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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줄 요약.
1. 6.25전쟁때 중국의 인해전술에 당한게 아니다.
2. 일본군 육사출신 지휘관 한명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의 38선까지 밀렸다. (누구처럼 사병들을 남겨두고 도망침)
3. 이일을 계기로 전시작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4. 그 지휘관은 훗날 박정희때 국방장관까지 했다.
5. 훗날 노무현정권 전작권 환수때, 반대 대표자였다. (그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앗긴걸, 본인 스스로 반대함)
6. 그는 어떠한 심판도 받지 않고, 늙어서 죽었고,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7. 그의 이름은 "유재흥"이다.
8. 탈북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 면담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유재홍에 대한 변명] 현리전투의 패장 유재흥 관련 괴담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by 無名人
이글은 2011년 12월 "유용원의 군사세계" 홈페이지에서 있었던 현리전투의 패전에 있어서 유재흥 장군의 역활에 대한 논쟁을 정리했던 글이고 2012년 『디펜스타임즈』에 기고되었던 글이다. 뭐, 원고료도 받지 않은 글이니 디펜스타임즈 측에서 저작권을 내세우고 싶으시다면 연락 주시기를....
먼저, 저는 유재흥 장군이 불세출의 전쟁영웅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현리전투의 패전에 있어 책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분명 군단장으로서 군단이 해체되고 군단 병력의 거의 30%에 이르는 장병의 손실과 거의 70%에 가까운 중장비 손실, 그리고 전선의 후퇴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이 현리전투의 패인에 대한 책임자이며, 적전도망을 했다던지, 후방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다던지, 전장 상황 판단을 잘못 했었다던지, 병력이 40%도 안남기고 전멸했다던지 하는 괴담을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비난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는 게 요지입니다.
또다른 유재흥 장군에 대한 비난 중 하나인 일본 육사 출신의 친일파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지면의 한계와 근본적인 주제의 한정에 있어서 다소 벗어나기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림 1. 현리전투 작전지역 및 피아부대 배치>
현리전투의 본질 - 근본적인 후방차단과 포위의 책임은 누구에게?
우선, 우리는 현리 전투 자체에 대해 본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리 철수는 3군단 자체의 실책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좌인접인 미군 제 10군단에 배속되었던 국군 7사단이 하룻밤만에 예비 연대만 남기고 실종되어 버리면서, 3군단의 측면이 노출되고 보급로가 차단되어 실시한 철수가 예하 지휘관들의 미숙과 장병들의 공포로 인해서 일순간에 건제가 붕괴되면서 발생한 겁니다. 국군 7사단은 1시간 반에 걸친 중공군의 사전준비 포격에 통신선이 마비되면서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되고, 순식간에 전선이 붕괴되면서 상급부대인 미제 10군단에 전선 돌파조차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주장 근거 부족]
중공군은 이른바 ‘일점집중(一點集中)’ 전법을 사용했습니다. 7사단 전면에만 중공군 6개 사단이 덮쳤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저 무기 없이 사람 머릿수로만 밀고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한곳에 집중적으로 소나기처럼 병력과 화력을 퍼붓는 것입니다. 당하는 아군 입장에서 보면 중공군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군대로 보입니다. 유령 같기도 하고, 마치 허깨비를 보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들면서, 7사단의 국군들은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주장 근거 부족]
7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이후에 중공군은 단 하룻밤만에 험난한 산악지대를 25km를 돌파해서 오마치 고개까지 치고 내려왔습니다. 통신망이 마비되고 건제가 무너진 7사단은 사단 사령부가 전투가 시작된 지 5시간이 지나도록 전선이 뚫린 지도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3군단에서는 정상적인 적의 진군속도라면 공격을 개시한 다음 날인 5월 17일 오후쯤 돼야 적이 오마치 고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봤지만, 중공군 제60사단 178연대는 17일 아침 일찍 이미 고개를 점령한 것입니다. 기동성을 최대한 발휘해 뒤로 처지는 국군을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옴으로써 아군의 판단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물론 이것은 유재흥 3군단장의 뼈아픈 적정판단 실수입니다.) 작전요도를 보셔서도 아시겠지만, 중공군이 돌파해서 내려온 경로나, 오마치 고개나 모두 미제10군단의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그림 2. 소양강을 강행 돌파중인 중공군 - 중앙일보, 중국해방군화보사>
