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4_李命稙大監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2. 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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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요약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이영훈 서울대 교수

왕실(황실)의 주방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明禮宮(명례궁)의 1792-1904년 수입부, 지출부, 회계부는 동 궁방의 재정이 18세기말 이래 점진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적자 기조에 빠졌으며, 1882년 當五錢(당오전)의 발행을 기화로 1894년까지 3-4배나 크게 팽창하였으며, 그 주요 지출은 궁중에서 전개된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ㆍ賜饌(사찬)이었으며, 甲午更張(갑오경장)과 乙未事變(을미사변)으로 큰 타격을 받은 뒤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다시 팽창했으며, 그 주요 수입원은 황제가 典圜局의 주조 화폐를 內下한 것이었으며, 그래도 1904년의 재정 규모는 1893-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규모였으며, 그 역시 궁중에서의 上食(상식)ㆍ茶禮(차례)와 황제를 위한 進饌(진찬)을 주요 용도로 지출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종래 황실재정의 중심으로 간주된 內藏院(내장원) 재정은 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재정에 비해 그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고는 대한제국기의 황실재정을 조선왕조의 왕실을 전통적으로 지지 내지 견제해 온 儒敎的(유교적) 公의 名分으로부터의 逸脫(일탈)로 평가하였다.

1.문제제기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1897년에 성립한 大韓帝國(대한제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지를 둘러싸고서는 지금까지 몇 차례 논쟁이 있었다.(*2) 한편의 연구자들은 대한제국의 皇帝(황제)가 추구한 정책과 정치행태를 植民地化(식민지화)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近代的(근대적) 改革(개혁)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한편의 연구자들은 대한제국의 여러 정책에서 근대적 개혁의 요건을 찾기 힘들다고 반론하였다. 이 논쟁이 얼마만큼이나 생산적이었는지는 회의적이다. 논쟁이 전제했던 사실인식의 토대가, 특히 대한제국의 정책을 근대적 개혁으로 평가한 연구자들이 제시했던 실증적 근거가 불충분하고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논쟁은 대한제국기에 팽창한 皇室財政(황실재정)의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주요 논점으로 하였다. 황실재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정부가 황실을 받들기 위해 정부예산의 일환으로 지원한 宮內府(궁내부)의 재정, 둘째는 황실이 별도의 재원을 공식적으로 확보하여 운영한 궁내부 산하 內藏院(내장원)의 재정, 셋째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宮房(궁방)의 재정이다. 지금까지 황실재정에 관한 연구는 주로 궁내부와 내장원의 재정을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내장원재정의 실태가 실증적으로 세밀하게 밝혀졌다(金允嬉 1995; 李潤相 1996a, 1996b; 金載昊 1997, 2000). 그렇지만 황실재정의 다른 한 축인 궁방재정의 실태가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황실재정의 전모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지금까지 궁방재정에 관한 연구가 방치된 데에는 그것이 전 황실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으리라는 전제가 있었다고 보이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검토의 과제라고 하겠다. 궁방재정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면, 오히려 궁내부와 내장원 재정보다 컸다면, 지금까지 그 두 재정에 관한 분석만으로 내려진 몇 가지 결론에 수정이 가해질 수도 있다. 또한 궁방재정에 관한 연구는 구래 조선왕조 王室財政(왕실재정)과의 관련이라는 시각에서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역사적 위상을 분명히 해 줄 수도 있다. 황실재정은 구래 왕실재정의 특질과 경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많이 지적되어 온대로 대한제국의 황제는 典圜局(전환국)을 자신의 직속기구로 장악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전환국이 발행한 다량의 화폐를 자신의 의지와 필요에 따라 유통시켰는데, 그것은 황실재정의 운영과 깊은 연관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환국 화폐의 유통 경로나 그것의 황실재정과의 연관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자료의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기존 연구의 그러한 문제점도 궁방재정에 관한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보완되리라 기대된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본 논문은 明禮宮(명례궁)이란 궁방의 여러 재정기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1793-1894년에 걸친 동 궁방의 주요 수입원과 지출용도의 추이를 소개한다. 연후에 대한제국기의 동향을 이전 시대와의 연속 또는 단절의 관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황실재정의 다른 한 축을 이룬 내장원 및 전환국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역사적 특질에 대해 여전히 불명확한 점을 많이 남기긴 하지만 어느 정도 뚜렷하게 윤곽을 잡고 싶은 것이 이 논문의 바램이다.

명례궁은 1906년 도합 15개였던(和田一郞 1921: 504-5) 궁방 중의 하나이다. 이에 명례궁이 전 궁방 가운데 큰 편에 속하기 했지만 그에 대한 분석만으로 궁방재정의 전모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본 논문의 이 같은 문제점은 추후 전 궁방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대규모 연구를 통해 검증되고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구래의 궁방재정 (1) 1793-1852년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明禮宮(명례궁)은 왕실의 中宮殿에 속한 內帑으로서 궁중의 內燒廚房(주방)과 外燒廚房(주방)에 각종 食材料(식재료)를 공급함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궁방이었다. 소재지는 漢城府(한성부) 城內의 中部 皇華坊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壬辰倭亂 당시 義州에서 돌아온 宣祖가 머물렀던 慶運宮이 있었다. 이후 光海君이 昌德宮을 신축하여 이거하자 경운궁은 仁穆大妃의 거소가 되었다. 명례궁은 1623년경 인목대비의 내탕으로서 경운궁의 일부 시설로 설치되었다고 보인다.(*3) 이후 19세기말까지 명례궁은 주로 중궁전의 내탕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후일 1897년 俄館으로 播遷했던 高宗(고종) 황제가 景福宮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거하여 宮域을 확충하자 명례궁은 그 북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명례궁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에 관해 세밀한 기록을 남겼는데, 현재 奎章閣(규장각)에 1792- 1906년의 것이 전하고 있다. 『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은 매년 월별로 수입의 物目과 數量를 기록하고 집계한 장부이다. 『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은 같은 형식으로 기재된 지출에 관한 장부이다.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이란 장부도 전하는데, 명례궁의 창고에 보관된 각종 물목의 時在를 半年마다 조사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동기간 명례궁 재정의 구조와 추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의 <표1>은 받자책[捧上冊]에서 1793-1794년, 1853-1854년, 1892-1893년의 연평균 수입규모와 수입원을 조사한 것이다. 2개년의 연평균을 구한 것은 풍흉에 따른 생산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이다. 수입은 錢(전), 米, 豆, 木, 布 등 약 20여 종의 물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모두 兩(양) 단위의 錢(전)으로 환산하여 통합하였다. 환산에 필요한 각 물목의 전 표시 가격은 모두 받자책과 차하책[上下冊]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4)

