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겨레신문‘89.11.24)
전북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수성마을 근처 야트막한 구릉에는 키 큰 소나무와 잘 자란 대숲이 우거진 가운데 시골집치고도 드물게 초라한 흙집이 한 채 자리 잡고 있다. 붉은 황토벽 군데군데에 구멍이 숭숭 나있는 이 집의 방문 위에는 ‘遲耘堂’이라고 새겨진 크지 않은 나무 간판이 거미줄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누추한 집이 일제시대 좌익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에 관여했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기도 해 ‘살아 있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였던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가 지난 86년 3월16일 93살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살던 곳이다.
한겨레신문(1989.11.24)
그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세력의 통합을 도모하던 중 47년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함께 당시 운동의 분파주의에 환멸을 느껴 모든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고 생가가 있는 백산면 원천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 60년대 중반 선산이 있는 이곳에 손수 흙집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으니 25년 넘게 ‘지운당’과 함께 살았던 셈이다.
일제하 민족운동을 평하거나 그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김철수만큼 비중과 역할에 비해 정당한 평가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일찍이 1920년(그의 나이 27살)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그 다음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 사회주의 운동 사상 처음으로 ‘당’의 명칭이 붙은 비밀결사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고, 이를 토대로 이동휘의 한인사회 당과 조직적으로 결합해 1921년부터 23년 초까지 국내 사회주의를 이끈 고려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26년에는 일제의 혹독한 검거선풍을 뚫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해 3차 책임비서를 맡기도 했던 그의 사상과 활동경력, 인간적 면모 등은 최소한 일반인들에게는 놀라우리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 김철수의 유학시절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
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
그가 죽은 지 3년, 지운당은 오랜 이웃사촌이던 산지기 부부의 고등학생 아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방안에는 김철수가 수십 년을 간직해 왔을 손때 묻은 책들, 예컨대 일본어로 된 <마르크스주의><전위><사상운동><변증법의 기초><사회철학> 등 수십 권의 책이 <대입수학의 정복><영어의 완성><오늘의 팝 히트송> 등의 책자와 기타, 반라의 여배우가 웃고 있는 달력 등과 어울려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 하얗게 먼지가 쌓인 ‘예감록’이라는 비방록을 들춰보니 먼 길을 마다하고 이 집을 찾았던 많지 않은 방문객들의 감상의 편린들이 눈길을 끈다.
“삼가 선생님의 꿈과 이상, 그러나 이 자리,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추모하며,”
“욕된 시대의 한 젊은이가 욕되지 않은 선생을 기리며,”
“선생님, 그토록 열망하시던 통일의 기운이 뻗쳐가고 있는 이때,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정이 한층 더합니다.“
꽃을 사랑한 자연주의자
지운 김철수는 1893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고향 선배인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다니다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죽기 일년 전쯤, 끝내 공개되지 못했던 한 인터뷰에서 “하루는 두 살 위인 인촌 김성수씨가 말을 타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우리 아버지께 ‘철수를 일본에 데리고 가 공부 시킬테니 맡겨달라’했지. 결국 아버지가 승낙해 곧바로 현해탄을 건너게 된 거야”라고 술회했다. 김철수는 그 뒤 상하이, 만주, 모스크바 등지를 누비며 비합법 지하활동을 계속했고, 1928년 12월에 제 6차 코민테른대회의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해체돼 29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해 말 조국으로 잠입해 전국을 돌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30년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38년 대전형무소에서 출옥, 40년 여름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공주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3년 10개월 남짓 옥살이를 한 셈이다.
지운 김철수가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에서 백산고등학교 정진석 이사장,
‘지운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출옥한 김철수가 가장 끈질기게 추구했던 것이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이었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박헌영과 이승만 사이를 오가면서 친일파와 반민족자를 제외한 광범위한 세력을 하나의 통일전선으로 묶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반 박헌영 계열의 사회노동당이 46년 11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사분오열로 해체된 뒤 그는 ‘그만 죽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고 낙향을 결심한다. 이제 김철수는 ‘잔디 위의 구름’이라는 뜻의 호인 ‘芝雲’을 ‘遲耘’(늦게 밭을 간다)으로 바꾸고 자연과 사람, 꽃과 나무와 더불어 나머지 40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지운이 살았던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 지운이 강릉 오죽헌에서 캐다 심었다는 오죽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지운이 생전에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으며 죽기 전 후세의 정확한 평가를 위해 남겨둔 자필유고와 육성 녹음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정진석(69) 백산고등학교 전 교장은 “사상과 이념문제에 있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원칙주의자였지만 울릉도에 개나리와 종달새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해엔가는 개나리 묘종과 종달새 한 쌍을 사들고 직접 울릉도엘 가 그것들을 심고 날리고 올 정도로 인본주의자이면서 자연주의자였다”고 회상한다.
지운당 뒤 구릉 너머에 있는 김철수의 묘비는 여느 유명인사 그것과는 다르게 뒷면이 훵하게 비어 있는 ‘백비석’이었다.
마오쩌뚱과 각별한 관계
이런 그가 지난 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붓으로 써 주었는데, 이 시 속에는 그의 이념적 순결성과 낭만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지운은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 마오쪄둥과 천두슈를 만났는데 특히 마오와는 동갑내기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 가운데 하나를 정진석씨가 소장하고 있다.)
나이도 같고 뜻도 같고 같은 시기에 일어나니
비바람 몰아치던 그 당년에 의기 있는 남아였네…
죽음에 이르러서도 천하를 근심하던 그대 부럽고
오늘 온전한 몸으로 남아있는 내가 부끄럽네…
(한글 번역 이균영 동덕여대 교수).