<그림 3. 현리작전 개요>
오마치 고개의 무주공산화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유재흥 장군은 이미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있기 몇일 전에 중공군 포로 2명을 비밀리에 육본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보내서 5월 공세가 현리로 집중된다는 것을 보고했다고 합니다.1 이미 중공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유재흥 장군은 1949년 5월부터 8개월 동안 6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현리에 주둔한 예하 중대를 두세번 방문하면서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장 근거 부족]
그래서, 오마치 고개와 부근 대암산에 군단예비인 9사단 29연대를 배치했었다고 합니다. 알몬드 10군단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그림 1>에서 보이듯이, 오마치 고개와 대암산이 미군 작전구역이며, 작전구역 침해라며 빼라고 했다고 합니다. 5일간에 걸쳐 아무리 설명해도, 철수를 계속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유재흥 장군은 배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도 29연대 2대대는 고개 정상에 그대로 남겨 놓았지만, 이번에는 미제8군에서 군단 고문관을 통해 오마치 고개에 배치한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와 5월 11일, 공세 3일전에 철수시켰습니다.
그리고는 5월 공세의 시작과 함께, 오마치 고개가 피탈되었던 겁니다.(알몬드 장군은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서 상급부대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고 합니다.).
상황 파악의 곤란
상급부대도 모르는 상황을 인접부대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당시 3군단은 지휘관들이 무능해서 안당해도 될 패배를 당한 게 전혀 아닙니다. 2개 사단으로 구성된 3군단은 단일 보급로에 의존하면서, 주저항선에서만도 4개 사단의 중공군을 맞아 싸우고 있었고, 좌인접 국군 7사단이 실종되면서 노출된 측면으로도 중공군 2개 사단이 쏟아져 들어와 도합 6개 사단의 중공군에게 2면 포위가 되고 주보급로가 차단되어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휘관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실 5월 16일 저녁 유재흥 장군은 “7사단이 붕괴된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육군전방지휘소에 군단의 철수 의사를 타진했으나, “계속 현진지를 고수하라”는 답변을 들었고, 미제10군단에 전황을 질의하였을 때도,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은 건재하다”라는 잘못된 답변을 받고는 계속 방어를 명령했던 겁니다.2 이후 동일 밤 10시경에는 9사단 이용문 부사단장(일본육사 출신, 당시 36세)의 상황보고를 받고는 일단 전선 방어를 위해 포병은 빼지말고, 공병중장비를 빼라고 3사단과 9사단에 지시하여, 공병 중장비는 빼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재흥 장군이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하 부대로 하여금 오마치고개를 선점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날 밤 중대병력정도만 있었어도 오마치 고개는 차단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찍이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전장의 안개”3 즉,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적의 공격과 규모 공격방향에서 실시되었지만, 그렇게 쉽게 7사단이 붕괴될지, 10군단에서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을 줄 누가 짐작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10군단장과 8군이 전투지경선 침범을 완강하게 항의하는 10군단 예하의 오마치 고개를 무단으로 3군단이 확보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지 않을까요? [뭐라고? 불확실성의 영역 이라고???]
군단장만 잘못한 것인가?
그 과정에서 오마치고개 탈환이 시도조차 되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철수 과정에서 건제가 붕괴되면서 많은 인명피해를 입기는 했는데 이는 예하 지휘관 및 밑으로는 사병들에게까지 모두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뭐라고? 쫄병까지 책임이 있다고???]
