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곡귀단(哭鬼團) -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며 결성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27.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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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와세다대 유학시절인 1915년 9월 7일 화성 동탄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전국에 똘똘한 자식들을 유학보내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라며 사발통문을 돌려 본인 지운 선생과 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학을 독려했던 나의 고조부 이명직(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선생이 친일세력에 의해 독살 당하여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하게 일어나,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1916년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항일 저항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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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격려차 동경에 온 한국인 도지사가 친일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 뛰어 올라가 그 도지사 멱살을 잡고 '같은 조선인으로 어찌 그런 매국매족적인 발언을 할수있냐'며 항의하는 모습을 본 의재 허백련 화백은 그 의기에 감화되어 관비유학생의 기회를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와 화가의 길을 걸으며 평생 교분을 이어왔고, 1916년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제대실과생으로 입학한, 역적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는 부친의 죄에 대한 속죄로 해방후 조국에 돌아가 조선의 농업발전에 생을 바칠 의식화도 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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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16년에 지운 김철수 선생은 조선.중국.대만 유학생을 규합하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도 결성한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길 1915년 이명직 선생의 억울한 죽음이 없었다면 자신은 학자가 되어 살아갔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때는 지운 선생에게는 그 이명직 선생이 자신이 만주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조부인지, 평생 친분을 이어온 화훼원예가 방원 이성찬 선생이 증손자 였는지, 나에게는 그 이명직 선생이 나의 고조부였는지, 지운 선생도, 이성구 미곡검사관도, 방원 이성찬 선생도, 또 나도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위 곡귀단 조직원 단체 사진의 앉아있는 아랫줄 중앙이 지운 김철수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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