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5. 03:22
반응형
[2015.11.4 /홍하상]

미국 유학시절에 차를 6번이나 바꿨던 이유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 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자동차에 빠졌다. 이건희가 자동차와 처음 친해진 것은 7살 때, 당시 아버지 이병철이 1948년형 미국산 시보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징발해 박헌영이 탔다는 바로 그 차였다.

201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와세다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뉴시스


자동차 대국, 미국에서 그는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재벌집안의 막내 아들로서의 호사취미가 아니라 차의 구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산차는 이집트 대사가 타던 차였다. 50마일도 타지 않은 새 차였다. 아랍전쟁이 터져 이집트 대사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급하게 내놓은 차를 그가 사게 된 것이다. 새 차값이 6600달러였는데 그는 4200달러에 그 차를 샀다. 서너달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곤 깨끗이 분해소재한 후 600달러를 남기고 팔았다. 이어 미국인이 1년도 안탄 증고차를 사서 타고 다니면서 구조를 들여다보고 다시 왁스를 먹이고 청소한 후 또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의 이런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은 그 후 삼성이 중요기술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상당한 작용을 했다. 말하자면 반도체를 스택(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린 것도 그 자신이었고, 핸드폰의 크기, 단추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 소위 <이건희 폰>을 만든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는 또 방송사에서 송출된 화면이 TV수상기에 비춰질 때 화면 좌우에서 각각 8mm씩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개선을 지시, <숨겨인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문안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 원 TV를 탄생시켰다. 그는 경영자 시절, 세계적인 가전 회사들의 신제품이 나오면 곧바로 사서 뜯어보고, 다시 재조립한다.

이건희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기계광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의 책이 더 많다. 훗날 67년부터 87년까지 선대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을 때도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퇴근 후에는 기계와 씨름했다. 전자제품이나 각종 기계를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면서 그 기능과 성능을 공부했다. 기술관련 서적도 숱하게 보았고, 그래도 잘 모를 경우엔 아예 일본기술자를 집으로 불러 직접 설명을 들었다. 그의 집을 다녀간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명이었다. 그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전자부품의 소소한 기능까지도 두루 꿰고 있다.

이건희의 미국 유학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힘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미국이 강한 것은 ‘달걀을 품어 알을 까려는’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이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디슨처럼 지금까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창조해낸다.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상상력을 허용하는 사회이다. 반면에 일본은 원천기술을 응용한 생산기술의 대국이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반도체, 휴대폰과 LED TV를 만들어 새로운 판을 짜고 자기 씨름판을 스스로 만든 원동력이 된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서 경영수업을 받다

자, 이제 이건희의 공부의 계절은 끝난다. 현업이 기다리고 있다. 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중앙일보,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대학원에서 그의 부전공이 매스컴학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중앙일보의 이사. 본격적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동양매스컴 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부친이 주재하는 모든 경영회의에 말석에 껴서 참석하고, 아버지의 골프 라운딩에도 따라 다니면서 부친과 라운딩하는 인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한다. 이 실전 수업은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나 특이한 것은 74년 그는 동양방송 이사의 자격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반도체 산업은 1개 라인을 건설하는데 1조5000억원(2000년 기준)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만큼 그에 대한 리스크가 워낙 크고, 공정과정이 500여과정이 될 정도로 복잡한데도 단 한군데도 불량이 없어야 하며, 1평방 미터 안에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한 개의 먼지도 존재하지 않는 초청정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말하자면 반도체 사업은 삼성이 그때까지 해왔던 기존의 사업과는 그 개념부터 다른 사업이라고 이병철은 판단했던 것이다.

자신의 건의가 무산되자 그후 이건희 이사는 사재 4억원을 털어 부천의 한국반도체라는 작은 회사를 스스로 인수한다. 그후 불과 10년이 채 안된 83년에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서게 되고,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한국을 먹여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업종으로 발전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조선일보 DB


삼성의 부회장이 되다

이건희가 삼성의 후계자로 공식거명된 것은 77년8월 이병철 회장이 <닛케이(日經) 비지니스>와 가진 인터뷰가 최초이다. 이병철 회장은 그 인터뷰에서 <3남 승계>를 최초로 밝히고 공론(公論)화했다. 이로써 삼성의 후계자가 3남 이건희 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본격적인 차기 계승자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78년, 그가 삼성의 부회장이 되어 첫 출근하던 날, 이병철 회장은 그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붓을 들어 직접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해주었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의 금과옥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경청>이라는 부친의 가르침때문인지 이건희는 사장단 회의 때나 보고를 받을 때 대부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주로 듣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지금도 그의 좌우명 중의 하나가 <좋은 경청자가 되자>이다. 하지만 한 번 말을 시작하면 3-4시간은 기본이고, 10시간을 얘기할 때도 있다. 단 그가 말을 꺼냈을 때는 철저한 사전 검증을 거친 경우이다. 비서들이나 구조조정본부 등에 조사를 시키고 그 보고서를 검토한 후 다시 그 자신이 직접 각계의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들은 후 지시를 내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최소한 여섯 번 이상 ‘왜?’냐고 묻는다. 그의 여섯 번의 <why>는 ‘왜 그 사업을, 왜 그 곳에서, 왜 그 시기에, 왜 그사람으로 하여금, 왜 그만한 돈을 들이고,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 하는 것 등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조사시키고 분석한 후 자신이 답을 스스로 찾고나서 열번 정도 더 생각한 후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 그만큼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는 말이다. 그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걷는다는 그의 선친보다도 한술 더 뜬다. 이런 그의 사전검증은 이병철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78년부터 이병철 회장이 서거한 87년까지 햇수로 약 10년간 그러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홍하상

작가
E-mail : hasangstory@naver.com
기업인에 관한 책을 많이 써온 작가로 유명하다.

2003년에 국내 최초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을 다룬 책 <이건희, 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바라보고 있다>를 시작으로 <이병철 경영대전>, <정주영 경영정신>,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 등 국내의 기업가를 다룬 1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 외에 <일본의 상도>, <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등 일본과 중국의 기업인들에 관한 저서가 상당수 있다. 최근에는 <유럽명품기업의 정신>을 출간, 기업과 기업가 정신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1년의 절반 정도를 일본·중국·유럽 등 현장을 누비면서 직접 취재하는, 발로 뛰는 작가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이후 논픽션 작가로 30여년간 활동하고 있다.


[출처: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03/2015110302398.html?pmletter]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