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2_Biography

승선인원보다 7배나 많은 수의 피난민을 구해 주었던 선장 레너드 라루, 마리누스 수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6. 1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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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곽재구 . 대전차장애물 징검다리처럼 코스모스 꽃길 위에 놓였습니다 만세교 지나 함흥 여관집 큰아들 기선이 아재 이곳 바다에서 사십년 동안 소주병 붙들고 울며 살았습니다 돈은 벌어서 뭐해 고향에 다 있는데 밤이나 낮이나 지나는 사람 붙잡고 소주 한잔씩 권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헌 오징어처럼 파도에 떠밀려 죽었습니다 대전차장애물 구렁이처럼 코스모스 꽃길 휘감았습니다 너두 한잔 해라 이놈 얼룩무늬 콘크리트 장벽 향하여 고래고래 소주 한잔 따르던 기선이 아재 꽃길 속에 설핏 보았습니다. . 1. [곽재구]; a. [화진포] 1980년대 초 포구기행 연작 시를 준비하던 곽재구는 속초 대포항을 취재할 때 제 장인어른이신 '만세교 지나 함흥 여관집 큰아들 기선이 아재'의 사연을 접했습니다. 속초 허름한 여관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적은 시가 바로 '화진포'입니다. 2011년 제 각시와 처형 그리고 저는 순천에서 곽재구 시인을 만나 팥죽을 대접받으며 포구기행의 집필과정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 2. [김기선]; b. [국제시장] 2014년 12월에 개봉된 '국제시장'을 제 각시와 저는 눈물범벅이 되며 인천 송도 근처의 어느 영화관에서 감상했습니다. 그 영화는 김기선 제 장인어른이 '난리만 피하고 오라는 어른들의 성화에 혈혈단신 바람 찬 흥남부두를 뒤로하고 피난 선에 몸을 실었'던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에서 시작을 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메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에 제 장인어른도 몸을 실었습니다. . c. [메리디스 빅토리호] 메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는 2,000명이 최대 승선인원인 화물선으로 적재했던 탄약과 포탄 그리고 휘발유들을 버리고 피난민 1만4천 명을 태우고 어뢰를 뚫고 거제도 장승포까지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그 일로 민간 배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날 그 배에서 5명의 크리스마스 베이비들이 태어났습니다. 당황한 선원들은 한국말을 몰라 그냥 ‘김치1, 2, 3, 4, 5’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 d. [흥남철수작전]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 그리고 피난민을 흥남부두에서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입니다. 영화에서는 이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젊은 통역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시가를 물고 있는 미군 장군에게 울먹이며 간청을 합니다. . 3. [현봉학] 그 통역관은 바로 실재 인물로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 박사(1922~2007)이고 그 옆의 장군은 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 Almond, 1892~1979)소장입니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1916년부터 1953년에 걸쳐 1차,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한 백전노장으로 맥아더 사령관의 측근이었습니다. . 4. [에드워드 알몬드] 현봉학 박사는 함흥고보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1947년부터 2년간 미국 리치먼드의 버지니아주립 의과대학(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 - Medical College of Virginia)에서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하고 1950년 귀국해서 6.25가 발발하자 미 해병대 문관 및 10군단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다가 유창한 영어로 알몬드 장군의 눈에 띄었고,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 버지니아 루레이(Luray, Virginia)에서 태어나 버지니아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를 졸업한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과 '버지니아'라는 매개체로 더 친하게 되었습니다. . 제 장인어른이 함흥고보를 졸업하셨으니 현봉학 박사는 제 장인어른의 4년 후배가 되기도 합니다. . 5. [레너드 라루, 마리누스 수사]; e.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허락을 했어도 배의 선장이 협조하지 않으면 이 미간인 철수작전은 불가능했거나 피난민 숫자가 현저하게 적었을 겁니다.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2001)였습니다. 레너드 라루는 전쟁 당시 37세였는데 전쟁 후 40세에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입소하여 수사가 되었습니다. 2001년 87세를 일기로 마리누스 수사(Brother Marinus)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 마리누스 수사가 선장 레너드 라루로 최악의 조건에서 1만 4천여 명을 구조한 메리디스 빅토리호를, 사람들이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라고 불렀습니다. 피난민들의 생명선이었던 이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 되는 배 중의 하나이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용감한 선박' 표창을 받았습니다. 아쉽게도 1971년 퇴역하여 1993에 중국에 고철로 팔려가 해체되어 자취 없이 사라졌습니다. . 레너드 라루는 죽을 때까지 흥남철수와 관련된 말은 일체 하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 “나는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그 적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영혼도 다치지 않고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크리스마스 무렵, 한국 해안의 고난에 찬 바닷속에, 하느님의 손이 내 뱃전을 인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 6. [제임스 로버트 러니] 선장 레너드 라루의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흥남철수작전 당시 22세였던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가 분도 수도원을 찾아가서 활약상을 한국인들에게 알리자고 하면, 마리누스 수사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는데 뭘 그러느냐!"고 번번이 거절하는 바람에 선장 레너드 라루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뻔 했습니다. . f.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한국은 성당이며 수도원이 번성하고, 천주교 신자 수가 늘고, 수많은 대학과 병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장상을 배출하는 데 반해 미국의 성당과 수도원은 신자 수가 급감하고 청원 자도 없어 2001년 10월 14일 마리누스 수사의 선종과 함께 폐쇄위기에 처했습니다. 2001년초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은 독일 본원에 수도원 폐쇄신청을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회'에서 인수신청을 하여 마리누스 수사 선종 2일전 인수결정이 확정되었습니다. . 마리누스 수사가 죽고 난 뒤, 타임즈지에 마리누스 수사가 선장으로 메리디스 빅토리호 화물선으로 수많은 피난민을 구했던 기사가 실리고, 한국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회'에서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을 인수하면서 폐쇄위기에 처했던 수도원의 주일 미사가 부활하고, 한국인의 손으로 무, 배추, 토마토를 길러 치즈버거, 수프와 함께 김치가 제공되고 여러 가지 추모사업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인 곽재구, 장인어른 김기선 어른, 현봉학 박사,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레너드 라루 선장인 마리누스 수사,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 그리고 재미사업가 안재철 씨, 이 이야기를 이끈 시 '화진포', 영화 '국제시장', 기적의 배 '메리디스 빅토리호', 역사적 사건 '흥남철수작전' 그리고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을 인수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까지 우리는 감동적인 기적 속에서 살아가는 걸 망각하고 있습니다.
. 7. [안재철] 이 모든 내용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기적은 우연하게 마리누스 수사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미국 사업가 안재철 씨가 그 장례미사에서 함흥철수당시 일등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 제독을 만나 사연을 듣고 기네스북 등제, 서적출판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 현봉학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대구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국 해병대의 문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이후 부대의 이동에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흥남 철수 작전에 관여했다. 작전 당시인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당시 피난민이 함께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봉학은 자신이 승선하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피난민들을 태워 구출해 달라 간곡하게 요청했고 이에 탄복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2천명이 정원인 배에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으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으며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하였고 승선한 젊은이들 중 일부는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려고도 하였다. 하루 뒤인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하는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하선시켰다. 이틀간의 철수 과정 중 피난민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선박 구석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틈세에서 서로의 웅크린 몸에 의지하며 버텼던 지옥같은 시간이였지만 '모세의 기적' 처럼 홍해를 건너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였다고도 회고한다. 이 철수 작전 이후 그는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었다. 이틀간의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한장면으로 역사적 사실관계는 "김백일 1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현봉학 박사는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버지니아 주도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 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 (Medical College of Virginia)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의대 장로교메디칼센터 (Penn Presbyterian Medical Center)에서 레지던트를 마쳤으며,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의 병리전문의로 일했고, 1962년부터 1987년까지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또 버지니아 의대, 콜럼비아 내과.외과의대, 필라델피아의 토머스 제퍼슨 의과대,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2007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문필가 피터 현과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현시학 제독이 현 선생의 동생이다. 그리고 본인도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에드워드 M. 알몬드(Edward Mallory "Ned" Almond, 1892년 12월 12일 ~ 1979년 6월 11일)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육군의 10(X) 군단의 군단 사령관이다.


