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5_전라도_운암강

장편소설 운암강 [03] - 김여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8. 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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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lib.kll.co.kr/gen/main_0602.html?kkk=5&sss=1&sl=1&id=yehwa21&no=2355&sno=3216&n=3 

장편소설 운암강의 작가 김여화님의 허락을 얻어 제 어머님의 고향 전북 임실 운암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운암강을 올립니다. 작가의 허락없이 퍼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노란장미 주]

 

 

장편소설 운암강 [03] - 김여화

 

 


 

제목  [3회] 형성
등록일  2001-09-17

형성


운암강은 노령산맥의 크고 작은 높고 낮은 연선이 이어 솟아 가까운 모악산을만들고 신비의 영산 진안 마이산 백운산과 덕태산 운장산등 그 높이를 척으로 풀으라하면 작게는 1,500척(450m) 3,866척(1160m)이르기 까지 고산 준령이 처처에 가로 놓이고 이는 셀 수 없이 많은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백련산 줄기는 날개를 이루어 입석리의 배경 국사봉과 오봉산에 연결 되었다.


 

진안의 마이산 탑사 그 위쪽으로 은수사 뒷편, 아래서 올려다보면 코끼리 형상을 가진 숫마이봉 그 아래 바위틈이요. 더 올라가면 숫마이봉 홈태기에 저 옛날 역 고드름이 언다던 그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그 근원이라.

 

임실땅의 최 북단, 포도송이와도 같은 임실의 지형 그 꼭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자산자락 상월리 절골 학골 청용과 백호날이라는 이 두 골짜기를 적시는 물과 만덕산의 날개 회치미(회봉) 곰드레산 골짝에서 솟는 물이 공덕리 공수봉을 에두르는 양수정이에서 만나는데 마이산쪽의 물은 포동앞에 큰 내를 이루다가 임실의 식수원 되어 흐르면서 관촌의 방수리 막동 앞에서 부터 회봉골짜기 물과 어울리고 방수리에 가둔 물은 완산벌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어 지하 통수관을 따라 전주로 보내지니 백운산 뒷쪽 골짜기 좌포 들판을 아우르던 맑은 물은 성미산 뱀미산 자락을 휘두르며 공덕리 앞 양수정이에서 사자산의 물과 합수된다.

 

이 물은 공덕리 앞 들을 적시고 이내 강을 이루어 배나들이 옛적에는 나룻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다는 배나들이 에서는 제법 넓은 수면을 이루고 사선대 앞 낭벽에 살포시 입술을 건네고 머무른다.

 

대리보에는 사람이 둑을 쌓고 가두었다가 창인리 앞 들에서 임실천 봉황산자락 이인리를 휘두르고 임실의 시내중심을 흘러 말궁구리재 대곡의 물과 갈마리에서 어우르다가 다시 화성리에서 고덕산 골짜기의 물을 만나니 창인리 앞 들에서 모다 어울어져 시암내 넓은 수면을 애두른다.

 

이 물이 흘러 신평 원천리 앞에서는 오른쪽은 멀리 촛대봉 고지봉 남쪽에 솟는물이 함께 살을 섞다가 북창리를 휘저어 서쪽으로 굽이돌다 가로 지르고 튼튼한 바위 살갗을 어르다가 학암리 더 올라가 봉황산 북쪽 골짜기 거멍굴을 훑으고 내려온 물과 광석리에서 만나 선거리 시루바위 앞에서는 백의산 골짝에서 내리쏟는 물까지 어울어져 비교적 강다운 강을 이루며 운암강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신덕 조월리 뒷산 옥녀봉 고지 날맹이 고래의 뿔을 상징하는 경각산 준마가 달리는 형상의 치마산 홈태기마다 솟는 맑은 옥녀동천은 상운암에서 작은불재 골짝 옛시절 싸리나무 기둥이 두 세 아름이나 되었다던 아홉개의 절이 있대서 구절사 탑거리라는 곳엔 시방도 자연석 맷돌 아랫짝이 다섯자 세치 길이로 넓이는 두 자 쯤 되는 맷돌이 있다고 전해지는 구절골 물이 방길리앞 외량에서 큰 내를 이루며 시방은 상운암 소재지 마을앞 들을 건너 냇가로 우회도로가 반듯하게 났으니 이 길은 쌍암리 염재앞에 강을 이루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 운암강 순환도로 입구 국사봉 동쪽 어리동 두언터 동네앞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어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면내를 적시고 대 운암강을 만드는데 칠보와 운암 발전소를 통하여 막대한 량을 쏟아 김제, 정읍, 부안의 만경평야를 두루 아우르니 실로 금만경이라는 말은 알고보면 이 운암강이 아니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운암강은 총 유역면적 1,000여km에 이르고 유로 연장은 450여km를 넘는 방대한 강물이 서해로 이어지는데 한편 섬진댐 64미터 열 다섯개의 수문을 빠져나가는 물은 강진 용수리에서 부터 천담을 거쳐 적성댐을 막는다는 순창 동계의 무량산 용골산 앞 외통수를 거쳐 귀미리 좁디 좁은 앞들을 지나 적성강을 이루어 더 나아가 남원 대강을 지나면서 다른 실개천을 어르며 곡성 동악산 골짜기 압록, 압록의 보성강과 살을 섞으며 섬진강을 만드는 것이다.

