눈을 어슴프레 뜨시고 모기만한 소리로 입을 떼셨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녀석이 달려올 게야아가그럼 걔를 꼭 붙들어야 혀...

    그러나 남편과의 재회의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매달 한두 번씩 날아오던 편지도 반년이 채 못 돼 끊어지고 말았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휘청거리며 출구를 빠져나오던 이성희 여인은(영호야!) 하고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떴다온 몸에 식은 땀이 칙칙했다.

     (계십니까?)

    쌍계사 대웅전 지붕 한쪽 끝 처마가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의 깍아지른 벼랑에 매달려 있는 이 암자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잠시 쉬다 깜박 잠이 들었던 이성희 여인은 문풍지 사이로 바람에 실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그만 꿈을 깼다그녀는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켜 저고리 매무새를 추스리고 가만히 문을 열었다.

    분명히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는데 앞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도 않고 마침 절간 뒤 계곡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에 노송의 길게 뻗은 울창한 가지들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이성희 여인은 아직도 단꿈에서 미쳐 깨어나지 못해 무거운 짐을 끌고있던 오른쪽 팔에 통증을 느꼈다.

    (거참몹쓸 꿈도 다 있지그런데 왜 하필 그 때...) 이성희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다시 방에 들어서서 문을 닫으려는 순간 암자 모퉁이에서 투박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안녕하십니까전 아무도 안 계시나 해서 뒷모퉁이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헤어진 남편을 재회하는 가슴벅찬 순간 그만 꿈을 깨어버린 아쉬움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성희 할머니는 몸을 되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얘가! " 

   할머니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암자의 툇마루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할머니어디 불편하신데라도... "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를 차리던 방문객은 황급히 할머니 곁으로 가까이 달려왔으나 비록 노인이지만 초면의 여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경망스러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엉거주춤 마루 끝에서 멈춰 섰다.할머니의 주름진 이마에는 땀이 송송히 맺혀 있었다.  

  (우리 영호우리 영호가... 아니 그게 아녀관세음보살!)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고 있던 김순식 교수의 귀에는 이 순간 이년 전 뉴욕의 한 병실에서 회한이 이슬처럼 맺힌 눈을 감으며 임종하던 박지순 노인이 숨을 거두며 중얼거리던 절규가 메아리 쳐 왔다.  

  (영호 엄마영호 엄마나를나를 용서해 줘나를...) 

  한이란 이토록 모질고 끈질기게 한 인간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고수십 년의 세월과 저 드넓은 망망 대양을 건너아니  어쩌면 무한한 시공을 헤매어 온 이들 두 영혼을 붙들어 매고 있는 보이지 않은 끈을 확인하고 있는 김 교수는 소스라쳐 놀랐다.  

  김 교수는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그를 붙들고 귀국하면 "우리 영호 엄마를 꼭 한번 찾아 내가 이렇게 죽어 가지만 우리 영호 엄마를 정말 끔직히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나하던 박 노인의 간절한 부탁을 잊을 수 없어 오랜 수소문 끝에 산간벽지의 절을 무수히 찾아 다니다 오늘에야 지리산 천왕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쌍계사를 찾아 온 것이다

  "할머니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계십니까? " 

  "아니선상님미안하구만이라이제 죽을 때가 다 돼나서... "  

  아침에 산까치가 유난히 지져겨 혹시라도 무슨 반가운 소식이라도 있으려니 하고 종일 들떠있던 이성희 할머니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 낯선 젊은이를 옆 눈으로 슬쩍슬쩍 뜯어본다. ( 어쩌면 죽은 영호의 얼굴을 저렇게 쪽 빼놓은 것처럼 닮을 수가 있담그 녀석이 지금 살아있으면 이 청년처럼 저렇게 늠름한 모습이 아니겠나관세음보살!) 

