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泰山歌(태산가) - 서자의 인생을 모면시킨 어머니의 은덕을 길이는 시조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2. 1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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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歌(태산가)  - 서자의 인생을 살신성인으로 모면시킨 어머니의 은덕을 길이는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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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언(楊士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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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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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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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Mountain is high but under the sky.
If you climb up and climb up then you can without fail.
People say the mountain is high
Instead of trying to climb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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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노력하라는 시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신성인한 어머니를 기리는 시조

예비고사도 떨어져 대학 본고사도 치르지 못한 내 건달 친구도 손가락으로 꾹 찌르기만 해도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시조입니다. 학교에서 도전하라거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의미로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오늘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며 한국뉴스를 보는데 한국의 대통령이 뉴스에서 어눌하게 읊조리는걸 보았습니다. 이 태산가는 비록 문구와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도전하고 노력하라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은 이 시조를 지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서자로 살 자신의 인생을 양반으로 살게 하여 준 어머니를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담아 이 시조를 노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 시조가 양사언의 시조인 줄 알지 못하는 만큼 흔하지 않습니다. . 
양사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연
금계필담(金溪筆談)에 있는 양사언의 출생담에 의하면 양사언의 부친 양희수(楊希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객사를 들렀습니다. 그 객사에는 12살 소녀가 혼자서 객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에게 부모를 데려오라 하니 그 소녀가 말하길 모심기가 바쁘니 자신이 점심을 준비하겠다며 순식간에 여러 사람의 점심상을 차렸답니다. 양희수(楊希洙)는 고마운 마음에 지니고 다니는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부채 두 자루를 주며 "이는 너를 예로 맞는 패물이다." 하니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홍보자기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부채를 받았답니다. . 얼마 후 양희수(楊希洙)가 상처를 하니 그 소녀의 부친이 찾아와 "제딸이 영감께 패물을 받았으니 다른 곳에는 시집가지 않겠답니다" 하니 양희수(楊希洙)는 기뻐하며 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몇 년 뒤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양사언입니다. 양희수(楊希洙)에게는 정실부인과 사이에 양사준(楊士俊)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소실인 그 소녀와 사이에는 양사언과 양사기(楊士奇)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 세 아들은 촉명하여 중국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삼소(三蘇) 형제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비유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자의 인생을 살신성인으로 모면시킨 어머니
아쉽게도 양사언과 양사기는 서자였습니다. 양사언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서자의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남편의 장례식 날 자결을 했습니다. 서모로 죽으면 장자는 석 달 상복을 입게 되어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렵기에 남편의 성복날 죽어 삼 년 상복을 입어 사람들이 서자임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덕에 양사언과 양사기는 그의 형 양사준과 함께 양반의 권리를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양사언이 남긴 초서는 현재 보물로 등재될 정도로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자암(自庵) 김구(金絿)·석봉(石峯) 한호(韓濩)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4대 명필로 손꼽힙니다. . 
양사언의 최후
양사언은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 대동승(大同升)을 거쳐 삼등(三登) 현감·평양 군수·강릉 부사·함흥 부윤 등을 역임한 후 회양(淮陽) 군수, 이어서 철원 군수를 지냈습니다. 안변 군수 시절에는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는데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가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기에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니 그 책임 때문에 해서(海西)에 귀양 갔다가 2년 후 풀려 돌아오는 길에 아쉽게 병사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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