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수당가 4대 애국 -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4. 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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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가 현충원에 안장…수당 이남규 선생 가문

항일독립운동에서 6·25 참전 순국까지…100년의 유산, 나라 사랑

[광복 70년에 본 2015 호국보훈]


올해는 광복 70년과 6·25전쟁 발발 65주년을 맞는 해. 굴곡진 역사 속에서도 숭고한 나라 사랑의 마음만은 한결같이 맥을 이어왔다. 여기, 구한말인 1855년부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까지 4대에 걸쳐 나라를 지키려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



수당고택에서 조상들의 나라 사랑을 되새기는 이문원 교수.


“···폐하께서는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앉으셔서, 선비와 백성들을 모두 앞에 불러놓고 애통의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은 죽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망하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망함을 재촉하고 그 남아있는 것이 구차하며, 죽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죽는 것을 재촉하고 그 사는 것이 구차하게 된다.


너희들은 원수의 적을 그릇 곁에 있는 쥐라고 생각하여 던져 때리기를 꺼리지 말며, 너희 몸을 엎어진 둥주리(짚으로 크고 두껍게 엮은 둥우리)의 새알이라고 하여 그 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지 말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짐의 분개하는 바를 대적하여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종묘사직의 욕을 씻게 하라’ 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동맹 각국들로서도 윤리 기강을 알지 못하고 적의 뒤를 따르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함께 분개하여 향응(響應 : 남의 주창에 따라 그와 같은 행동을 마주 취함)하여 더불어 일을 같이하지 않겠습니까···.”


때는 구한말.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에 이어 일제의 사주 아래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이라는 매국적 조치마저 발표되자 당시 영흥부사(永興府使)이던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 선생은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를 고종황제에게 올렸다. 명성황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려 국모의 원수를 갚고 동맹국과 함께 일제를 처단하자는 강력한 성토를 담은 주장이었다.


수당 선생은 고려 말 충신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후손.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의 스승이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면서 고종을 보좌했으며, 1893년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에 이어 명성황후 시해 등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규탄하는 항일 상소를 잇따라 올려 고종에게 그 누구보다 일제와의 결전과 국권 회복을 직언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개인과 단체가 올린 상소들은 고종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친일 각료들의 공작 때문. 일은 점차 악화돼 1905년 을사늑약까지 체결되자 수당 선생은 비장한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를 올린 뒤 깨끗이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불출했다.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어 민종식이 의진(義陣)을 일으켜 홍주(洪州 : 지금의 충남 홍성)에 입성해 그 선봉장에 임명됐지만, 수당 선생은 끝내 홍주에 입성하지 않았다.


충신, 효자, 충노(忠奴)의 순절


왕명에 의한 합법적인 길이 아닌 의병 활동엔 몸소 참여하고자 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홍주 의진이 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찾아오자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또한 대장 민종식의 참모이며 족친(族親)인 이용규의 청까지 들어줘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탈환작전본부를 구성하고 거사 준비도 갖췄다.


불행히도 이 계획은 누설된다. 충남 관찰사 김가진의 명에 따라 일본 헌병과 관군 수십 명이 수당 선생 부자와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등을 체포해 공주 감옥에 투옥했다. 곧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한 잔인한 고문이 자행됐다.


수당 선생은 의연했지만, 아들 충구가 고문에 못 이겨 자진하려고 혀를 깨물자 그를 구하려고 “민종식이 의리를 좇아 절개를 세우는 것은 그 이치가 당당하지만, 충구가 형을 받아서 목숨을 끊는 것은 그 명목을 댈 데가 없다”고 자백했다. 이미 민종식이 다른 곳으로 피신했기에 알려줬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적군은 민종식의 거처를 탐문해 찾아냈고, 수당 선생은 홍주 의진과 무관하다는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그럼에도 의진과 관련이 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자, 이듬해 적군은 그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수당 선생은 “나는 대부(大夫)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가마를 탔다. 아들 충구가 뒤를 쫓았다.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아산의 온양 평촌리 냇가에 이르러 일본헌병이 충구를 칼로 베고자 하니 수당 선생은 충구에게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하여 함께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며 칼을 손으로 잡아 막았다. 이에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충구는 부친을 보호하려 했지만 끝내 부자는 함께 일본헌병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가마를 메던 하인 김응길(金應吉)이 이에 격분해 가마의 막대기를 뽑아 일본 헌병을 때려죽였지만 그 역시 적군의 손에 죽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충신과 효자, 충노(忠奴)가 한꺼번에 순절했다며 칭송했다. 1907년 9월 26일의 일이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1대 이남규, 2대 이충구, 3대 이승복 선생과 4대 이장원 소위 영정(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장남들로 이어진 나라 사랑


5월 26일 오후 2시 30분.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방산저수지 아래 산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옛집. 수당 선생의 생가(生家) 수당고택(修堂古宅)이다. 수당 선생 이하 4대가 나라의 존엄과 독립을 위해 온몸과 생을 바친 호국정신을 잉태한 곳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손자 이구(李久)의 부인이 1637년(인조 15년) 아계 묘소 근처인 이곳에 건립했고, 1846년(헌종12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한다.