  "스님은 지금 법당에 내려가 계십지요. " 

  "스님께서 암자에 먼저 가 기다리라고 하셔서... " 

  "그러시면 방에 들어 쉬셔야지요. " 

  "할머니저는 밖에서 잠깐 땀을 식힐 터이니 몸도 불편하신데 좀 누워계시도록 하십시오. " 

  이 노인은 한 참을 머뭇거리다가 방으로 들어갔다모처럼 한적한 절을 찾은 김 교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사방을 살핀다.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암자 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저녁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비낀 산 자락은 겹겹이 꼬리를 물고 펼쳐져 섬진강 쪽으로 굽이치고 있었다산을 무척 좋아하는 김 교수는 십 년이 넘도록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틈틈이 여러 산을 오르곤 했지만 이토록 정겹고 아름다운 산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둘러본 콜로라도와 유타주 그리고 오리곤 등지의 산들에서는 웅장한 자연의 연출을 보거나 장엄한 교향곡의 화음을 듣는 것 같은 환희에 취해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우리 나라의 산들처럼 친숙한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인심도 자연을 닮는 것일까?) 

김 교수는 문뜩 미국에서 사귄 많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무척 친하게 지내던 UC 버클리 대의 챨리 존슨해리 스미스쟌 윌리암 스타인버그그리고 뉴욕 주립대에서 한 때 데이트에 열을 올리던 귀여운 유태계 여학생 미리암 워다이머 등의 얼굴이 칼라이도스코프처럼 스쳐갔다.  

  이들은 한결같이 활달하고 함께 있을 땐 재미있는 친구들이었다그러나 그들은 대자연 속의 순수한 인간관계혹은 우주적 의미의 형이상학적 인연을 중시하고 끈끈한 정으로 상대를 감싸는 한국 친구들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변증법적 접근의 인과관계에서 흐렌드십을 추구한다그리서 한인들은 자기보다는 상대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하며 대화하고 행동하지만 이들은 각자가 자기의 개성에 맞는 독자적 가치관과 행동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 지 이들에겐 우리 한국인을 얽어 매고 있는 눈치라는 게 없었다.  

저 앞에 펼쳐지고 있는 저 수많은 우리 나라 산야는 이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무척 조심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조금 전 벌어진 그 당혹스러운 순간을 연출한 끈질긴 인연만 해도 그렇지모든 미련을 훌쩍 털어버리고 귀국하면 금새 만날 수 있는 아내를 그러지도 못한 주제에 끝내 잊지 못하고 운명하던 박지순 노인아니 자기를 버린 지아비를 차버리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삼십 년 전에 죽은 아들을 평생 잊지 못해 아직도 발버둥치는 이성희 할머니를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뿐 인가어쩌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법한아니 일시적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우연으로 그들의 끊어진 소식을 이어주려던 노력을 잠시 기울인 정도에서 그쳐야 했던 그 마저 이 년 동안이나 전국 방방곡곡을 헤맨 끝에 이 곳까지 찾아오게 된 자신은 또 어찌된 일 인가

 

김순식 교수는 이 곳에 오기 전날에는 천왕봉을 찾았다지리산의 주봉이자 정상인 천왕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웅장한 지리산의 수많은 산자락은 마치 여인네들의 치마 주름처럼 아름답게 휘감아 안고무한한 세월의 흐름을 온 몸으로 떠받고 장승들처럼 풋풋하게 얽혀 하늘을 이고 서있는 원시림이 깊은 운무에 싸여있었다그리고 수많은 계곡의 개천들이들 개천을 흘러내리는 옥수(玉水)는 크고 작은 돌맹이에 치어 흰 포말을 뿜어대며 급류로 치닫고 있었다또한 아련히 옛 추억의 어느 한 갈피를 더듬게 만드는 길 옆으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시골집들이 저 멀리 산 중턱에 고즈넉하게 펼쳐져 보였다.