1793-1794년 명례궁의 수입원은 크게 供上, 內下(내하), 奴貢, 宮房田(궁방전), 其他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다. 공상은 戶曹, 宣惠廳(선혜청), 均役廳과 같은 정부의 재정기관이 왕실을 받든다는 취지에서 행한 다양한 명분의 정기적 상납을 말한다. 內下(내하)는 왕이나 왕비가 궁방의 모자라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下賜한 것을 말한다. 奴貢은 1793년 당시 전국 32개 군현에 분포한 127구의 奴로부터 수취한 身貢 수입을 말한다. 婢貢은 이미 1774년에 폐지되고 노공만 남았는데, 그것마저 1801년에 폐지되었다. 宮房田(궁방전)은 명례궁에 속한 有土(유토), 無土(무토), 柴場, 草坪 등 토지로부터의 수입을 말한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왕실의 주요 수입원은 전국에 분포한 수만 구의 노비들이었다(宋洙煥 2000: 404-5). 17세기 이후 奴婢制가 쇠퇴하자 왕실은 대체 수입원으로서 전국 각처에 궁방전을 마련하였다. 유토는 궁방의 소유지를 말하며 지대로서 賭地(도지)가 수취되었다. 유토 궁방전이 확대되자 관료들은 “王者는 私藏을 가질 수 없다”는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을 내세워 그를 견제하였다. 이에 17세기말 유토의 증설은 중단되었으며, 그 대신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結稅(결세)만을 궁방에 이속하는 무토라는 궁방전이 생겨났다(李榮薰 1988: 139-87). 1793-1794년 당시 명례궁은 전국적으로 41처의 유토, 17처의 무토, 4처의 시장, 2처의 초평을 보유하였다. 마지막으로 其他는 명례궁에 속한 願刹로부터의 진상, 명례궁에 속한 洑ㆍ漁箭ㆍ主人 등으로부터의 수입, 다른 기관이나 인물로부터의 부정기적인 移轉, 다른 기관에 대여했다가 환수한 미곡 등을 묶은 것이다.


<표1>明禮宮(명례궁)의 연평균 收入規模와 收入源의 推移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1 자료:『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3-91, 92, 55, 54, 6, 5)

1793-1794년 명례궁의 가장 큰 수입원은 궁방전으로서 46.4%의 비중이었다. 그 다음이 정부의 공상으로서 43.4%였다. 이렇게 왕실은 정부의 공상만으로 생활하지 못하고(않고) 私藏으로서 노비와 토지를 보유하였는데, 그로부터의 수입이 정부의 공상보다 컸다. 조선왕조의 왕실은 정부 위에 놓인 초월적 권위의 공적 존재만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노비와 토지 재산을 두고 民 또는 정부와 이해관계의 대립을 보인 사적 존재이기도 했다. 왕실재정의 공적 성격과 사적 성격은 조선왕조의 이념적 토대인 유교적 공의 명분에 규제되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궁방전 수입과 정부 공상이 비슷한 비중을 이루었던 18세기말 왕실재정의 실태로부터 조선왕조 왕실의 그 같은 역사적 특질을 읽을 수 있다.

수입규모는 이후 1853-1854년까지 19,697량에서 32,954량으로 67%나 증가하였다. 동기간 각종 물목의 가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실제의 市場(시장)價格은 약간 상승하였지만, 그 폭이 크지 않아 명례궁은 동기간 동일 가격으로 재정을 운영하였다. 다시 말해 67%나 수입규모의 실질적인 증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방전 수입의 비중은 9,145량에서 8,742량으로 감소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유토 궁방전에서의 농업생산이 증진되지 못하여 賭地(도지) 수입이 정체하거나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한반도의 중ㆍ남부에서 널리 관찰되는 水稻作 생산성의 정체 내지 쇠퇴 현상이(이영훈ㆍ박이택 2004: 261-2, 李榮薰 2007: 270-3) 명례궁의 궁방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궁방전을 대신하여 수입규모의 증가를 이끈 것은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였다. 호조와 선혜청은 1819년 정월부터 매월 150량씩, 도합 300량을 새롭게 공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몇 가지 새로운 공상이 행해져 공상의 비중은 43.4%에서 52.0%로 늘어났다. 왕실의 내하도 5.1%에서 9.1%로 늘었다. 3.7%에서 12.4%로 크게 늘어난 其他의 대부분도 실은 왕실의 내하였다고 보인다. 그 속에 典洞宅이 해마다 4,000량씩 명례궁에 이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동댁의 실체는 알 수 없는데, 왕실의 일부이거나 왕족이었다고 보인다. 이를 내하에 포함시키면 그 비중이 20%로 늘어난다.

동기간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가 늘어난 것은 지출의 증가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의 <표2>는 차하책에서 1793, 1853, 1893년의 연간 지출규모를 食料費(식료비), 資材費, 工業費, 賃料(임료), 其他의 용도로 분류하여 조사한 것이다. 年年의 지출은 수입과 달리 비탄력적이어서 2년간의 평균을 취하지 않았다. 식료비는 궁중에서 각종 음식을 만드는 內ㆍ外燒廚房(주방), 生果房, 生物房 등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지출이나 구입비를 말한다. 명례궁의 노비들이 시중에서 구입을 대행한 ‘貿易價’의 경우 그 구체적인 내역을 알 수 없지만, 모두 식료비에 포함시켰다. 자재비는 柴木ㆍ炭과 같은 燃料費, 궁중의 內人들을 위한 被服費, 주방에 쓰이는 각종 布木類와 紙類의 비용, 종이ㆍ붓과 같은 사무용품비, 燈油ㆍ柴油와 같은 照明費 등을 말한다. 공업비는 궁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染色ㆍ薰造ㆍ沈醬ㆍ園藝ㆍ馬飼育의 비용과 각종 器物ㆍ器皿의 구입 내지 수선비를 말한다. 임료는 명례궁에 속한 內人ㆍ次知ㆍ掌務ㆍ奴ㆍ婢ㆍ庫直ㆍ冶匠 등 제반 궁속에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보수, 지게군의 雇價를 비롯한 각종 운반비, 내ㆍ외소주방에 속한 熟手(숙수)의 工錢(공전), 궁속들의 여행비, 왕실의 왕족ㆍ나인ㆍ내관ㆍ守宮ㆍ원찰에 대한 증여 등을 포함한다.


