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5_전라도_운암강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내맛골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6.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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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내맛골은 제 어머님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배보할아버지’로 불리던 외증조부님(보굉 이봉욱 선생)은 만석 지기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 군자금을 보태며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친분을 나누셨습니다. 큰 아드님인 제 외조부님(이현정 선생)은 고창고보를 다니시다 광주학생의거에 관련되어 제적을 당하셨습니다. 배보 할아버지의 여러 형제분 중에 한 분은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오신 분도 있습니다. 내맛골은 50여년전 아주 어렸을적 어느분 환갑잔치때 그리고 30여년전 대학시절 낚시하러 가보았습니다. 온천지에 감이 열려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옥정호 밑으로 수몰된 전북 임실 운암 내맛골에서 축음기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어머님의 외조모, 어머니, 외삼촌, 나의 외조모




수몰 전.후의 운암 어제와 오늘

수몰민 사진촬영










운암면은 1928년 운암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 수몰됐다. 오랜 시간 터를 내리고 살던 마을이, 몸을 뉘고 살던 집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에 마을 사람들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 슬픈 마음을 안고 마을이 수몰되기 각자 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광석리 - 마을 앞산에 산광이 있어 광석리라 이름 붙여진 운암면 광석리의 옛 모습. 웅장한 산과 들 사이의 오밀조밀한 마을 모습이 인상적이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도마태 - 수몰되기 전 운암면 도마터. 이 평화롭던 마을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고 생각하니 사진에서 아픔과 아련함이 느껴진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기암마을 - 수몰되기 전 운암면 기암마을 풍경. 마을 뒤 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귀바위라 부르다 기암이라고 개칭했다. 마을의 논 옆으로 난 좁은 길을 거닐던 마을주민은 어디에 정착해 살고 있을까?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월면리 -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낙도 같은 마을로 마을 뒷산의 형태가 반달 같아서 월명이라 칭했으나 사방의 산이 높아 달을 볼 수 없다 하여 월면(달이 달이 잠자는 마을)이라 했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월면리로 개칭했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입석마을 돌재 - 입석마을은 운암면 중심부의 마을로 마을 앞에 선돌이 있어 입석리라 칭했다. 마을 중심부를 능선이 통과하며 마을이 동서로 재를 이루고 있는데 사진은 돌로 만들어진 재, 즉 돌재의 모습이다. 내맛리를 들어가려면 마을 앞 강물건너 돌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학암리 -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에 자리한 마을로, 섬진강의 지류가 마을 서쪽으로 흐른다. 광석리, 학산리, 월면리 일부를 병합하면서 학산과 광석의 뜻을 따 학암리라 하였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하운암 신기마을 - 수몰로 옮긴 마을이라 하여 1968년 이후 신기리라 부른다. 운암, 서지, 교촌, 냉천, 저동, 방기, 샘터가 통합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하운암 바라산 - 하운암 바라산 모습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과 호수, 그리고 그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운암면사무소 - 운암면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한 운암면사무소 옛 모습이다. 저 곳에서 보다 잘 사는 운암면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진행됐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금기국민학교 - 1946년 운암국민학교 금기분교장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후 이듬해 개교해, 1953년 금기국민학교로 승격된 금기국민학교의 옛 모습. 그 운동장에서 교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선거리 - 독립운동가 김영원 선생과 한영태 선생의 기념비가 있는 마을, 선거리 전경이다. 신선이 산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졌으며 선무봉(신선이 모여 춤을 춘다는 산)이 있고 선근리라고도 불린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용운리 - 내맛골 - 과거 마을의 형태가 내자형에 뒷산이 말의 형국을 해 내마촌, 마을 앞에 부처 같은 바위가 있었다 해서 불암동, 용곡이 있다 하여 용동이라는 3개 마을이 있었다. 그러다 용곡의 용자와 운암의 운자를 따서 용운이라 이름 지었다. 용운리/내맛골은 마을의 위편에 있어 아직도 이씨네 종친과 옛 마을 친척들이 몇집 남아 있다. 자손들이 모두 전주와 서울등으로 나가고 미국까지 흩어져 있어 마을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청운리 - 백련산 밑에 있어 여러 기화요초가 만발한다 하여 만화동으로 불렀다. 1968년 10월 10일 이후 하운암으로 편입되면서 거둔, 박실, 만화동의 3개 마을을 합쳐 청운이라 불렀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상운리 - 1965년 수몰로 옛 상운암면의 마을 주민이 모인 곳이라는 뜻에서 상운리라 불렀으며, 운암면 생활의 중심지다. 잘 사는 마을이라는 푯말 앞의 어르신들 포즈가 예사롭지 않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잿마을 -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의 마을이다. 강바닥쯤에 마을이 있다가 수몰되면서 산중턱으로 올라왔으며, 마을 사람들은 잿마을이 아닌 잿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구댐의 만수 - 섬진강 구댐의 만수 모습이다. 섬진강 다목적댐은 구댐과 신댐으로 나뉘는데 구댐은 을사늑약 후 조선총독부 시절인 1925년 완공한 댐으로 농업용 댐이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입석리 리민위안단 1964 - 리민위안단이라는 다소 생소한 단체는 다름 아닌 마을 공연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입석리 리민위안단은 입석마을의 마을 공연단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농악 등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흥과 힘을 북돋아줬을 것만 같다.