당시 한국군은, 초전의 방어전과 1.4후퇴를 거치면서 초급장교단이 대규모로 희생된 다음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래의 종합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먹물이 들어있으면 속성으로 임관시키는 속성 소위들이 기본적인 소양마저도 못갖추고 배치되던 당시였습니다. 또한 중견장교들조차도 그들의 지휘관인 군단장이나 사단장과 나이차이가 안나는 사람들이 마구 진급하여 대대/연대/사단을 지휘하던 실정이었습니다. 사병들 또한, 기본적인 사격훈련도 제대로 못받고 전방으로 배속되던 사정이었습니다. 참모총장인 정일권 장군이 겨우 34살, 그 밑의 군단장이나 사단장들도 거의 대부분 총장과 나이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4 [나이가 어려도, 속성과정을 거처도 지휘능력을 나름데로 검증하여 지휘관을 뽑는거지. 괴변이라고!]
현재의 한국군으로 따지면, 겨우 대위나 소령. 중대장을 마치고, 대대 참모를 수행하거나, 고등군사반 교육을 겨우 마쳤을 나이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작전의 핵심이었던 9사단의 최석 준장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최석 장군은 일선 지휘 경험이 거의 없던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유재흥 군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행정을 주로 맡다가 ‘하루아침에 실전 지휘관 자리에 오른’ 경우라고 합니다. 유일한 퇴로가 적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렇게 실전 경험이 없던 지휘관이 작전을 지휘한다는 것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의 작전 전개과정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납니다. 당시 대령으로 9사단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던, 박전희 대통령은 나중에 유재흥 군단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속성과정을 거처도 지휘능력을 나름데로 검증하여 지휘관을 뽑는거지. 괴변이라고!]
“현리 철수 때 9사단장 최석 장군은 기백이 있었으나 실전 경험이 없어서인지 허점이 드러나 보였다. 7사단장 김형일 장군은 적의 공세 때마다 뚫려 인접 부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적이 공격하자마자 돌파돼 우리 사단의 통신을 거쳐야 지휘할 수 있었다.”라고요. [나이가 어려도, 속성과정을 거처도 지휘능력을 나름데로 검증하여 지휘관을 뽑는거지. 괴변이라고!]
또다른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둠이 깔릴 무렵 9사단장은 18연대 지휘소에 찾아 와 이번 작전에 자신 있는가하고 물었고 연대장은 9사단장이 돌파작전에 회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9사단장은 용포 주변의 교전 상황으로 보아 야간 공격으로 10 Km의 목표지대를 탈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단장을 수행하던 군수참모 김재춘 중령은 후일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이 부대 지휘를 포기하고 방태산으로 올라갔다며 그 때 최석 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9사단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리던 3사단 18연대는 공격 기미가 없고 30연대가 매화동 골짜기에서 방태산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단장에게 보고하였다.
3사단장은 방태산, 용포, 상남리 북방고지를 연결하는 삼각지형에서 우군 반격시까지 全面방어를 실시하자는 고문관 에머리치 대령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18일 03:30에 방태산 경유 창촌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많은 부대가 임의로 철수를 개시하고 있었고 차량을 포함한 주요 장비는 각급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파괴되고 있었다.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어내고 사병들은 화기나 무전기를 내버리기도 하였다. 사병들은 누구의 지휘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장교들 또한 이러한 병사들을 지휘하려 하지 않았다. 상하부대의 통신은 완전히 두절되고 지휘체계마저 완전히 무너져 오합지졸로 전락하였으며 탈주로인 방태산, 창촌, 광원리, 을수재에서 굶주림과 중공군, 북괴군의 매복 추격 등으로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5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최석도 빙신 찌다라고???]
이러한 가운데, 사단장/군단장의 실책과 지휘 잘못, 중간 간부들의 허위보고와 판단 잘못, 포위망 속의 저하된 사기와 군기가 일시에 건재하던 군단을 붕괴시킨 것은 아닐까요? [지랄한다 정말!]
