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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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 - 아계 이산해 「울릉도설(蔚陵島說)」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4. 2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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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일곱 번째 이야기

2016년 4월 27일 (수)
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

  우리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附屬島嶼)라고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속도서라는 말에는 이미 영유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영유의식이 영유권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 즉 가시거리(可視距離)에 있다는 사실이 영유권 확립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오늘날에는 보인다는 사실이 영유권의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못하지만, 전 근대기는 달랐다.

  17세기에 일본 에도막부가 영유권을 판단할 때의 기준은 거리관계였다. 에도막부는 울릉도(일본명 다케시마[竹島])뿐만 아니라 독도(일본명 마쓰시마[松島])도 조선 땅에서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는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판단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두 섬이 일본과 관계없다는 지령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현재 일본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한국 문헌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궤변을 펴고 있다. 일본의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원인의 일단을 우리에게서도 찾는다면, ‘우산도’를 기록한 문헌이 많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관동지방을 유람할 때마다 육지에서 울릉도를 바라본 감상을 글로 남겼다. 조선 중기의 문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아계유고(鵝溪遺稿)』에서 「울릉도설(蔚陵島說)」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울릉도’를 논한 바 있다.


  울릉도는 동해에 있는 섬으로 육지에서 몇백 리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마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해기(海氣)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너머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기에 소공대(召公臺)에 오르는 행인 중에는 이 섬의 수목과 멧부리를 또렷이 본 자가 더러 있으니, 이로써 울릉도가 육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있다고 한다면 이 섬이 봉래나 곤륜 중 하나로 이인(異人)과 선객(仙客)이 살고 있는 곳일지 어찌 알겠는가. 한 폭의 돛을 순풍에 높이 달면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이 섬에 당도할 수 있으며 세상의 번다한 의혹들을 이로써 깨뜨릴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한갓 목을 빼고 동쪽을 바라보면서 속절없이 몽상(夢想)과 시편 속에서나 그려보게 할 뿐이다. 슬프다![蔚陵島, 在東海之中, 距海濱不知其幾百里也. 每秋冬之交, 陰曀捲盡, 海氣澄朗, 則自嶺東望之,如一片蒼煙, 橫抹於水天之間. 獨眞珠府與此島, 最爲相對, 故行人之登召公臺者, 或見其林木岡巒之狀, 了了然可辨, 以此知不甚遠也.……如使神仙不有則已, 有之則是島也安知蓬萊崑崙之一,而異人仙客之所在耶. 一幅布帆, 便風高掛, 則不過一晝夜之頃, 可以致身其間, 而世之群疑衆惑, 從此可破, 旣不得此, 則令人徒費引領東望, 而空入於夢想吟咏之中. 悲夫!]

  아계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파천 문제로 탄핵 받아 평해(平海)에 유배된 적이 있다. 아계가 유배지에서 울릉도의 모습을 망견(望見)했음은 그의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와 「망양정기(望洋亭記)」에도 보인다. 울릉도는 포항에서 약 217㎞, 임원항에서 약 134㎞ 떨어져 있으니 가까운 거리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울진, 평해, 영해, 삼척 등지에서 맑은 날 누대에 올라 쉽게 울릉도를 목격할 수 있었음은 아계를 비롯한 많은 이의 글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기술한 최초의 관찬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이다. 거기에는 (울진에서) “날씨가 맑으면 봉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또렷이 볼 수 있다.[風日淸明, 卽峯頭樹木及山根沙渚, 歷歷可見]”고 적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많이 거론하는 것은 울릉도가 보인다는 내용이 아니라 우산도(독도)가 보인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고 했기 때문이다.

  두 문헌에 공통된 것은 “날씨가 맑다”와 “볼 수 있다”이다. 두 문헌 모두 날씨가 맑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아계도 울릉도가 보이는 시기를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늦가을 구름이 말끔히 걷힌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가장 잘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날씨 좋은 늦가을 운이 좋으면 울릉도에서 독도를 직접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다만 “볼 수 있다”고 한 내용, 즉 “보인다”는 것이 하나는 육지에서 울릉도가 보임을 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임을 말한 것이므로 각각의 맥락이 다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본은 다른 주장을 한다. 
  우리는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우산도가 죽도(댓섬) 혹은 또 다른 울릉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세종실록』에는 우산도와 무릉도라는 두 섬[二島]이 주어로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목이 목적어로 되어 있어 울릉도가 주어이다. 따라서 두 문헌에서 지칭하는 대상은 엄연히 다르다. 이는 논란 이전에 해석 능력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우산도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울릉도 쟁계’를 언급할 때 『세종실록』보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주로 인용했다. 이는 당시 학자들이 『세종실록』을 접하기 어려웠던 상황에도 기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산도’를 실견(實見)한 자가 많지 않았음의 방증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해금정책으로 인해 먼 바다에 나가는 일이 금지되었고, 더구나 왜구의 침입이 염려되는 울릉도는 더욱 금지되었다. 아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육지에서 바라다 본 울릉도를 이상향으로만 여길 뿐 그 섬에 가본다거나 개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17세기 말 조선은 영토문제로 일본 정부와 국가적 분규를 겪었으면서도 울릉도를 개척하기로 결정한 시기는 고종 시대(1882)에 와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거주민을 데리고 나오는, 이른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했다. 울릉도에 가는 것 자체가 범법행위인데 어떻게 기록을 남길 수 있었겠으며, 또 어떻게 울릉도보다 더 먼 우산도까지 갈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울릉도의 많은 자원은 사람들을 늘 유인하여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입도한지라 기록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인의 목적지는 울릉도였기에 독도까지 갈 필요가 없었고, 일본도 울릉도가 목적지였지만 독도를 경유해야 울릉도에 다다를 수 있었기에 실견 기록이 많은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미지의 섬에 대한 탐구정신과 개척정신을 지녔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울릉도에 대한 지견(知見)이 많아졌을 것이고, 자연히 우산도(독도)에 관한 기록도 많아졌을 것이다. 문헌 기록만을 
영유권의 근거로 인정하려는 현시대에 이 점이 아쉬운 것이다.

 
 
글쓴이 : 유미림  
  • 한아문화연구소(韓亞文化硏究所) 소장
  • 주요 저·역서
    -『일본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지식산업사, 2015
    -『우리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지식산업사, 2013
    -『세종의 국가경영』 (공저), 지식산업사, 2006 등
    -『빈방에 달빛 들면』 (공역), 학고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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