옛 운암면사무소 직원들 1965 - 운암면사무소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한껏 멋을 낸 모습으로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직원들은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청운분교 1969 - 그 옛날 청운마을의 청운분교에서 행사가 있었나보다. 기념촬영을 하는 어르신들 뒤로 천막 아래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향한 곳에서 재미난 구경거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 - 임실문화원장 최성미 제공


옛 상운리 축구팀 1972 - 1970년대 상운리 축구팀 모습이다.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주축이 된 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축구팀 뒤로 보이는 반공 표어가 당시 시대상을 말해주고 있다.


장 보는 어머니 - 버스와 차가 오가는 도로를 걷고 있는 그 옛날 우리네 어머니. 장본 것들을 이고, 들고 걷는 모습이 다소 힘겨워 보이는데 입가에 미소를 띤 모습이 인상적이다.


옛 똥장군 - 그 옛날 똥장군을 기억하는가. 봄에 변소에서 삭힌 똥을 바가지로 퍼 똥장군에 담고, 똥지게로 옮기곤 했다. 똥지게를 진 청년의 모습이 자못 심각하다.


어린 시절 추억이 한 장 -동네 어귀에 가족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그렇게 다함께 모여 찍은 사진은 먼 훗날 가장 큰 추억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



학교 수업 - 그 옛날 학교 수업 풍경이다. 아마도 선생님이 질문을 하셨나보다. 팔을 힘껏 들고 답하겠다는 모습에서 뜨거운 학구열이 느껴진다.


옛 하운암 출장소 - 옛날 하운암 출장소 직원들의 기념촬영 사진. 기와지붕이 멋스러운 집 앞에 그보다 더 멋스러운 포즈를 잡고 촬영에 임하는 모습이다.


이동수단 - 과거 운암면 주민들의 이동수단은 다름 아닌 배. 넓은 옥정호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폐선 - 제 역할을 다하고 멈춰선 폐선. 물 위도 아닌, 가뭄으로 마른 바닥 위에 멈춰 있는 모습이 왠지 서글프다.