<표2>명례궁의 支出規模와 用途의 추이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2 자료:『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1-4, 15, 8)

1793년의 지출은 17,559량으로서 1793-1794년의 평균 수입 19,697량보다 적었다. 18세기말 명례궁 재정은 黑字(흑자) 기조였다. 반면 1853년의 지출은 38,208량으로서 1853-1854년의 평균 수입 32,954량을 초과하였다. 당초의 흑자 기조가 언제부터인가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그렇게 된 것은 표에서 보듯이 1793년에 비해 식료비와 임료의 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료가 3배나 크게 증가하였다. 차하책에 의하면 명례궁의 궁속은 1797년 63명에서 1834년 77명으로 증가하였다. 궁속의 수가 늘어난 것은 궁중에서 전개된 왕실의 일상생활이 보다 번거로워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료비의 증가가 말하듯이 궁중에서의 宴會(연회)와 祭祀가 보다 빈번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궁중에서 영위된 각종 공업의 비용이 4배나 증가한 것도 왕실의 살림살이가 커졌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1] 명례궁 年末 時在의 추이: 1793-1853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1 자료: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4-33, 27, 34, 95, 36, 24, 88, 32, 84, 18, 40, 12)


[그림1]은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에서 1793-1853년간 5년마다 연말 시재가 어떠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1823년 缺). 연말 시재의 물목은 5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나 그 중 90% 이상을 차지하는 金, 銀(은), 錢(전), 米의 시재만을 錢(전)으로 환산, 통합한 것이다. 1793년 말 명례궁의 시재는 46,230량에 달할 정도로 풍족하였다. 쌀로 치면 7,705석에 달하는 규모이다. 18세기의 경제적 안정과 왕실재정의 儉素(검소)가 그 같은 대규모의 비축을 가능케 하였다.

이후 1809년까지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7,000량 전후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례궁 자신의 赤字(적자) 累積(누적)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정부기관으로의 移轉 때문인지는 추후 별도로 조사될 필요가 있다. 이후 純祖 연간(1801-1833)에 걸쳐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해마다 기복이 있긴 하나, 13,000량을 전후하는 수준에 안정되었다. 명례궁의 시재가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은 憲宗 연간(1834-1849)의 일이다. 그 결과 1848년 명례궁의 시재는 일시 558량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어쨌든 19세기에 들어 명례궁 재정은 왕실의 쓰임새가 커지면서 적자 기조에 빠졌으며, 그에 따라 18세기가 넘겨준 풍족한 在庫(재고)를 조금씩 消盡해 갔다.


2.구래의 궁방재정 (2) 1855-1894년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림2] 明禮宮(명례궁)으로의 內下(내하)의 추이: 1882-1894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2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1, 21, 20, 19, 18, 17, 16, 7, 43, 42, 6, 5, 4)


이 내하금이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그 해부터 錢(전) 형태의 내하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오전의 발행은 閔妃(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閔氏(민씨) 政權(정권)의 유력한 재정수단이자 민씨 일족의 致富(치부) 方策이었다. 당오전의 발행은 물가를 급하게 끌어올리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오전은 1885년부터 한동안 발행이 자제되다가 1889년부터 1894년 폐지되기까지 품목에 못 미치는 惡貨(악화)의 형태로 대량 발행되었다(吳斗煥 1991: 61-81). 그러한 당오전의 역사와 [그림2]의 추이는 연도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역시 내하의 수단이 다름 아닌 당오전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민비(명성황후)는 1892-1893년 명례궁 수입의 88.2%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간 명례궁의 지출은 <표2>에서 보듯이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례궁 재정은 거대한 적자 구조였다. 동시기 명례궁의 會計冊(회계책)은 이 적자가 ‘加用(가용)’, 곧 借入(차입)으로 매워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3]은 1855-1892년의 회계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米와 錢(전)의 연말 시재의 추이이다.

[그림3] 명례궁의 年末 時在의 추이: 1853-1892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3 자료 : 『明禮宮會計冊 (명례궁회계책)』 (奎章閣圖書 19004-12, 42, 13, 53, 14, 28, 15, 54, 19077-2)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863년 高宗(고종)의 시대가 열리면서 차입 구조로 들어섰다. 1873년에는 일시 차입 구조를 벗어났다가 1883년까지 조금씩 累積借入(누적차입)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보듯이 1884년 이후 가파르게 누적 차입이 증대하기 시작하여 1892년에는 66만 량의 거액에 달하였다. 동기간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일족의 집권은 확고하였다. 借入先(차입선)이 어딘지, 정부재정인지 市中(시중)의 商人(상인)인지는 회계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부재정이 매우 困乏(곤핍)했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명례궁은 1884년 이후 급속하게 지출규모를 팽창시키면서 당오전의 내하로 그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부족한 수입을 시중 상인들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6)

그 위기의 시대에 민비(명성황후)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나 過濫(과람)하게 명례궁의 재정을 확장하였던가. <표2>에 보듯이 1893년 명례궁은 354만 량 이상의 食料費(식료비)를 지출하였다. 총지출에서 식료비의 비중이 79.6%에 달하였다. 식료비가 그렇게 크게 늘어난 것은 무척 잦아진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 때문이었다. 차하책에 의하면 1893년 한 해에 모두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민비(명성황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神堂(신당)을 짓고 巫堂(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모두 성리학의 나라가 오랫동안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금지해 온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한 해에 도합 37회의 연회를 베풀었다. 왕의 誕日(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궁중의 後苑(후원)에서 임시로 내외의 賓客(빈객)을 맞아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베푼 연회들이었다. 1894년 2월의 받자책의 한 구절은 220만 량의 거액을 내하하면서 ‘誕日熟設條(탄일숙설조)’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풍족하게 열 용도라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면 빈객들을 대상으로 한 ‘賜饌(사찬)’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褓(보)에 싸서 지게꾼에 지워 빈객들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소주방, 생물방, 생과방에 소속된 熟手(숙수)들에게 工錢(공전)이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표2>에서 보듯이 식료비만이 아니라 공업비와 임료가 크게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93년의 차하책에서 고사ㆍ다례와 연회에 관련된 식재료, 공업비, 임료를 모두 합하니 당년의 총지출 444만 량의 절반을 넘는 247만 량이나 되었다.