유재흥 장군은 제대로 된 지시도 못했는가?
당시 유재흥장군은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 후 개통된 병참선을 통해 철수한다는 상식적인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겠지요. 다만 육군대학의 논평에서는 당시 유재흥 장군이 2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서 공격한다는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기계획 방안을 승인한 것에 대하여, 그보다는 한개 사단의 연대들이 반격을 맡는 것이 지휘통제를 위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합니다. 하지만, 반격의 선봉에 서기로 했던 9사단 예하 대대들이 공격 명령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1개 대대는 아예 실종, 1개 대대는 무단 철수하다가 3사단장에게 발각됨) 선임 사단장인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이 산악 경로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그 와중에 중장비는 상실 및 파괴, 부대 건제가 붕괴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니 오마치 고개 개통에 실패했다는 조건 하에서는 건제 붕괴를 군단장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다들 빙신 찌다라고???]
다른 대안으로서 현리를 중심으로 한 사주 방어 방안이 있고 실제 미 군사고문관이 김종오 장군한테 이를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현리 분지를 둘러싼 고지군이 이미 중공군에게 피탈되기 시작하였고 또 사주방어를 위해 병력도 충분하지 않았고 포위 섬멸될 가능성을 염려하여 김종오 장군이 그 방안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사후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면야 그 방안이 더 나아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정확한 정보가 결여되었던 지휘관의 판단을 후대에서 뭐라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사주방어 시에 건제 붕괴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었을 것이고 말입니다. 당시, 유재흥 장군에게는 군단장으로서 마땅히 더 나은 다른 지휘조치 옵션이 없었던 셈 입니다. 오마치 고개 탈환 작전 지휘통제와 관련해서 군단장이 포위망 내에 남아있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육군대학 쪽에서는 포위망 안에 남더라도 실익이 없었을 것이고 군단장이 사령부에서 지원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실제로 그 역할을 했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으로 논평하고 있습니다.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김종오도 빙신 찌다라고???]
알몬드 장군의 책임은 없는가?
체계적으로 훈련된 미군마저도 인디언 태형과 발지 전투에서 보듯이, 공포와 혼돈으로 인해 건제과 붕괴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저는 전반적인 정황을 따져보면 그보다는 사령관으로서 10군단장인 알몬드장군에게 결과 책임을 물어야 할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가 지형적 특성에 따른 전투지경선이 아닌 행정편의적 전투지경선을 고집했으며, 이에 따라 유재흥 장군의 오마치 고개 병력 배치를 방해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후방보급선이 차단된 이상, 유재흥 장군이 아니라 누가 군단장이었더라도 장거리 철수와 인명 및 장비 피해라는 큰 흐름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인명 및 장비 피해와 이후 작전에 끼친 영향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군 중에서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조건하에서 성공적인 농성전을 벌일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3사단장 김종오 장군마저도, 예하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고, 건제가 붕괴되자, 계급장 떼고 후퇴하지 않았습니까?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알몬드도 빙신 찌다라고???]
유재흥 장군 관련 주장은 다 사실인가?
1. 3군단의 전멸
많은 현리전투 괴담에서 병력이 40%만 수습되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유기된 장비는 전부 중공군이 고스란히 가져서 아군을 죽이는데 쓰였다 등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를 은근슬쩍 집어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열흘 후에 병력을 70%까지 수습했으며, 대부분의 유기된 장비는 스스로 파괴했거나 유엔공군이 공습으로 파괴했고, 30%는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주장 근거 부족]
2. 백전백패의 패장?
유재흥 장군이 백전백패를 했다고 주장하는 괴담들에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개전초기 7사단의 의정부 축선에서의 패배와 50년 12월의 덕천전투와 이글에서 다루는 현리전투입니다.