앞으로 수몰될 운암면 소재지 - 수몰을 앞둔 운암면 소재지 풍경이다. 종합농기구센터의 굳게 닫힌 문과 돌아가지 않는 미용실 안내판이 마치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수몰될 운암면 소재지 - 곳곳에 수몰 반대를 외치는 현수막을 내건 운암면 소재지의 모습. 청정이용원도, 운암약방도, 운암터미널수퍼도 곧 추억 속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앞으로 수몰될 운암면 소재지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모습의 운암면 소재지. 그러나 이곳도 곧 수몰되고,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운암면 이주단지 조성마을 - 수몰민들을 위한 운암면 이주단지 조성마을 풍경이다. 수몰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은 이제 전원주택처럼 정리된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운암면 이야기


암면(雲岩)은 임실군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 면적의 70%가 임야에 속하고 진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한 섬진강 최상류는 이웃 신덕면에서 발원한 지류와 합해 면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대운암 저수지에 유입되고 있다. 운암면 도처에는 삼한시대의 유물인 지석묘와 석관묘 등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뤄 삼한시대 이전부터 고대 부족사회가 형성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500여 년 전에 무명의 선비가 이 고장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아 기거함으로써 선비의 호를 따 운암면이라 명명하였다.

이조때에는 상운암면과 하운암면으로 불리해 오다 192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하운암면을 통합해 운암면으로 칭하였다. 당시는 임실읍과 둔남면에 비슷한 경지와 인구를 갖은 면세였으나 1925년 1차 섬진강댐 준공으로 경지 25%가 수몰됨에 따라 인구도 대폭 감소됐다. 1965년 현재의 댐이 준공돼 경지 70%가 수몰되고 인구도 급감해 현재는 2천103명에 머무르고 있다.

▲학암마을 - 이 마을은 운암면 상류인 신평면과 인접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에 이천현감을 지냈던 배면이 라고 하는 사람이 낙향하여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앞산 바위에 금이 섞여 있어 빛이 났다고 하여 광석이라는 촌락이 있다. 학암리라고 하는 명칭은 산수가 수려하여 당초 마을 명칭을 여산이라고 하였다하나 1920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광석과 여산을 통합하여 학암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산악에 둘러싸여 72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신평까지 6㎞의 농도를 개설하여 지금은 가종 차량이 매일 10여차례씩 내왕하고 있다.

▲ 상운(上雲) 마을 - 이 마을은 운암면 최상 북단에 신덕면과 인접해 왔으며 1965년 이전에는 9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섬진강 다목적 댐 공사 완공으로 상운암 각 마을이 수몰되자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가급 기관과 각 마을에서 수몰 피해민들이 모여 130여 가구가 형성되었다. 본래는 쌍암리 윗쪽에 마을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하며 윗새터라고 하였으나 1965년 옛 상운암면의 각 마을 주민들이 집결한 운암면 소재지라는 뜻으로 상운마을이라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웃 신덕면반수와 상운암의 생활 중심지이며,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선거마을(仙居) - 선거마을은 사방이 산악에 둘러 쌓여 마을 전체가 병풍을 두른 것처럼 첩첩이 산중 마을로 구(具)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엉바위 아래서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해 인근에서 제일 먼저 부락을 조성했다 해서 선근리(先根)라 불렀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때 이언방(李彦芳), 송학거사가 선거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해 100여가구를 이루고 일제말기에 선거리로 개칭 현재에 불려지고 있다.

▲지천마을(芝川) - 이 마을은 당초에 간좌촌(艮座村)과 도마촌(倒馬村), 하적동(荷積洞) 등 3개 촌락이 400여년 전부터 상호 독립된 생활을 하였으나 1920년 행정구역 개편시 3촌을 통합해 1개 행정리로 편성하면서 3촌의 주봉을 이룬 건지산(乾芝山)과 3촌의 중간 횡류하는 강을 상징하는 뜻으로 지천리라 명명했다.

▲광석마을(光石) - 광석마을은 섬진강 상류에 조성돼 임실읍과 인접해 있으며 1670년 성산 배씨 배대민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아 살았으며 마을 앞산에 산광이 있어 광석마을이라 칭하였다.