통상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 일반적인 사대부 집과 달리 사랑채와 안채가 남쪽을 바라보며 일자로 늘어선 구조로, 서쪽의 사랑채가 동쪽의 안채보다 뒤편에 있다. ‘一’자형 팔작지붕 형태인 사랑채와 ‘튼 ㅁ’자형인 안채는 독립적인 담장을 두르며 나란히 자리했다.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핀 고택 정원은 향나무와 오래된 탱자나무 등으로 잘 단장돼 있다.


수당고택은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81호. 게다가 예산은 수당 선생의 고향. 그래선지 이곳에 다다르기 전부터 왕복 2차로에 불과한 시골길 곳곳에서 ‘이남규 선생 고택’ 이정표를 곧잘 볼 수 있다.


“증조부인 수당 선생이 장남이셨는데, 조부도 선친도 다 장남이셨어. 형님까지도.”

이곳의 소유자이자 지킴이는 수당 선생의 증손자 이문원(李文遠·78) 중앙대 명예교수. 담담하면서도 나지막한 이 교수의 어조에 낮 최고기온이 30℃까지 치솟아 땀 삐질삐질 나게 하는 때 이른 봄 더위가 대관절 어디 갔나 싶으리만치 등줄기에 한 가닥 서늘함이 스쳐 지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이었던 시절, 장남은 한집안의 기둥이자 희망이요, 기대주로서 특별한 존재였지 않은가. 그럼에도 한산(韓山) 이씨 집안 후손인 이 교수의 직계존속 3대(代), 그러니까 증조부와 조부, 선친은 모두 일제에 맞서 싸우다 살해당했거나 평생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다. 여덟 살 터울인 유일한 형은 6·25 전쟁에 참전해 순국했다. 그렇게 해서 4대가 모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가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수당 선생 장남인 유재(唯齋) 이충구(李忠求,1874~1907) 선생은 부친을 도와 홍주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가 거듭되는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부친을 군도로 내리치는 일본 헌병에 저항하다 결국 부친과 함께 순국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수당 선생에겐 순국선열로서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유재 선생에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수당고택 전경.

안채.

사랑채.


신간회의 핵심 인사


수당 선생의 손자이자 유재 선생의 장남인 평주(平洲) 이승복(李昇馥, 1895∼1978) 선생 역시 국내외에서 펼쳐진 굵직한 독립운동마다 이름을 올린 애국지사다. 평주 선생은 1913∼19년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독립지사인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1920년엔 박은식과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 활자를 연해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체포돼 6개월간 구금당했다. 같은 해 7월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 이민복, 조성환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을 지원하려고 김병희와 함께 귀국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폈다.


1921년엔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등과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聯通制)의 조직 결성에 힘썼다.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도 연루돼 고초를 겪었으며, 같은 해 7월 홍명희, 홍증식, 김찬 등과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했다. 1926년 9월 개최된 사상단체 정우회(正友會)의 집행위원회에선 위원으로 선임됐는데, 이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제휴를 주장한 정우회 선언으로 이어져 민족협동전선의 대표적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의 계기를 마련했다.


평주 선생은 또 1927년 1월 신간회 결성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지회 결성에도 힘써 1927년 11월 이관용, 권태석 등과 신간회 충남예산지회를 주도해 조직하는 등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1928년 6월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엔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1927∼31년엔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 창달에도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의 진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안재홍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엔 중국 난징과 상하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군관학교에 입교하길 원하는 국내 청년들을 그곳 지도자들에게 소개해주면서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평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수당기념관 내부와 기념관에 전시된 수당 선생의 유품들.


4대를 이은 헌신


“선친(평주 선생)께선 13세 때 고아가 되셨어. 또한 집안의 가장이 되셨지. 그래선지 술에 취하면 늘 울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절대 무덤을 쓰지 말라고.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지키지 못한 놈한테 그런 게 필요하냐고. 사당에 모신 조부의 피 묻은 토시를 보실 때마다 곡(哭)을 하시곤 했어.”
힘이 없어 일제의 만행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던 시절, 거기에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1대 수당 선생을 비롯해 2대 유재 선생, 3대 평주 선생이 그린 삶의 궤적. 대를 이어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희생한 그들보다 더한 의리와 충절이 있을까.


수당 선생 가문의 나라 위한 헌신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수당 선생의 증손자이자 이 교수의 형인 이장원(李章遠, 1929~1951) 소위도 6·25전쟁 당시 해병대 장교로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었다. 미혼이었던 이 소위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 사관 후보생 5기로 자원입대해 같은 해 9월 소위로 임관한 뒤 중요한 작전들에 참여했다.


후방 교란과 해안 봉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해병 독립 42중대에 편재된 이 소위는 중대를 이끌고 함경남도 원산의 황토도 파견 소대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최전선에서 북한 내무성 직속대대인 25여단 150여 명과 대치했다. 황토도는 북한의 상당한 관심과 전력이 집중됐던 곳.