그중 사단급 전투인 개전초기의 7사단의 경우 개전 3일만에 미아리 고개를 돌파당하여, 적 전차가 서울 시내로 진입, 수도 서울이 실함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며, 한강 도하시 병력이 500명까지 줄어드는 비참한 경험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안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유재흥 장군이 7사단장으로 보임된 것은 개전에서 불과 15일밖에 안남은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의정부 전투의 패배에는,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불과 15일 전까지 7사단장을 맡고 있던 이준식 장군(중국군 소장, 광복군 대좌 출신, 51세)과, 이후 육본 지휘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2사단장 이형근 장군(일본 육사 출신, 당시 31세)의 책임도 큽니다. 이준식 장군은 1년 가까이 사단을 지휘하면서도 제대로 된 방어 시설을 구축하지 않았고, 또한 방어작전에 필요했던 기동계획/화력계획도 짜 놓지 않았던 책임이 있습니다.6 이형근 장군의 경우 축석령 전투 당시 7사단의 배후를 적에게 그냥 내주었고, 7사단과의 반격시에도 협의 없이 임의로 공격을 중단하는 등 가뜩이나 적 주공 축선이라 어려운 전선을 무너뜨리는데 일부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당시 7사단의 방어 전면은 북한군의 전략적 주공이었습니다. 당시 동원된 북한군은 제 1군단 예하의 4사단, 3사단, 105전차여단 예하의 107, 109 2개 전차연대였습니다. 하지만, 방자인 7사단은 최초 감편된 2개 연대뿐이었습니다.
또한, 지형도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 산맥과 천보 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연계와 종심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습니다.
이후, 대전에서 중장비도 없이 축차 전개된 2사단과 1개 경찰대대를 포함, 총 15개 대대의 지원병력이 도착했지만,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더욱이 탄약을 위시한 각종 보급지원이 뒤따르지 못했으며, 유·무선통신망이 구성되지 않아 횡적 연락과 협조는 고사하고 상하급 제대간에도 통신이 소통되지 않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제대로 된 대전차무기도 없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던 적을 맞이하여 3일간을 버텨낸 것이 오히려 잘한 것이 아닙니까? 한강 이남으로의 철수 후 잔여 병력 700여명만 하더라도 한강철교가 조기에 폭파되지만 않았더라면 이러한 결과로만 남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면 유재흥 장군이 전임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6사단의 춘천전투에서의 선방에는 그의 숨어있는 노고가 있습니다.7
또한, 그가 군단장 직책으로서 군단급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3번 가량 있습니다. 태극무공훈장과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오브 메리트 수훈 사유인 영천 전투 승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춘계공세 직전의 아군 반격시에는 예하의 9사단 30연대가 매봉/한봉산에서 세운 전공으로 대대장병들이 1계급씩 특진하기도 했었습니다.
유재흥 장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천전투 승리와 수도고지 전투에서의 공로조차도 “유재흥장군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인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갖다붙일 것 같으면 유재흥 장군이 비난받는 덕천 패전과 현리 패전도 중공군의 전략적 공격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일 뿐 군단장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죠. 당시 작전 지도를 보면 덕천 전투와 현리 전투는 군단장에 나폴레옹을 갖다놔도 군단들이 궤멸될 수밖에 없는 전황 아닐까요? 50년말의 덕천 전투에서도 전황이 급박한데 군단 예비인 6사단을 투입 안하고 놀다가 망했다고 일부에서는 주장하는데 당시 6사단은 이미 한 번 포위궤멸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실상 1개 연대 정도의 전투력 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상황조치를 위해 6사단을 투입했었습니다. 다만 중공군의 전략적 주공을 막기에 중과부적이었을 뿐이죠. 당시 6사단장은 장도영 준장이었습니다. 이때, 패전을 했던 장도영준장은 용문산에서는 빛나는 수훈을 세웠습니다. 패전을 했다고 해서 다 처벌한다고 하면 용문산 전투는 누가 승리로 이끌었겠습니까?