에드워드 M. 알몬드는 버지니아 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를 1915년에 졸업을 했다. 1916년 육군 보병 장교가 되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마지막 달에 미국 제4보병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복무를 하였다. 1930년 그는 미군 캔자스 주 포트 리벤워드에 있는 지휘관 간부 학교를 졸업했다. 필리핀 복무를 마친 후에 1934년 미국 육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미군 참모본부 정보부에서 일을 했다. 1938년 10월에 소장으로 진급을 하였고, 미국 해군 전쟁 대학을 1940년에 졸업했다. 한국전쟁에서 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철수에서 작전계획에 없던 민간인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


에드워드 M. 알몬드 장군의 주요 참전내용: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에드워드 M. 알몬드 장군의 주요 서훈내역: 수훈복무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 퍼플 하트


레너드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라루 선장은 1914년 1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작전 참가 업무가 끝났고,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분도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14일,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항해를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너스 수사가 몸담았던 성 바오로 수도원은 마리너스 수사가 숨지기 이틀전 한국의 왜관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후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돼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어-맥코맥사(Moore-McCormack Lines)의 화물선이다. 길이 455피트(약 138.7m). 7천600t.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있었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선 이 배의 철수 작전의 전말을 담은 <Ship of Miracles>(저자 Bill Gilbert, 출판사 Triumph Books)라는 책이 출판됐다. 이 책은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됐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1년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우연히 참석했던 재미동포 기업가 안재철씨는 라루 선장의 삶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이후 흥남철수 관련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냈다. 안씨는 철수 작전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씨와 함께 기네스 기록 등재를 신청했고,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2001)였습니다. 레너드 라루는 전쟁 당시 37세였는데 전쟁 후 40세에 '뉴저지 뉴턴의 베네딕도회의 성 분도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입소하여 수사가 되었습니다. 2001년 87세를 일기로 마리누스 수사(Brother Marinus)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일등항해사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는 1927년 12월 15일 뉴욕 브롱스에서 출생하여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1950년 6월 뉴욕 알프레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 진학을 목적으로 학비를 모으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취업하여 레너드 라루 선장을 도와 22살의 나이로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연하게 수도자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의 장례미사에서 만난 미국계 한인사업가 안재철씨를 만나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민간 배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하여 등제하였다. 이후 1954년 뉴욕 코넬대 로스쿨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계속해서 예비역으로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제독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미군 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러니는 2004년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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