이윽고 밤새 기다리던 천왕봉의 일출이 김 교수의 눈 앞에 전개되었다저 광대무변한 지리산의 수많은 높은 산봉우리들이 동해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반도의 새벽을 깨우는 여명을 받아 서서히 그 신비한 자태를 ,밀려오는 파도처럼 일파만파 한 자락 한 자락 펼쳐 들어내 보였다아니 그것은 신비한 선계(仙界)를 은밀하게 감추려는 듯 깊은 구름바다가 시계(視界)를 흐리며 끝없는 파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부지불식 간에 감탄의 환성을 쏟아내게 하는 숨가뿐 장관이었다회색빛 구름바다 저멀리 동녘 지평선 위에 서기가 어리기 시작하여 붉은 광채가 길게 번져 나가고 극광(極光)이 퍼지면서 천지의 개벽이 장엄한 무대를 연출했다역광으로 반사되는 은빛 구름에 봉우리만 까만 선을 그리며 자태를 드러내고 무대의 육중한 커튼이 열리면서 지리산의 대 칼레이도스토프가 서서히그러나 숨가쁘게 펼쳐졌다.

천왕봉 정상의 전망대에 서서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며 계곡을 덮고 지리산 준령의 능선을 휘감아 돌다 저 들녘까지 이르러 온통 하얀 구름바다로 감싸아 놓았다가 펼쳐지는 운무(雲霧)와 그 사이를 비집고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는 김 교수는 잠시 대자연의 장엄한 비경에 압도되고 있었다.

 

    "아니 바람이 찬데방에 들어가 계시쟎고... " 

  생각에 골몰히 잠겨있던 김 교수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꾸부정한 어깨를 약간 숙여 두 손을 합장한 채 어느새 가까이 서 계셨다.

    “예주위가 하도 아름다워 이렇게 넋을 잃고 서성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승복의 긴 소매에 묻힌 조그만 손을 다시 내밀어 저쪽 방을 가르치며 스님은 손님을 안내한다.

    “누추하지만 어서 방으로 드시죠우리 보살님은...

    “예몸이 몹시 불편하신가 보던데요.

    “참 딱하기도 하지요바깥 양반께서 이십 몇 년 전 미국인가를 가셨다가 소식이 끊어져 버리고 쭉 혼자서 고생해 오신 모양인 데... 때로는 실성하신 것도 같고글쎄 속세의 삶이란 모질기도 한 것 같습니다.

    때늦은 시간에 이 깊은 산간의 암자를 찾은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스님과 막역한 사이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승방을 다시 말끔히 청소하고 저녁공양 준비를 마치고 나서 자꾸만 힘이 빠져가는 몸을 누이고 뒤척이고 있던 이승희 할머니는 밖에서 스님이 돌아오신 인기척을 듣고 한 손을 방바닥에 집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어서 들 방으로 드시지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우리 보살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어떡허지요?

    “예제 몸이야 항상 그런 걸요시장들 하실 텐 데 저녁부터 드시도록 곧 상을 차려 올리 지에.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 자 스님은 문을 열고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혜성 스님은 방석을 밀어 손님에게 권하고 아랫목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래 교수님께서는 미국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김 교수는 바바리 코트를 벗어 벽에 걸고 방석을 당겨 스님 곁에 앉았다.

    “예한 두 해 공부하고 이내 돌아올 예정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귀국이 늦어졌습니다그럭 저럭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미국에서 소일한 셈입니다.

    “이제는 미국에 한인들이 많이들 살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말이나 풍속이 생소한 그 미국 땅에 어디 한인들이 정붙이고 살만한 가요한동안 미국이 살기 좋다고 너나없이 이민들 가겠다고는 야단법석이더니 요즈음은 되뢰 봇다리 싸갖고 돌아들 온다는 소식이 자주 들리던 구만요.