민비(명성황후) 이전의 宮主(궁주)들이 이렇게 풍성한 연회를 베푼 적은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통치와 개항 이후 몇 차례의 政變(정변)을 겪는 과정에서 왕실의 살림살이를 유교적 公의 명분으로 규제하던 정치세력들이 모두 소거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왕실은 1884년 이후 千年王國(천년왕국)의 宴樂(연락)을 누렸다. 지극히 공적으로 취급되어 온 銅錢(동전)을 남발하여 연회로 낭비하는 일은 18세기의 근엄했던 朝廷(조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7) 그 좋았던 시절이 1894년의 淸日戰爭(청일전쟁)으로 끝이 났다. 왕실을 비호하던 淸帝國(청제국)이 조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지원으로 성립한 內閣(내각)은 왕실을 立憲君主制(립헌군주제)의 굴레로 묶으려는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시련의 계절이 왕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3.甲午更張(갑오경장)의 충격과 회복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명례궁 재정은 1894-1895년의 甲午更張(갑오경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우선 無土(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갑오경장은 宮房田(궁방전)과 衙門屯土(아문둔토)에 부여해 온 免稅(면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甲午陞總/갑오승총). 그에 따라 民有地(민유지)로서 해당 結稅(결세)를 궁방에 상납하던 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또한 무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有土(유토)의 일부도 함께 폐지되었다. 유토 가운데는 무토와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다.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아주 낮은 수준의 賭地(도지)를 궁방에 바쳐 온 유토였다. 이런 부류의 유토를 갑오경장 당시에 第2種有土(제2종유토)라 하였다(李榮薰 1988: 135-6). 실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12처의 제2종유토가 명례궁의 수취 대상에서 이탈하였다. 18세기말 이래의 일이었다. 그 같은 추세의 연장에서 갑오경장으로 무토가 폐지되자 13처의 제2종유토가 더불어 폐지되었다. 전술하였듯이 18세기말 명례궁의 유토는 전국적으로 41처에 분포하였다. 그러했던 유토가 갑오경장 이후는 22처에 불과하게 되었다.(*8) 궁방전의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감소하였다.

갑오경장이 명례궁 재정에 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當五錢(당오전)의 폐지였다. 그에 따라 1892 -1893년 총수입의 88.2%나 차지했던 王室(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95년에는 궁주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乙未事變/을미사변). 명례궁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성립한 내각은 日本貨幣(일본화폐)와 동일 稱量(칭량)의 新式貨幣(신식화폐)를 발행하였다. 신식화폐 1元은 舊 常平通寶(구 상평통보) 5兩(양)에 해당하였다. 명례궁의 차하책은 1895년 정월부터 지출 수단을 구 상평통보에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제반 물가가 일률적으로 1/5로 切下(절하)되었다. 그런데 화폐의 단위만큼은 이후에도 여전히 구래의 兩(양)을 고집하고 있었다. 명례궁의 받자책은 1895년 8월까지 구 상평통보로 수입을 기재하다가 이후 신식화폐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화폐의 단위는 여전히 구래의 兩(양)으로 표기되었다.

[그림4] 1894-1904년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의 추이이다. 1894년의 수입과 지출은 구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1/5로 절하하였다. 동기간 화폐의 단위는 받자책과 차하책에서 여전히 兩(양)이었지만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元으로 표기하였다.

[그림4]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4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3-4, 41, 40, 39, 38, 37, 36, 35, 34, 33, 32) (奎章閣圖書 19001-68, 73, 67, 57, 6, 64, 16, 61, 63, 9, 74)


명례궁의 수입은 갑오경장의 충격을 받아 1894년 69만여 元에서 1896년까지 10만여 원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1897년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을 맞아 1899년까지 48만여 원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수준에서 1902년까지 정체하였다. 연후 1903-1904년에 148만여 원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 같은 각 연도의 수입에 있어서 80% 또는 90% 이상은 內下(내하)였다. 1903년에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내하가 전년의 33만여 원에서 127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받자책은 그 중의 100만 원에 대해 ‘未下條(미하조)’라고 용도를 밝혔다. 즉 각종 재화를 구입하고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들을 상환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이 1894년 이후 지출은 언제나 수입을 초과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변함없이 借入(차입)에 의해 꾸려졌다.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1903, 1904년에 대량의 내하가 이루어져 흑자재정으로 돌아섰지만, 누적되어 온 차입이 얼마나 상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1903년의 흑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지출이 증가하여 거의 收支(수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표3>명례궁의 수입 내역과 지출 용도: 1903-1904 (단위: 元) 황실재정_표3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33, 32),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1-9)


1903-1904년의 수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제시하면 <표3>과 같다. 兩(양)年의 평균 수입 151만여 원은 거의 대부분 내하로 이루어졌다. 내하의 비중이 무려 96.3%나 되었다. 2.0%의 供上은 宮內府(궁내부)로부터의 지급을 말하는데, 갑오승총으로 폐지된 무토의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1897년부터 행해진 지급과 역대 국왕의 肖像(초상)을 모신 眞殿(진전)에서의 享需(향수)를 충당하기 위한 지급 등을 말한다. 宮房田(궁방전)은 전술한대로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그 비중이 1.6%에 불과하였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食料費(식료비)가 77.7%의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점에서 1893년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 원인을 살피면 景孝殿(경효전)에서 행해진 78회의 上食(상식)과 茶禮(차례)가 가장 중요하였다. 경효전은 1895년에 시해된 閔妃(민비/명성황후)의 魂殿(혼전)이다. 민비(명성황후)는 1893년에는 살아 있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그 외에 1903년 한 해에 황제에게 進御床(진어상)이 28회나 바쳐졌다. 그 중의 9회에는 賜饌床(사찬상)까지 베풀어졌다. 1902년 나이 50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황제는 尊體(존체)를 보전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내탕으로 하여금 珍羞盛饌(진수성찬)의 床(상)을 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1903년은 그의 즉위 40주년이었다. 정부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며, 명례궁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식재료에 이어 인건비가 16.6%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명례궁에 속한 궁속들이 11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5] 명례궁의 실질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5 자료: [그림4]와 동일.