▲월면마을(月面) - 월면마을은 섬진강 중류에 삼면이 강으로 둘러져 낙도와 같은 마을로 350년 전에 전주 이씨 이납기라는 사람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 마을 뒷산의 형태가 반달과 같아 월명(月明)이라 칭했으나 마을 앞·뒤가 모두 높은 산으로 싸여 있으며 마을이 북향을 하고 있어 달이 후원에 비치고 산이 높아서 달빛을 잘 받지 못해 월명리(月眠里)로 명명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시 월면리(月面里)로 개칭했다. 섬진강 다목적댐 완공 이전에는 마을앞 넓은 들에 농토가 풍부하여 부자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산등성이에 남아있는 전답에 고추나 담배등을 재배하여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마을공동 소유의 나룻배 1척이 있을 뿐이다.

▲ 사양(思良) 마을 - 400년전에 무명의 선조가 기름진 옥토가 많은 이 마을에 거처를 옮기고 자리를 잡은 것을 시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동네 뒷산의 형세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하여 새알골이라 하였으나 일제때 사양리로 개칭되었다. 섬진강 댐공사 완공 이전까지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부자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완전 수몰되어 산등성이에 매달린 전 답에 고추·참깨등을 재배하여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마을이다.

▲ 기암(奇岩) 마을 - 이 마을 앞에서는 삼한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부터 고대 부족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뒤에 귀와 같은 바위가 우쭉 서있다고 해서 귀 바위라고 청했었으나 왜정시 기암리라고 개칭하였다.

▲ 쌍암(雙岩) 마을 - 이 마을은 섬진강 상류에 신덕면과 인접해 있으며 마을 앞에는 삼한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 전부터 이곳에 고대부족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입구에 큰 바위 두개가 있어 쌍암리라 칭하였다. 1976년 운암중학교 부지정리로 바위가 땅에 묻혀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입석(立石) 마을 - 이 마을은 운암강댐의 중류이며 운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로써 당초에는 영촌과 구사촌, 어리동 두언동의 4개촌락이 상호독립해 있었다. 192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4개촌락을 통합 입석리라 명명 하였는데 연유는 마을앞에 높이 40여m의 우뚝 선돌이 있어서 입석리라 하였다. 기중영촌은 약400여년전 전주최씨 후손인 응숙선생이 사화를 피하기 위하여 락향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이 마을의 중심부를 뒷산능선이 통하고 있어 마을의 동서간에 재를 이루고 있다하여 잿말이라 했다. 이 마을에서 대대로 2진사가 배출된 명성있는 마을이며, 운암강 댐이 완공되기 직전까지 즉 1965년초까지 이곳에 운암면의 각 기관이 위치한 소재지였었다. 이 곳에는 유서깊은 정남사, 양락정이 있다. 지금은 수몰돼 기존 마을의 95%정도가 철거되고 잔여가옥과 만수선외로 이주한 수몰피해민들이 산록과 계곡에 삼삼오오로 촌락을 이루어 7개 자연 마을에 52가구가 산전에 의지하며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이고장 양락정은 섬중 루각으로 사방에 아득한 수평선을 아룬 검푸른 호수와 기암절벽이며 봄철의 각가지 산수화 그리고 가을 단풍이 또한 절경을 자랑하는 국사봉이 있어 많은 관광객을 불러드리고 있다.

▲용운(龍雲) 마을 - 이 마을은 운암강댐 중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어 고대부족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부족장급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용곡이 있다. 당초에 내마촌과 불암동, 용동 등 3개 마을이 있었는데 1920년 이를 통합 용곡의 용자와 운암의 운자를 붙여 용운리라 명명하였다 한다. 내마촌은 마을지형이 내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뒷산이 말의 형국이라 하여 내마라 칭하였고 전주이씨, 양도공후손이 다족하고 있는바 학계의 많은 석학과 박사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불암동은 앞산에 부처와 같은 바위가 있어 불암동으로 칭하였는데, 지금은 댐으로 인하여 완전 수몰되고 변해버렸으며 운암의 명물인 빙어가 이곳에서 처음 발견 잡히기 시작되었다.

