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4_李命稙大監

이명직(李命稙) 선생과 이명직(李明稙) 영감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2. 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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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박맹수라는 분이 집필한 이명직(李明稙)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참 많은 의문점이 들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한산(韓山). 승대(承大)의 아들이다. 1893년(고종 30) 4월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라 같은 해 6월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다시 효혜전향관(孝惠殿享官)을 겸하였다.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다시 장례원부경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재차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이 기록에는 두 사람의 이명직, 즉 "1894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에 입격한 후 1895년 2월19일 탁지아문(度支衙門) 주사(主事)관직에 들어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 1906년 9월 18일 종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1907년 4월 궁내부특진관1등에 임명된 이명직(李命稙)""1893년 4월 조선의 마지막 과거 별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1893년 6월 홍문관부교리, 1905년 효혜전향관, 1907년 궁내부특진관3등, 1907년 장례원부경에 임명되었던 이명직(李明稙)"이 섞여있는 기록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 중에서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고"와 "같은 해 4월에는 재차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다."는 성우 이명직 선생의 관직이므로 이 두 분의 이명직을 한사람으로 잘못 본 집필자의 집필오기이다.


1. 이명직(李明稙) 영감

이명직(李明稙) 영감 1893년(고종 30) 4월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선 한산이씨 이명직(李明稙) 영감으로 승대(承大)의 아들로 1867년에 태어나 1893년(고종 30) 4월 조선의 마지막 과거(갑오경장으로 폐지)인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라 같은 해 6월 홍문관부교리를 시작으로 1905년에 효혜전향관(孝惠殿享官)과 장례원부경, 1907년에 궁내부특진관3등 등을 역임한 분은 원래 족보에 의하면 이색선생의 큰 아드님의 후손인 문양공파이다. 그 족보를 살펴보면,

이관적(20대손)>>이학채(21대손)>>이구년(22대손)>>이승대(23대손)>>이명직(李明稙)(24대손)

그런데 이색선생의 셋째 아드님의 후손인 양경공파 승기(承紀)의 아드님으로 양자를 간다. 양자간 양경공파 집안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태영(20대손)>>이희조(21)>>이함재(22)>>이승기(23)>>이명직(李明稙)(24)>>이석규(李奭珪)(25)

그런데 이명직(李明稙) 영감은 생부쪽을 더 챙긴것으로 보인다. 추증첩지가 양부쪽 양경공파가 아니라 생부쪽 문양공파로 내려진다. 그런데 이명직(李明稙) 영감의 기록은 가선대부 내부협판, 돈녕부도정, 1905년 가선대부 장례원부경 그리고 1907년 궁내부특진관3등을 지낸것으로 나온다. 이명직(李明稙) 영감은 3분의 부인을 두었는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일가에서 이석규(李奭珪)를 양자를 받아 대를 이었고 1924년에 사먕했다. 아직도 양경공파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2. 이명직(李命稙) 선생

이명직(李命稙) 선생 1894년(고종 31) 식년진사시(式年進士試) 3등(三等)급제


이명직(李命稙) 선생은 인재공파 승태(承台)의 아들로 1865년1월11일에 태어나 1894년(고종 31) 과거제가 폐지되고 난 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갑오경장으로 폐지)인 식년진사시(式年進士試) 3등(三等)으로 입격했다. 그리고 1895년 2월19일 탁지아문(度支衙門) 주사(主事)관직에 들어 1904년 고종을 모시는 내장원경에 발탁된다.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바꾸어 사용했다. 그것은 당시 내직에 든 후 고종의 원래 이름이 목숨 명(命)자에 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된 신하의 자세를 보인 것이다. 이명직(李命稙) 선생은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 1906년 9월 18일 정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1907년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1등을 지냈다.

이명직(李命稙) 선생은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 자리잡은 인재공파 연산군수 이규첨의 족보상 후손으로 부친 이승태는 안성 성은리의 원기의 5남으로 이필재에게 양자를 와서 이명직을 생산했고 그 족보는 다음과 같다.


이규첨(20대손)>>이원재>>이원효 또는 이필재(李源孝 또는 弼在)>>이승태>>이명직(李命稙)>>이철규(李喆珪)>>이성구(李成求)>>이성찬(李盛粲)


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되어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 칩거하며 노작 홍사용,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 나라 망할 것을 예측하고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고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독려 전파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밉게 본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1915년 암살당한 독립지사였다.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 (全州 崔氏)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에 감화되어 1912년 일본유학을 감행하여 이명직 선생이 독살 당하던 1915년 독립투쟁의 길로 들어섰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남긴 이야기를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이명직(李命稙) 선생


이명직(李命稙) 선생이 고종의 함자 명복(命福)에서 명(命)자를 피해 명(明)를 사용하여 이명직(李明稙)으로 내직생활을 했고 또 진사시에 합격하여 말단 주사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 동명이인 이명직(李明稙) 영감과 관직경력이 합쳐지고 고종퇴위이후 이조실록의 기록문화가 사라지면서 박맹수는 동일인이 중요관직을 겸직하고 또 같은 관직을 다시 맡는 것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해하기 힘든 이명직(李明稙)의 약력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사료된다.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성우 이명직 선생의 사진 관복의 흉배를 통한 품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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