주지하듯이 대한제국기에 典圜局(전환국)이 다량의 백동화를 발행하여 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차하책이 전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은 1894-1904년에 평균 3.4배나 상승하였다. 동기간의 연도별 物價指數(물가지수)를 작성하여(*9) 각 연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을 제시하면 [그림5]와 같다. 여기서 보듯이 1904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명례궁 재정은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絶頂期(절정기)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명례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도 왕실의 내하가 이루어졌고 그 금액이 1903 -1904년에는 145만여 원의 거액에 달했지만 재정의 실질규모는 절정기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 사이 公的規範(공적규범)에서 이탈한 황실의 살림살이가 虛禮(허례)와 浪費(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當五錢(당오전)에 이어 그 허례와 낭비를 지탱한 내하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4.內藏院(내장원) 재정과의 관계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의 전제권력이 성립하는 1899년을 전후하여 정부재정에 속한 여러 公的財源(공적재원)을 궁내부 산하의 內藏院(내장원)으로 편입시켰다. 예컨대 1898년 내장원은 紅蔘專賣(홍삼전매)를 실시하고 蔘稅(삼세)를 징수하였다. 鑛稅(광세)도 내장원에 속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구래의 衙門屯土(아문둔토)와 牧場土(목장토)가, 1900년에는 구래의 驛土(역토)가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1901년에는 漁稅(어세)와 鹽稅(염세)가 내장원으로 넘어갔다. 그 외에 내장원은 沿江稅나 庖肆稅(포사세)와 같은 여러 명목의 잡세를 신설하거나 增徵(증징)하였다. 그 결과 내장원 재정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內藏院會計冊(내장원내장원회계책)』에 따르면, 1897-1900년 내장원의 연평균 수입은 20만 兩(양)에 불과하였는데, 1901-1902년에 200만 량, 1903년에 589만 량, 1904년에 3,004만 량으로 증가하였다(李潤相 1996a: 161-2). 특히 1904년의 급속한 팽창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 1903-1904년 내장원의 수입은 공적인 정부재정 수입의 43-69%에나 달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金載昊 1997: 118).

기존의 연구는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대한제국기 황실재정 가운데 내장원 재정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 그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내장원의 수입과 지출을 일일이 기록한 위의 회계책에서 쓰이는 화폐의 단위는 구 常平通寶(상평통보)의 兩(양)이다. 그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고 여겨진다. 갑오경장에 의해 新貨幣(신화페)가 발행되었지만, 그 유통 범위는 전국적이지 않았다. 신화폐 白銅貨(백동화)는 주로 서울, 경기, 황해, 평안에서 유통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구 상평통보가 지배적 통화를 이루었다. 내장원은 상평통보 지역에 대해서도 각종 세를 수취하였기 때문에 수입의 상당 부분은 상평통보의 형태였다. 회계책에 의하면 내장원은 1903년까지 錢(전), 銀貨(은화), 紙幣(지폐), 木(나무), 布(천)를 수입과 지출의 수단으로 하였다. 전은 상평통보, 은화는 신화폐의 本位貨(본위화)(1元), 지폐는 일본 第一銀行券(제일은행권)을 말하였다. 여기에 빠진 신화폐 白銅貨(백동화)와 赤銅貨(적동화)가 내장원에서 쓰이는 것은 후술하듯이 1904년부터인데, 그것도 그리 큰 비중은 아니었다. 내장원이 끝까지 상평통보를 會計單位(회계단위)로 삼은 이유를 당장에 다 밝히기는 힘들지만, 역시 총수입 가운데 그것의 비중이 컸고, 황실재정의 여러 기구 가운데 舊貨幣(구화폐)를 취급하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제국에서의 현금 환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