유재흥 장군이 개전초에 7사단장으로 의정부 전투에서 패배할 때는 해당 지역이 북한군 전략적 주공이었고, 군단장으로 2번 패배하였다는 덕천전투와 현리전투도 모두 중공군의 전략적 주공이었습니다. 적의 전략적 주공에 대한 대응은 아군 또한, 전략적 수준에서 따져야지 적이 주공을 집중한 해당지역 전술/작전 지휘관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전략적 공격을 성공시킨 지휘관을 칭찬하고, 전략적 방어를 실패한 지휘관을 비판하지, 당시 전면에 있었던 방어측의 전술 지휘관만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략적 방책이 이미 실패한 상태에서 적에게 돌파를 허용한 것이 일개 전술지휘관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적의 전략적 주공에 맞서서 패전했다고 해서, 전술적 지휘관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면, 고금을 통해 거의 대다수의 명장들이 그들의 위명을 떨치기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2차대전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낫질작전에 대한 책임으로 아르덴 산림을 방어하고 있던 프랑스 10군단장,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해변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84군단장, 발지전투의 초기 독일군에게 전선을 돌파당한 미군 5군단장이 극형을 받았어야 할까요?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다들 빙신 찌다라고???]
3. 유재흥장군은 적전도망을 하였는가?
또 다른 괴담 중 하나가 유재흥 군단장이 보급로가 차단되자 아무 지휘조치도 하지 않고 비행기 타고 혼자 도망쳤다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이미 포위망이 완성된 17일 오후 1시 포위망 밖인 하진부리에 있는 사령부에서 일부러 포위망 내인 현리로 비행기 타고 들어가서 예하 사단장들과 대책을 수립한 후 군단 사령부로 복귀해서 철수 작전에 필요한 후방 지원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유재흥 장군이 비행기 타고 가는걸 보고 병사들이 따라서 도주한 것도 아니고 철수작전 실행 과정에서 조직이 와해된 것이므로 철수간 부대 와해는 사단장 이하 일선 지휘관들의 책임과 그의 책임이 같이 있는 것이지, 누구 한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또한,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되자, 오마치에서 유재흥은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엉터리 입니다. 유재흥 장군은 51년 5월 17일에 현리로 경비행기로 도착해서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급간부들이나 사병들의 관점에서는 “비행기타고 도망갔다”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일 뿐이었습니다. 일단 위키의 내용중 오류는 당시 백선엽 장군은 참모총장이 아닌 1군단장이었고,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서 현장 지휘관들과 회의를 한 것은 5월 17일. 위키에 언급된 작전회의는 5월 21일에 백선엽 장군과 로저스 대령이 비행기편으로 대관령 서쪽 용평 국군 3군단 간이 활주로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미 8군에 호출받아 간 것입니다.(전사편찬연구소의 현리전투에서는 5월 20일이라고 나옵니다.). 17일에 현리를 떠난 유재흥 장군이 5월 20일까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유장군은 하진부리에서 후퇴하는 군단 예하 병력들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7일 포위망속으로 날아가서도 현장 사단장들과 고문관들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저녁 무렵에는 현리로 미군수송기 4대를 이용 105미리 포탄과 보급물자들을 공중투하토록 조치하였고, 18일부터는 군단 전방지휘소를 삼거리 남쪽으로 이동하고 부군단장 강영훈 준장과 함께 교대로 각사단의 병력을 수습하는 한편, 경비행기를 이용, 낙오병들에 대해 집결지 안내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5월 21일의 작전회의에 대해, 또다른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는 밴플리트 장군과 미제3사단장 유진 라이딩스 장군만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약 10여 분 만에 작전회의는 끝이 났으며, 밴플리트 장군은 돌아갔고, 백선엽장군도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작전을 짜는 데 골몰했다고만 언급이 될 뿐, 유재흥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를 시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붙여넣기 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군단장과 사단장의 근본적인 임무 구분에 대한 몰이해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장은 최소 규모의 제병과 합동부대인 사단을 지휘하여 상급부대인 야전군의 작전지휘를 받아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행정 지휘관에 가까운 군단장은 예하 부대들의 원할한 작전 수행을 위해 후방에서 지원부대들을 지휘하고 전방에 대한 지원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유사한 사례로는 장진호에서 미제 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도 배속 군단장이었던 10군단의 알몬드 장군은 사단장에게 철수를 지시한 후 필요한 권한을 위임하고,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여 군단에서 공중지원, 군수지원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나 연대급 작전 목표인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두명 군단장 1명이 달라붙어 감내라 대추내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주장 근거 부족]
4. 밴플리트 앞에서 유재흥은 바보짓을 했는가?