이 소위는 무전기마저 적탄에 파괴돼 본대와 교신이 두절되고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된 악조건에서도 대원들을 독려하며 적을 격멸했다. 하지만 그는 진내에 떨어진 적탄에 부하 3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성공한 이 작전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952년 1계급 특진과 함께 1953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2005년 2월 전쟁기념관은 ‘이달의 호국 인물’로 선정했다.


(사진:1,2,3,5 국립대전현충원, 4. 국립서울현충원)


‘士可殺 不可辱’


수당고택 옆엔 수당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전시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여섯 글자. ‘士可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 수당 선생이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으려던 일본 헌병들에게 외친 최후의 호통이었다고 한다. 명문 독립운동가 수장다운 기개였던 셈이다.


이곳엔 수당 선생의 일기, 유묵(遺墨 :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모은 책, 문집, 수당 선생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고종의 칙명(교지), 벼루와 벼루집, 필통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돼 있다.


이 교수는 수당 선생의 후손이자 수당기념관장으로서 이곳에 거주하며 책을 읽는 틈틈이 방문객들에게 애국충절을 설파하면서 집안의 역사를 지킨다. 성균관대 출신으로 교육학을 전공하고 2002년 8월 중앙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그는 2001년 9월부터 3년간 제6대 독립기념관장으로도 일했다.


어쩌면 조상들과 형제의 열정적인 나라 사랑은 오롯이 남은 이교수에겐 가슴을 아리게 하는 삶의 족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때론 감당키 힘들 만큼 엄청난 ‘가문의 영광’은 종종 살아남은 후손에겐 잊기 힘든 기막힌 일이자 ‘가혹한 부채’인 경우도 적지 않던가.


실제로 이 교수는 5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다. “선친께선 입학금만 주시고 등록금과 책 살 돈은 주지 않으셨지. 그래서 입주 과외로 고학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어. 형제자매 중 단 한 명도 제대로 학교를 다녀본 이가 없어. 선친께선 큰돈이 생기면 늘 독립자금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이지.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서울 에서 3번, 예산에서 3번이나 옮길 만큼 가족이 이사를 자주 다녀야했어.”


그럼에도 이 교수의 대답은 간결했다.


“단 한 번도 조상들을 원망한 적 없어. 수당 선생은 신채호 선생과 변영만 선생을 애제자로 둘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난 스승이셨어. 한마디로 항일운동의 상징이셨지. 난 그것이 당시 인(仁)과 의(義)를 무엇보다 숭상한 유학의 전통을 받든 애국 관료로서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거라 생각해. 나라가 어려울 때 식 자(識者)층이 개인의 행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그게 대를 이어 나라 사랑을 가능케 한 정신력의 원천이라고 봐. 생명을 바친다는 건 결코 연습할 수 없는 일이잖아.”


요즘의 나라 사랑 현주소에 대해 이 교수는 “4대가 나라 사랑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긴 했지만, 집안 이야기를 되도록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최근 많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 상당수가 정신적 측면보다 물질적 측면을 앞세워 3·1절과 현충일, 광복절의 진정한 의미조차 제대로 알려 들지 않는 무관심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라 고 덧붙였다.


수당고택 주차장 입구의 속이 파인 느티나무.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현재 수당, 유재, 평주 선생 3대는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225, 226, 227호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4대인 이장원 소위는 국가유공자로서 국립서울현충원 19묘역 4판 60331호에 안장돼 있다.


또한 수당, 유재 선생과 함께 일본 헌병의 만행에 저항하다 함께 참변을 당해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하인 김응길 선생도 애국지사 3대의 묘역 바로 곁에 안장됐다.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을 아꼈던 수당 선생을 본받아 이 교수는 매년 김응길 선생의 제사를 수당 선생과 같은 날에 올린다.


“2010년 4월 예산의 선산에 모시던 조상들 묘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어. 현충원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한데 모신 민족의 성지이니 개인 선산에 모시는 것보단 더 뜻깊을 테고, 조상님들도 아시는 분 만나면 심심치 않으실 거 아냐?”


서울로 돌아오는 길. 수당고택 주차장 입구에 선 커다란 느티나무를 다시 본다. 이 교수에 따르면 수당고택을 짓기 전부터 있던 것이란다. 밑둥치가 시커멓게 썩어 속이 덩그러니 파인 고목 한 그루. 그 텅 빈 속으로 거꾸로 말아들면서 힘차게 다시 여러 갈래로 쑥쑥뻗어 올라 철 이른 더위를 피할 그늘을 만들어주는 굵은 줄기들이 예사롭지 않다. 구한말인 1855년부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까지 무려 4대에 걸쳐 나라를 지키려 몸과 마음을 바친 수당 선생 집안의 시들지 않는 조국애가 오버랩됐다면 과장일까.


나라 사랑이라는 ‘공감(共感)’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눈빛,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법. 그대는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무성한 잎새를 흔들며 고목이 묻고 있었다.


| 수당기념관 | 041-331-4401, www.sudang.net

출처 2015.06.04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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