요컨대 내장원은 명례궁이 1895년부터 신화폐를 재정수단으로 채택했음과 대조적으로 1906년까지 구화폐를 고집하였다. 단순히 會計單位(회계단위)로만 구화폐가 활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 현물로서 구화폐가 수입되고 지출되었다. 회계책에 의하면 1903년 1월 ‘常平錢(상평전)’ 5,000량을, 2월에도 ‘상평전’ 6,519량을 인천에서 운반해 왔다. 내장원은 錢(전)을 보관하기 위해 1903년 6회에 걸쳐 2,800坐(좌)의 ‘錢櫃(전궤)’를 제작하거나 宣惠廳(선혜청)에서 빌려 왔다.10) 전을 封裹(봉과)하기 위한 613斤의 종이가 11회에 걸쳐 구입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내장원은 1903년 6회에 걸쳐 ‘상평전’ 5,600량을 황제에 內入(내입)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모두 내장원 재정에서 구화폐가 현물로 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명례궁과 내장원의 재정규모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내장원의 兩(양) 단위 수입액 또는 지출액을 1/5로 切下(절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식으로 앞서 소개한 내장원의 수입액과 [그림4]에 제시된 명례궁의 수입액을 비교한 결과, 1896-1900년 내장원의 수입 규모는 명례궁의 2-3%에 불과하였다. 1901-1903년은 17-26%이다. 수입이 3,004만 량으로 급팽창한 1904년은 명례궁의 3.2배이다. 요컨대 1903년까지 내장원 재정의 규모는 명례궁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명례궁 이외에 그보다 더 컸을 內需司(내수사)나 비슷한 규모의 壽進宮(수진궁)ㆍ龍洞宮(용동궁)과 같은 궁방들이 있었다. 이에 1904년조차도 그 수가 15에 달하는 궁방들의 총수입은 내장원을 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중심은 내장원이었다는 종래의 이해는 이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재정을 뒷받침한 內下(내하)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살피도록 하자. 내장원이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장원이 취급한 화폐가 상평통보로서 명례궁이 사용한 백동화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 재정규모가 1903년까지 명례궁의 26% 이하여서 명례궁 수입의 80-90%를 차지한 내하를 공급할 능력이 전혀 못되었기 때문이다. 수입이 명례궁보다 3.2배 많아진 1904년의 경우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동년 내장원이 황제에게 ‘內入(내입)’한 금액은 1,031만 량, 곧 260만 원이었다(李潤相 1996a: 195). 그 중의 146만여 원이 명례궁으로 지급된 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명례궁의 차하책이 제공하는 몇 가지 정보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1904년 명례궁은 134만 4,100원의 내하금을 ‘推來(추래)’하는 데 6,720元 50錢(전)의 운반비를 지출하였다. 1원당 운반비는 0.5錢(전)이다. 이 운반비는 1901년 이래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말해 명례궁으로의 내하금은 1901년 이래 동일한 장소에서 출발하였다. 참고로 1899년의 1원당 운반비를 조사하면 10배나 많은 5전이다. 그 때는 훨씬 먼 곳에서 내하금이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제 仁川에 있던 典圜局(전환국)이 1900년 漢城府(한성부)의 龍山(용산)으로 옮겨온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운반비가 1/10로 싸진 것을 그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04년 명례궁에 들어온 대량의 내하금은 그 출발지가 1901년 이래의 龍山典圜局(용산전환국)이었다. 巡檢(순검)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게꾼들이 白銅貨(백동화)의 櫃(궤)를 운반하는 행렬을 상상해보라. 그것만큼 대한제국의 실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5. 典圜局(전환국)의 운영 실태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은 총 1,803만여 元의 화폐를 鑄造(주조)하였다(甲賀宣政 1914: 37). 중앙은행이 부재했던 그 시대에 전환국이 주조한 화폐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 市中(시중)의 通貨(통화)로 발행되었던가. 전환국의 운영 실태에 관해서는 奎章閣(규장각), 서울대도서관,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에 고작 몇 건의 문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규장각의 「典圜局文書(전환국문서)」(經古349.1 H193jb)는 1900년 7월 15일부터 9월 6일까지 전환국의 管理(관리) 沈相薰(심상훈)이 인천전환국 技師(기사) 韓旭(한욱)에 내린 27건의 훈령을 綴(철)한 것이다. 대부분의 훈령은 황제의 啓單(계단)에 근거하여 무슨 용도로 얼마의 銅貨(동화)를 즉시 出給(출급)하라는 내용이다. 예컨대 7월 15일의 훈령을 소개하면 황제의 萬壽聖節(만수성절)을 맞아 進饌費(진찬비) 1만 元을 상납하기 위한 용도로 계단을 첨부하여 훈령을 내리니 도착 즉시 동 금액을 올려 보내되 巡檢(순검)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라고 하였다. 그 밖에는 皇子(황자) 義和君(의화군)에 대한 증여, 漢城電氣會社(한성전기회사)의 보스윅(Borswick)에 대한 지불, 郵船會社(우선회사)에 대한 지급, 전환국이 雇聘(고빙)한 日本人(일본인)들에 대한 賞與(상여) 등의 용도이다. 이처럼 전환국의 주조 화폐는 전환국의 管理(관리)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황제가 지정한 곳으로 現送(현송)하는 방식으로 발행되었다. 지정된 용도와 현송처는 거의 대부분 황실의 소비나 사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대도서관의 「典圜局文書(전환국문서)」(經332.4951 T128j)는 1904년 전환국의 管理署理(관리서리) 崔錫肇(최석조)가 매 월말에 그 달에 주조한 銅貨(동화)를 황제에게 ‘捧上(봉상)’한 내용이다. 이 문서가 전하고 있는 동년의 주조 총액은 3,500,455원이다.(*11) 이후 1914년 전환국의 甲賀宣政이 밝힌 동년의 주조 총액은 3,462,635원이다(甲賀宣政 1914: 37). 두 금액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보아 ‘봉상’의 실제 의미는 주조액에 대한 보고였다고 보인다. 동 문서를 작성한 최석조는 별도의 곳에서 “1902년 典圜局(전환국)의 주조 총액 280만 元 가운데 150만 원이 帝室用(제실용)으로 別庫(별고)에 따로 보관되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12) 이로부터 당시 황제는 주조액에 관한 전환국의 보고를 받은 다음, 그 중의 얼마를 자신의 창고로 옮기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황제의 처분을 위한 기초 자료로서 작성된 보고서가 위의 서울대도서관 문서라고 생각한다.