    스님의 나이는 몇이나 되었을까 얼른 짐작이 가질 않았다마치 면도로 밀기라도 한듯 탁발한 조그맣고 희멀건 얼굴에는 주름도 별로 없고 홍조마져 띈 표정이 50을 넘기지는 않아 보이기도 했으나 잔잔한 말씨와 약간 꾸부정한 어깨에서 풍기는 위엄으로 보아서는 환갑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김 교수는 한 때 박지순 선생과 같은 하숙집에서 기거한 일이 있었다박 선생은 그를 마치 친 아들 처럼 사랑해 주셨다한동안은 박 선생이 경영하는 택시회사에서 팟타임으로 택시운전을 하기도 했다이런 인연으로 그의 피맺힌 유언을 잊지 못하고 오늘 이 산사를 찾아오긴 했으나 김 교수는 막상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못내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문이 조용히 열리는가 싶더니 할머니가 상을 단정히 받혀들고 들어와 스님 앞에 정중히 내려놓으며 김 교수쪽을 쳐다보고 “어서 이리 가까이 오시지요” 한다.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가 이내 공양 밥통을 들고 와서는 자개상 옆에 살포시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떠서 조심스럽게 상에 올려놓는다.     

 “시장하신데 어서 드십시다.

     스님은 예쁘장한 손을 내밀어 손님에게 식사를 권하면서 숫가락을 들었다상에는 귀한 산나물에다 김치깻잎콩나물 그리고 된장국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할머님께서도 어서 드셔야지요.

    “예제 걱정은 마시고 식기 전에 어서 드시구랴.

     스님과 서울손님이 마주앉아 저녁을 드는 것을 확인한 할머니가 밖으로 나가 자 스님은 궁금한 듯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김 교수님께서 긴히 말슴하시고 싶다는...” 스님이 채 얘기를 마치기도 전에 김 교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대고 밖앗 쪽을 경계하며 조용히 말했다.

     “스님사실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동안 저 보살님의 바깟 양반을 가까이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김 교수님이요!

     스님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저 이성희 할머니가 가끔 미국엔가 영국에 간 남편얘기를 하곤 했지만 스님은 그 얘기를 별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그저 실성한 할머니가 무시로 씨부리는 소리겠거니 하고 괘념조차 하지 않았었다.

     “아니그게 사실입니까그럼 지금 뭘 하고 계신데...?

     “예제가 귀국하기 몇 개월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아그러셨군요... 관세음보살.

     스님은 또다시 화들짝 놀라 얼굴이 상기되더니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가 얼마 후 안정을 되찾았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저 할머니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 들었으니 부처님께서 저의 부덕을 얼마나 꾸짖으셨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 밖에요...

     “좌우지간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산사(山寺이미 어두움 속으로 깊이 파묻혀 가고 있었다머리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비치는 등잔불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으로 흐느적거릴 때 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초저녁 잠에서 깨어난 이성희 할머니는 손을 더듬어 성냥을 찾아 등잔에 불을 붙였다지난 달부터 갑자기 힘이 빠져가는 허리를 오른 손으로 부추기며 간신히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선다.

   암자 처마 끝에 걸린 초생달이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깊은 적막 속에서 쌍계사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의 파리한 윤곽이 하나씩 둘씩 흐미하게 눈앞에 나타났다깊이 잠들어 새근새근 숨쉬고 있는 신비한 대 자연의 모습이 삶의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오늘 따라 더욱 영롱하게 비치고있었다누가 곤산(崑山)의 옥()을 깨어 뿌린 것일가아니면 전설처럼 견우와 이별한 직녀가 정성을 다해 곱게 짜던 수()를 저 드넓은 하늘에 던져버린 것은 아닐가.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차가운 밤의 공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새벽 이슬을 머금은 차가운 공기는 가슴을 가득 메우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몽롱하던 머리가 금새 개운했다마루를 내려서 신발을 더듬어 신고 암자 모퉁이를 돌아 아람들이 소나무와 수풀을 비켜선 산길을 조심스럽게 한 발자욱 한 발자욱 걸어 계곡을 내려갔다이따끔 풀숲에서 잠들어 있던 다람쥐와 산토끼가 놀라서 푸드득 푸드득 달음질을 친다.