김철수는 오랫동안 학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공산주의운동사’의 산 증인으로서 도쿄 유학시절부터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통합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계했던 크고 작은 사건 및 인물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자필 유고를 남겼다. 해방 전·후로 나뉘어 <본 대로 들은 대로 생각난 대로> <해방 후 동작개요>라는 제목이 각각 붙여진 이 유고들은 대학노트 70여 쪽에 촘촘히 기록되어 있는데 유고 첫 부분의 내용으로 미루어 70년대 중반쯤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이 유고의 진본은 서울에 살고 있는 그의 맏손자 김소중씨가, 사본은 정신석씨가 각각 소장하고 있다.)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 지운이 거처하던 방.
이 유고에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아있던 ‘코민테른 자금사건’과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의 결성 및 사회노동당의 창당과 해체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유고의 머리 부분에는 “붓을 들면서 거짓이 없을 것을 맹세한다. 왜냐하면 세상엔 거짓말하는 기록이 너무 나와서 번지고 야단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길지 못하고 역사는 엄중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여 그가 해방 이후에 쓰인 공산주의운동 관련 기록과 진술들의 객관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 부분에는 또 “연전에는 대검찰청에서 방인후라는 이가 와서(정읍 검찰지청을 통해) 검찰에서 과거 해방운동의 기록을 모아둔다고 해 쾌히 응낙해 3일간 진술했다”는 내용도 있어 이미 70년대에 공안기관에서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운동사에 대해 일차적인 정리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어 관심을 끈다.
햇빛 못 보는 건 형편 어긋나
지난 82년 김철수와 인터뷰를 하고도 상황 때문에 발표를 못했던 이병석(정치학 박사·고대 강사)씨는 일제하 그의 행적, 특히 해방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노력 등에서 보이는 다분히 낭만적인 태도로 미루어 투철하고 과학적인 정통 공산주의자였다기보다 꼿꼿한 선비정신과 당시 지식인의 진보의식이 결합된 ‘포괄적 의미의 사회주의자’로 그를 규정하면서 “그와 같이 활동했던 김동삼이나 조소앙이 복권되는 마당에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는 이유 하나로 지운이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명백히 형평을 잃은 처사”라고 말했다.
어쨌든 한국전쟁 기간에도 김철수에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이후 광주의 화백 허백련 등 예술가와 자연을 가까이 하며 초야에 묻혀 생의 반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상과 운동의 발자국은 크고 뚜렷한 것이어서 그의 가족들은 이 흔적과 영향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산산 조각난 가족들
동생 광수씨와 복수씨는 남로당의 핵심으로 활동하다 결국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현재 부안군 계화면 돈지라는 구석진 촌마을에서 홀몸으로 약방을 경영하고 있는 김철수의 3남2녀 중 둘째딸 김용화(70)씨는 이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란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씨의 증언은 이렇다.
맏이인 언니 김금남(1910년생)씨는 일본 메이지대 정경과를 중퇴하고 광주학생사건과 여순 사건 등 각종 좌익사건을 주도했는데, 검거를 피해 다니다 얻은 지병으로 60년대 초에 사망했다. 김씨의 남편 역시 좌익운동가로 여순사건 관련으로 잡혀 총살됐다. 셋째인 오빠 김용일(16년생)씨는 남로당의 핵심활동가였는데 한국전쟁 직전에 월북한 뒤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막내 동생 김용덕(24년생)씨 역시 해방 직후 공산주의운동의 공로자 자녀 자격으로 소련에 유학을 갔으나 현재 생사를 모르고 있으며, 학업의 기회를 잃어 유일하게 사상에 ‘물들지 않은’ 큰오빠 김용선(14년생)씨는 정읍군 신태인읍에서 농사를 짓다 심장판막증으로 앓아 누워있다. 김용화씨는 감옥에서 아버지와 가까이 지낸 이복기씨와 21살에 결혼했고, 만 2년의 결혼생활 뒤에 이씨가 남로당 핵심당원으로 월북하는 바람에 자식도 없이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은 추운 겨울에도 불을 안 피우고 지냈다”며 생사를 모르는 남편을 ‘아주 큰 사람’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는 김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반합법 지하활동’ ‘정치노선’ ‘당의명령’ ‘조직의 사수’등 용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며 옛적을 회고해 갔다.
죽은 언니의 아이들을 30년 가까이 친자식처럼 키워 온 그는 운동권의 대학생으로 자란 손자에게 “집안이 죄다 ‘운동’ 때문에 쑥밭이 됐는데 너만은 그것 그만둬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버지와 남편, 언니, 오빠의 얼굴이 가슴을 채워 “하지만 우리 집은 부끄러운 것 하나 없는 집이다. 나중에 다 평가받을 날이 오는 법이다”라고 덧붙인다고 하면서 이 칠순의 할머니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89.11.24)에 실린 글입니다.
이하 사진들은 다른 곳에 있던 사진을 갈무리 해온 것이다.
돈지 삼성약방 김용화 할머니
백산고 정진석 교장과 지운 선생
김용화 할머니
김용화 할머니 지운 선생 손주 소중이 아저씨
좌측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지운 선생, 동남갈포 장인 김흥순 노인
반응형
'0. 韓山李氏 > 09_遲耘(金錣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련 육사 출신 이봉섭 선생의 아들 이현계 선생 (0) | 2016.05.11 |
---|---|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연보 (0) | 2016.03.12 |
공산당 최고 원로 김철수를 배신한 박헌영 (0) | 2016.03.11 |
곡귀단(哭鬼團) -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며 결성 (0) | 2016.01.27 |
근대사의 인물들 -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인사들 (0) | 2015.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