이 문서는 명례궁에 내려진 황제의 內下金(내하금)이 전환국에서 직접 실려 온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음에 큰 의의가 있다. 명례궁의 받자책에 의하면 황제는 1904년 7월 1,042,015원을 명례궁에 내하하였다.(*13) 그런데 위 문서에서 최석조가 보고한 동년 6월과 7월의 주조액이 1,058,316원이다. 두 금액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돈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황제는 전환국의 보고에 기초하여 동년 6월과 7월에 주조된 銅貨(동화) 전량을 명례궁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문서는 전환국의 활동이 동화의 주조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년 5월 전환국은 동화 이외에 222,229圓의 紙幣(지폐)를 봉상하였는데, 官蔘(관삼)을 放賣(방매)한 금액 중에서 나중에 ‘還淸(환청)’할 조건으로 ‘貸用(대용)’한 것이라 하였다. 1904년 3월 이후 관삼은 三井會社(미츠이회사)에 의해 위탁 판매되었는데(李潤相 1996a: 173), 지폐 22만여 원을 ‘대용’한 곳은 거기였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1900년의 규장각 문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동 8월 16일자 훈령은 지폐의 쓰임새가 浩大(호대)하므로 미리 동화로 3만 元의 지폐를 바꾸어 두라고 전환국에 명하였다. 다시 말해 전환국은 황제가 필요로 하는 화폐를 종류에 맞추어 공급하는 곳이었다. 전환국의 銅貨(동화) 주조도 어디까지나 황제 개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의 문서를 소개한다. 동 위원회가 寫眞(사진)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 자료는 4점의 문서를 철한 것인데, 그 중의 3점이 전환국과 관련된 것이다. 작성자는 內藏院卿(내장원경)이자 典圜局(전환국)長인 李容翊(이용익)이다. 황제의 心腹(심복)이었던 이용익이 전환국에 보관 중인 화폐의 액수와 用處(용처)를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 그 내용이다. 3점을 차례로 간략히 소개한다. 1900년 3월의 제1 문서는 지난 2월말 전환국의 時在가 81만 元인데, 그 중의 12만 원을 금년의 松都(송도) 蔘圃(삼포)의 間賣條로 內藏院(내장원)에 지급하였으며, 나머지 69만 원은 전환국이 銀貨(은화)를 주조할 용도로 보관 중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작년의 官蔘(관삼) 買入(매입)에 든 50만 원의 출처는 모두 전환국에서 찍은 돈이며, 함경도산 麻布(마포) 85同을 구매하여 某人(모인)에게 맡겨 두었으며, 지금 蔘 가격이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조속히 처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보고하고 있다. 1900년 7월의 제2 문서는 전환국의 시재를 간략히 보고한 내용인데 소개를 생략한다. 제3의 문서는 시기가 불명한데, 60만 兩(양)으로 쌀을 사서 京鄕(경향) 각처에 맡겨 두었다는 것과, 158만 량은 殖利(식리)의 목적으로 7처에 分散(분산)하였는데 當日(당일)이라도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과, 이 식리전을 포함하여 현 시재는 178만여 량이라는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이처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황제의 대리인 이용익이 전환국의 주조 화폐를 관삼, 마포, 미곡 등을 구입하고 판매하는 상업자금으로 활용하였으며 나아가 高利貸(고리대) 자금으로까지 투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용익은 전환국이 찍어내는 화폐를 자본금으로 했던 대한제국 최대의 상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를 忠犬(충견)으로 거느렸던 고종 황제 자신이 최대의 상인이었으며, 전환국은 그의 더 없이 훌륭한 資金源(자금원)이자 私金庫(사금고)였다.

후일 전환국의 事務長(사무장)이었던 三上豊은 “전환국은 국왕의 전환국, 화폐도 국왕의 화폐라 해도 좋은 까닭에 주조하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모두 국왕의 생각대로였다”고 회고하였다(三上豊 1932: 175-6). 이상과 같은 몇 건의 단편적인 문서가 전하는 전환국의 운영 실태는 三上豊의 회고가 일본인의 편견만은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惡貨(악화)가 남발됨에 따라 물가가 등귀하고 韓貨(한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가 그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았던 것은 전환국과 거기서 주조된 화폐가 어디까지 황제 개인의 재산이었고 그의 지불을 기다리는 황실의 살림살이는 너무나 浩大(호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급박한 內外情勢(내외정세)는 그 같은 황제의 放縱(방종)을 언제까지 放置(방치)하지는 않았다. 전환국의 백동화 남발은 시중의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1903년 하반기 이래 조정의 원로들은 이용익을 거듭 탄핵하였다. 동년 12월 결국 이용익은 내장원경과 전환국장에서 면직되었다. 곧이어 露日戰爭(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백동화의 남발로 피해를 본 일본상인들은 일본군이 전환국을 차압하고 폐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이용익이 관리해 온 전환국의 화폐, 곧 황제의 자산은 모두 內藏院(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三上豊은 1904년 2월(양력) 전쟁 발발 후 백동화 134만 원, 은화 90만 원, 金地(금지) 얼마가 내장원의 창고로 옮겨졌다고 회고하였다(三上豊 1932: 152-3). 실제 내장원의 회계책을 보면 1904년 1월(음력)에 백동화 1,499,750원, 적동화 12,000원, 은화 915,000원이 새롭게 수입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金地(금지)는 동년 8월에 되어서야 기재되는데, 927兩重(냥쭝)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년 8월 대한제국에 제2차 韓日協約(한일협약)을 강요하여 財政顧問(재정고문)을 파견하였다. 서울대도서관의 문서에 의하면 전환국은 동년 10월부터 주조 활동을 중단하였다. 대한제국의 재정을 감독하기 시작한 日帝(일제)의 작용이었다. 같은 작용이 내장원의 회계책에서도 관찰된다. 동년 8월 1903년의 官蔘(관삼) 販賣價(판매가) 중에서 三井會社(미츠이회사)로부터 찾아온 것이라 하면서 334,000원의 지폐가 수입으로 계상되었다. 11월에는 함경도산 마포 132동이 수입으로 잡혔다. 그 동안 이용익이 관리한, 어딘가에 맡겨져 있던 황제의 재산이 내장원의 공식 회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내장원의 연간 수입은 1903년의 589만 兩(양)에서 1904년에 3,004만 량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李容翊(이용익)이 관리해 온 황제의 자산이 1904년의 정치정세에 규정되어 내장원의 재정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내장원의 재정은 빈약하였으며, 1904년에 돌출적으로 비대해진 것은 황제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요컨대 대한제국기 皇室財政(황실재정)의 중심은 典圜局(전환국)에 있었다. 전환국이 주조한 1,803만 원의 화폐 가운데 상당 부분은 明禮宮(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으로 現送(현송)되어 황실의 생활비와 의례비로 지출되었다. 1897-1904년간 명례궁으로 옮겨진 것만도 345만 원이 넘었다. 전 궁방에 분배된 것을 합하면 1,803만 원의 적어도 절반은 되었을 터이다. 황제는 나머지 돈을 상업자금이나 고리대자금으로 활용하였다. 그에 따른 수익이 얼마였는지는 추측하기 힘들다. 어쨌든 1903년 12월 그의 심복 이용익이 殘高(잔고)로 관리한 황제의 자산은 242만여 원에 달하였다.(*14)이로부터 황제가 궁방 이외의 곳에 지급한 돈이 대략 600-700만 원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돈이 생산적으로 殖産興業(식산흥업)이나 軍備擴充(군비확충)의 용도에 투자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러했다면 무언가 흔적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三上豊에 의하면 1903년 10월 황제의 卽位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도합 900만 원이 드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다(三上豊 1932: 131). 그런 비생산적인 용도에 황제가 주조하거나 번 돈의 대부분이 蕩盡(탕진)되었을 것임은 황실재정에 관한 이상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고 남는 바라고 하겠다.