    (미물도 저렇게 한사코 살기를 원하건대이 영감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삶의 몸부림을 치고 있단 말가...)

   산속의 계곡에는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만이 손을 내밀어 물에 담갔다몹시 차가웠다상쾌한 기분이 온 몸을 전류처럼 퍼져나갔다그녀는 치마폭에 감싸 온 사발에 정한수를 떠서 옆에 있는 바위에 올려놓고 무릅을 꿇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비나이다 비나이다영호 애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지대자대비하신 부처님 보살펴 주사이다이 목숨 끊어지기 전 한번만 만나게 해 주사이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간단한 불공을 드리고 개울가에 앉아 저려오는 다리를 양손으로 주물렀다어제 저녁 찾아온 손님때문인지 평시와는 달리 삶에 대한 질긴 애착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심지어 하루에 두 번씩 찾아오는 이 개울의 물소리마져 오늘 새벽처럼 정답고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남편에 대한 감정도 유난히 뜨겁고 지난 날의 실날같은 추억이 정답게 느껴졌다건강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이토록 간절한 적도 없었다.

   어려서 배운 황진이의 노래가 떠올랐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무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개천 건너 산 중턱에서 뭔가 퍼드득하는 소리가 나더니 까마귀 소리가 깍깍 들려왔다.

    (밤중에 까마구 우는 소리는 다 뭐람!)

   이성희 할머니는 퉤퉤하고 침을 뱉았다.   

암자에 돌아와 보니 스님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있고 창호지 문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할머니는 조용히 부엌문을 열고 불을 켰다독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지리산에서 캐온 녹차를 끓여 찾잔에 담아 정하게 들고 스님의 방문을 가만이 두드렸다.

    “안 주무시는 기요?

    스님과 김교수는 화들짝 놀라 문쪽으로 눈을 돌렸다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찾잔을 들고 조심스레 문앞에 서있다가 허리를 굽히면서 다가와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앉는다.

     “할머니여태 안주무시고...

     “네초저녁에 한 숨 자고 개천에 가서 불공드리고 안 왔는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평온했다.

     “야심한 밤중인 데 차들 한 잔 드시고 어서 주무셔야 지에.

     “예스님께 재미있는 말씀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꼭두 새벽에 지성을 드리지요.

스님이 어색하지 않게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저는...” 하고 그녀는 자리를 떳다.

    이성희 할머니는 방에 돌아와 따뜻한 이불 밑으로 파고 들었다가시버시의 끈질긴 연()은 그녀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하늘에 흐미하던 서릿발 같은 차가운 달빛이 암자의 외로운 이 여인의 방을 파르스름하게 비쳐주고 있었다벼개가 쓸쓸하니 잠자리가 편할 수 없고 그져 몸을 뒤척이며 지새운 밤이 영겁으로 이어져 왔지만 삶의 오묘함을 한껏 실감한 오늘 밤은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한 층 깊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소군의 옥과 같은 뼈는 오랑캐 땅의 흙이 되었고,꽃과 같이 아름다운 양귀비도 안록산 난리에 말 발굽의 티끌이 되었구나화려한 매화꽃은 한 봄을 못 넘기지만 저 푸른 소나무는 천 년 만 년 변치않는 절개가 아닌가!) 


-- 
Harry Lee
Editor-in-Chief,
Syndicated Columnist
US News
One West Conway St.
Suite 1001
Baltimore< MD 21201-6400
USA
800-880-3901 (Toll-free)
===================

Biographer
English Translation of Korean Literature
전기작가
문학작품 번역

PS: Of all the forces that make for a better world, none is so powerful as hope. With hope, one can think, one can work, one can dream. If you have hope, you have everything.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