▲하운암(下雲岩) 마을 - 이조때 상운암, 하운암으로 분리되었다가 1920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하운암을 통합하여 운암면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1952년 9월 12일 지방자치법에 따라 마암, 운종, 운암, 금기, 운정리 등 5개리를 분할하기 위하여 운암리 474번지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하운암이라 부르고 있다. 총가구 381호에 1천 784명이 살고 있다. 

▲청운(菁雲) 마을 - 무명 김씨가 약500여년전 이 마을에 산골짜기가 많고 도랑이 큰거둔 부락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이조때엔 박실 또는 박곡으로 부르다가 만가지의 화초가 핀다하여 만화동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다시 푸른 숲으로 뒤덮힌 마을의 풍경이 마치 구름같다고 하여 청운리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총가구 56호에 262명이 살고 있는데 1968년 10월 9일까지는 상운암 법정리로 예속됐다가 1968년 10월 10일 하운암으로 편입, 거둔, 박실, 만화동의 3개 자연부락을 합해 청운리로 부른다.

▲마암(馬岩) 마을 - 금영김씨가 500여년전에 마근부락에 터를 잡고 한편으로는 광산김씨는 여우치에 터를 잡아살다가 둔기, 백암을 합쳐 마암리로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지형의 형태가 꼭 말체로 생겼으며, 흰 바위가 많다고 하여 마암리로 부르다가 1965년 6월 10일 옥정호댐 2차 확장공사 일부인 완주군 구이면 경계인 치백이를 강물이 완주군으로 못넘어 가게 하기 위하여 한전에서 석축으로 1천여평을 쌓아 막았는데 이곳을 마근댐이라고 부르고 있다. 총가구 73호, 364명이 살고 있다.

▲ 운종(雲鍾) 마을 - 500여년전 무명의 전주이씨가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지형의 형태를 응용, 흰구름 밑에 쇠북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운종이라 불렀다. 총가구 49호, 246명이 살고 있는데 1952년 9월 12일 지방자치법에 의해 하운암 법정리로 왔으며 1965년 6월 10일 옥정호댐 2차 확장공사로 대종, 소종이 완전 수몰돼 지금의 운종리에 대종·소종부락을 형성하고 잔여 호수는 대종·소종·중간이 선외에 분산, 정착촌을 이루웠다. 지금은 박흔, 대종, 소종, 면화골을 합해 운종리라 부른다. 

▲운암(雲岩) 마을 - 500여년전 이곳에 낙향한 선비의 선조 호가 운암이었다고 하여 이 마을의 이름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운암공의 후손이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이조시대에는 강진면의 갈담역촌과 운암역촌이 있어 순창과 전주 등을 연결했었다. 1952년 9월 12일 지방자치법에 의해 운암, 서지, 벌정, 냉천, 저동, 교촌, 방기등 7개 부락을 합쳐 운암리로 부른다. 1952년 9월 12일 지방자치법에 의해 운암, 서지, 벌정, 냉천, 저동, 교촌, 방기등 7개 부락을 합쳐 운암리로 부른다. 1965년 6월 10일 옥정호 2차 댐확장공사로 운암, 서지, 벌정 3개부락은 수몰로 선외부락을 형성, 존재하며 저동·샛터부락을 방기와 함께 신기리 행정리로 분리되고 냉천, 교촌은 지금 운암리로 관장하고 있다. 가는정은 그 당시 수몰 이주민으로 새로운 마음을 형성, 정읍군 경계지에 있다. 총가구 65호, 3백 14명이 살고 있다. 가는정은 그 당시 수몰 이주민으로 새로운 마음을 형성, 정읍군 경계지에 있다. 총가구 65호, 3백 14명이 살고 있다.


운암강과 청초호 이모저모 사진들

운암강의 작가 소원 김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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