6.맺음말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大韓帝國期(대한제국기) 皇室財政(황실재정)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內藏院(내장원)을 황실재정의 중심 기구로 간주한 위에 오래 전부터 존속하면서 황실재정의 다른 한 축을 이루어 온 宮房(궁방)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 논문은 왕실(황실)의 廚房(주방)에 食材料(식재료)를 조달했던 明禮宮(명례궁)이란 궁방을 대상으로 하여 18세기말 이래 20세기 초에 걸친 재정의 구조와 추이를 분석하였다. 1793-1794년 명례궁의 수입원은 크게 宮房田(궁방전)의 地代(지대)와 政府(정부)의 供上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왕실은 자신의 사유 재산을 보유한 私的存在(사적존재)이면서 정부의 공상에 기초한 公的存在(공적존재)이기도 하였다. 왕실재정의 이중적 성격은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에 지지되고 또 견제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명례궁 재정은 黑字(흑자) 기조였으며, 18세기의 경제적 안정과 왕실의 儉素(검소)로 인해 상당한 양의 在庫(재고)를 보유하였다.

19세기가 되어 명례궁은 赤字(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재고 자산은 18세기말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명례궁은 183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儉素(검소)風(풍)을 고수하면서 收支(수지)의 균형을 맞추었다. 재정이 뚜렷이 악화되는 것은 1840년대부터였다. 누적된 적자로 재고가 바닥이 나고 일시 借入(차입)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19세기 전반 명례궁 재정이 적자 기조로 빠진 것은 동시대 농업생산의 전반적 정체를 반영하여 궁방전의 수입이 줄고 왕실의 살림살이가 커지는 가운데 宮屬(궁속)이 늘어나 賃料(임료)의 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명례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大韓帝國期(대한제국기)가 아니라 1882-1894년의 고종 연간에 있었다.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1854-1893년에 3.8배나 팽창하였는데, 그 주요 기간이 1882-1894년이었다. 왕실은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을 명례궁에 지급하였으며 그것이 전 수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명례궁 재정은 큰 폭의 적자였다. 명례궁의 지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궁의 주인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告祀(고사)와 茶禮(차례)를 빈번하게 행하고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한 宴會(연회)와 賜饌(사찬)을 繁多(번다)하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高宗(고종)의 登極(등극) 이래 몇 차례 커다란 政變(정변)을 거치면서 왕실을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으로 견제하던 정치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위에 성립한 閔氏(민씨) 정권은 전통적으로 극히 公的(공적)으로 관리되어 온 화폐의 주조를 執權(집권)이나 致富(치부)를 위한 私的(사적) 수단으로 행사하였다. 유교적인 공적 규범에서 크게 이탈한 왕실재정은 1894년 甲午更張(갑오경장)과 뒤이은 민비의 시해로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皇室財政(황실재정)은 점차 원래의 양태와 규모로 복구되어 갔다. 典圜局(전환국)이 대량으로 발행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가 그 직접적인 재정수단이었다. 황제가 內下(내하)한 전환국의 화폐는 명례궁 수입의 절대 다수를 점하였다.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주요 지출은 민비의 魂殿(혼전)에 올리는 上食(상식)과 茶禮(차례), 그리고 황제를 위한 進饌(진찬)이었다. 다량의 백동화의 內下(내하)에도 불구하고 1904년 명례궁의 실질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은 1894년 이전 민비가 궁의 주인이었던 시절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황제는 當五錢(당오전)을 대신한 白銅貨(백동화)를 가지고 그것을 절반의 규모로 복원하였음에 불과하였다.

요컨대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는 전환국에 있었다. 황제는 전환국의 주조 화폐를 家産(가산)으로 장악하였으며, 황실의 허례와 낭비에 그것의 대부분을 지출하였다. 여분의 화폐는 황제의 심복에 의해 商業資金(상업자금)과 高利貸資金(고리대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종래 紅蔘專賣(홍삼전매)를 비롯하여 각종 財源(재원)을 집중하여 황실재정의 중심으로 알려진 內藏院(내장원) 재정은 명례궁이 대표하는 궁방재정에 비해 그 규모가 아주 초라한 것이었다. 1904년 내장원 재정이 갑자기 肥大(비대)해진 것은 황제의 심복 李容翊(이용익)이 관리하던 황제의 자산이 내외의 정치정세에 떠밀려 내장원으로 편입된 所致(소치)일 뿐이었다.

이상과 같은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을 두고 볼 때 종래 몇 사람의 연구자들이 내장원이 電車軌道(전차궤도)와 留學生學資金(유학생학자금)과 같은 생산적 용도에 몇 건의 少額(소액)을 지출한 것에 근거하여 황실재정의 지향을 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거나 1904년 내장원이 황제에 상납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자금이 反日獨立運動(반일독립운동)에 쓰였을 것으로 추론한 것은 荒說(황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본 논문이 장래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는 것은 적지 않다. 內需司(내수사)와 壽進宮(수진궁) 등, 다른 宮房(궁방)의 재정기록을 활용하여 전 궁방의 재정규모를 산출해 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 작업이 수행되면 皇室財政(황실재정)과 政府財政(정부재정)을 비교할 수 있으며, 양자를 통합한 대한제국의 國家財政(국가재정) 전체가 복원될 수 있다. 18세기까지의 理學(이학) 君主(군주)들이 극히 공적으로 취급했던 通貨(통화)의 주조가 어찌해서 19세기말에 이르러 왕실(황실)의 더없이 노골적인 家産(가산)으로 장악되어 허례와 낭비에 탕진되었는지는 실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한 왕조의 패망을 초래한 이 같은 國家體制(국가체제)의 逸脫(일탈)은 經濟史(경제사)의 영역을 넘어 政治史(정치사) 내지 思想史(사상사)의 영역에서 그 內在的(내재적) 原因(원인)이 종합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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