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 현봉학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대구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국 해병대의 문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이후 부대의 이동에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흥남 철수 작전에 관여했다. 작전 당시인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당시 피난민이 함께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봉학은 자신이 승선하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 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피난민들을 태워 구출해 달라 간곡하게 요청했고 이에 탄복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2천명이 정원인 배에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으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으며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하였고 승선한 젊은이들 중 일부는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려고도 하였다. 하루 뒤인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하는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하선시켰다. 이틀간의 철수 과정 중 피난민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선박 구석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틈세에서 서로의 웅크린 몸에 의지하며 버텼던 지옥같은 시간이였지만 '모세의 기적' 처럼 홍해를 건너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였다고도 회고한다. 이 철수 작전 이후 그는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었다. 이틀간의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한장면으로 역사적 사실관계는 "김백일 1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현봉학 박사는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버지니아 주도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 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 (Medical College of Virginia)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의대 장로교메디칼센터 (Penn Presbyterian Medical Center)에서 레지던트를 마쳤으며,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의 병리전문의로 일했고, 1962년부터 1987년까지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또 버지니아 의대, 콜럼비아 내과.외과의대, 필라델피아의 토머스 제퍼슨 의과대,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2007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문필가 피터 현과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현시학 제독이 현 선생의 동생이다. 그리고 본인도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에드워드 M. 알몬드(Edward Mallory "Ned" Almond, 1892년 12월 12일 ~ 1979년 6월 11일)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육군의 10(X) 군단의 군단 사령관이다.
에드워드 M. 알몬드는 버지니아 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를 1915년에 졸업을 했다. 1916년 육군 보병 장교가 되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마지막 달에 미국 제4보병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복무를 하였다. 1930년 그는 미군 캔자스 주 포트 리벤워드에 있는 지휘관 간부 학교를 졸업했다. 필리핀 복무를 마친 후에 1934년 미국 육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미군 참모본부 정보부에서 일을 했다. 1938년 10월에 소장으로 진급을 하였고, 미국 해군 전쟁 대학을 1940년에 졸업했다. 한국전쟁에서 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철수에서 작전계획에 없던 민간인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
에드워드 M. 알몬드 장군의 주요 서훈내역: 수훈복무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 퍼플 하트
레너드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라루 선장은 1914년 1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작전 참가 업무가 끝났고,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분도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14일,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항해를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너스 수사가 몸담았던 성 바오로 수도원은 마리너스 수사가 숨지기 이틀전 한국의 왜관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후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돼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어-맥코맥사(Moore-McCormack Lines)의 화물선이다. 길이 455피트(약 138.7m). 7천600t.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있었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선 이 배의 철수 작전의 전말을 담은 <Ship of Miracles>(저자 Bill Gilbert, 출판사 Triumph Books)라는 책이 출판됐다. 이 책은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됐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1년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우연히 참석했던 재미동포 기업가 안재철씨는 라루 선장의 삶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이후 흥남철수 관련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냈다. 안씨는 철수 작전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씨와 함께 기네스 기록 등재를 신청했고,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2001)였습니다. 레너드 라루는 전쟁 당시 37세였는데 전쟁 후 40세에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입소하여 수사가 되었습니다. 2001년 87세를 일기로 마리누스 수사(Brother Marinus)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는 1927년 12월 15일 뉴욕 브롱스에서 출생하여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1950년 6월 뉴욕 알프레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 진학을 목적으로 학비를 모으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취업하여 레너드 라루 선장을 도와 22살의 나이로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연하게 수도자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의 장례미사에서 만난 미국계 한인사업가 안재철씨를 만나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민간 배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하여 등제하였다. 이후 1954년 뉴욕 코넬대 로스쿨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계속해서 예비역으로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제독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미군 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러니는 2004년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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