 

 

이 또한 구례지나 전쟁때 젊은 넋이 널부러져 피비린내 등천했다는 피아골 연곡사 위 쪽 지리산 노고단 깊고깊은 수천 수만 계곡 눈 녹아 쏟아내는 쌍계사의 벽소령 칠선계곡 물을 아우러 지금은 손이 떠난 텅빈 화개장터 바라보며 악양 하동으로 그 빛을 발한다.

 

하동 포구까지 유역면적은 5,000여km 유로 연장은 220km에 이르는 섬진강의 본줄이 되는 것이다.

 

운암강의 역사는 오백여년 전으로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 이름없는 백면서생 이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였는데 서생의 호가 운암이었다 전해오니 운암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구름과 바위의 전설을 간직한 것으로 저 유명한 혼불의 넋을 남긴 작가는 운암이란 단어를 풀이할적에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유효적절 비단처럼 아름답고 곱기가 명주같은 화사하기가 눈부신 배꽃 같은 표현이라 여러번 잘근잘근 곱씹어보고 눈여겨 다시 귀에 익도록 소리내어 입술을 움직여도 역시나 절묘한 표현법이라.

 

운암의 도처에서 삼한시대의 유물인 지석묘와 석관묘가 발굴되어 운암은 삼한시대, 이 고장은 마한에 속하였을 터인즉 이전부터 고대부족사회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분과 석기가 발굴되고 지석묘가 47기 석곽묘가 3기 돌도끼도 발굴되어 지금 운암 쌍암리에 지석묘가 22기가 있고 사양리에 여덟 용운리에 넷 학암리에 여섯 마암리에 일곱이 있어 모두 합하여 47기요.

 

 

석곽묘는 석암리에 2기 석광묘 (石壙墓)는 신덕리에서 1기가 발굴되었는데 돌도끼와 함께 신덕의 조월리에서 돌검(石劒)이 발굴된바 있으니 이들 유물은 전주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뿐 아니라 앞으로도 개발 발굴을 하여야 할 과제라 하였다.

 

마한시대의 풍습은 주민들은 주로 농경, 누에기르기, 베짜기등을 했다 하였고 초옥이나 토실에서 생활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는 우마를 함께 묻어주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그들은 영주(瓔珠)를 재보로 삼아 의복에 장식하고 목걸이나 귀걸이로도 사용하였지만 소박하여 금, 은, 비단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하였다. 이들은 하종(下種)이 끝나면 귀신을 제사하는데 한 곳에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로 지새웠으며 여남은이 모여 땅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하였다.

 

 

이와 같은 축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또 한차례 축제를 벌인다 했다.

 

대부분 지석과 입석은 우리나라 곳곳 처처에 널려있다고 하나 운암의 고인돌은 신석기시대로 부터 금석기시대에 이르기 까지 이른바 거석기념물 더러는 거석 문화유물의 일종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거석문화는 만주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이른바 탱석이라 하거나 부족사회의 추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그 구조도 남방식과 북방식의 두가지중 운암의 고인돌은 남방식에 속하였으니 그 형태는 무덤을 크고 길게 파서 돌로만든 관(石棺) 옹관 (甕棺)에 시신을 넣고 그 위에 괴장석(塊壯石)이나 소판석으로 개석(蓋石)을 괴어 놓은 것으로 특별하다 이르고 있다.

 

하여 운암의 지석묘는 그 규모가 크고 깃발이 꽂혀있어 지석묘 앞을 지나는 관리들도 말에서 내려 걸어 갔다 하니 이는 깃발을 하마비와 같은 성격으로 보았음이다.

 

 

지석묘라는 것이 오늘날에 우리가 부르는 고인돌이라 하여 처처에 이와 같은 고인돌이 있는 특히나 고창에는 대 단위 거대한 지석묘가 집 근처, 아니면 들가운데 또는 동네 어귀 등에 많이 있으니 그 지석묘가 많은 곳을 일컬어 지석묘군으로 부르며 인류의 문화 유산이라 이름하여 세계적으로 보호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귀바우골에서 서쪽으로 오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평지위에 자리한 열 한 기의 지석묘군은 본시 강 아래쪽에 있었으나 물이 찬 후로는 물밑에 가뭄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데 홍수의 영향으로 깍이어지고 닳고 닳아진 모습이 력력히 또는 고래로부터 이탈된 듯 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어린시절 이곳 강가에서 멱감고 이같이 넓적지근하여 산골짝 움막집 마당만한 더러는 귀신바우로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던, 너럭바우 위에서 젖은 옷가지를 말리고 새파래진 입술에 핏기 돌아올 때 까지 몸을 다숩게 덥히던 그 너럭돌이 바로 고인돌 지석묘라.


 

지석묘 그 너럭바우의 규모는 크게는 장축이 열 한자 반이 넘고 단축은 일곱자반 두께는 다섯자가 넘으니 여기에 널린 이것들은 더러 땅속에 묻혀 크기를 잴 수 없는 것도 많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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