또다른 비난 중 하나가 August님의 블로그에 게시된 현리전투 관련 내용 중에 《전선 붕괴에 놀라 헬기를 타고 현지까지 급거 날아 온 밴플리트가 유재흥 3군단장을 면담하면서 하였던 대화가 전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라고 질문하자, 이에 유재흥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신의 예하 2개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라고 다그쳤다. 이에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라고 답변하고 밴 플리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라는 것입니다.8
솔직히, 위의 일화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7사단장 김형일 장군(당시 29세)은 전투 개시 후 5시간이 지나도록 예하 부대들의 건재 붕괴 사실도 인지 못하고 있어서 인접한 3군단 예하 부대들에 중공군의 위치를 물어볼 정도였고, 17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는 전방 사단들과의 통신자체가 두절되어 버렸으며,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기도 내팽겨치고 계급장도 떼어 버린 채 소수의 병력만 대동하고 방대산을 통해 후퇴 중이었고,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지휘부가 붕괴된 채 산속을 통해 후퇴 중이었는데, 후방의 하진부리 지휘소에 있는 군단장이 어떻게 예하 사단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밴플리트 장군의 직속 부하인 알몬드 장군의 10군단 참모부조차 16일과 17일 예하의 한국군 7사단의 위치와 상태도 모르고 인접 군단에 허위 통보를 할 정도였는데, 그에게만 비난이 몰아닥친다는 것은 그가 잘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실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와 운두령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미 중장비들의 파괴와 유기를 명령한 상태에서 거의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데 허위보고를 하겠습니까?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도 비난의 대상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상황이 저런데 허위 보고를 했어야 한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주장 근거 부족]
5. 유재흥 장군이 후에 전사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조작?
유재흥 장군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장기판 훈수는 누구나 고수이지만, 실제 게임은 다르듯, 부정확한 사후 지식 가지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거 아닐까요? 육본 한국전쟁사 웹의 현리 전투 부분(그래도 팩트가 가장 잘 정리된 소스이기 때문)과 웹상에 많은 육군대학에서 한 논평을 한번 일독하시기를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육군대학 논평은 개인을 인신공격하는게 목적이 아니고 작전 지휘 실무 측면에서 교훈을 도출하기 위한 겁니다. 공간전사와 그에 관련된 저술과, 당시 인사들의 회고록을 교차 비교해야지요. 회고록은 팩트와 주관이 섞인 것이니 걸러서 봐야겠지요. 이러한 공간 전사들은 어느 누구가 압력을 가한다고 해서 조작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현리 전투만 하더라도, 패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까지 역임했습니다. 이분도 학병출신으로 일본군 초급장교로 복무했던 분입니다. 9사단장 최석 장군도(제가 보기에 건재 붕괴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학병 출신으로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태극무공훈장(!)까지 받고, 육군중장으로 전역했습니다. 유재흥 장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던 국방부 장관은 1971년에 재직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것은 초판이 1988년, 두번째가 1991년입니다. 1991년에 그가 성우회 회장이 되었으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요? 그 또한 넌센스입니다. 성우회 회장이 전사편찬위원회 연구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나, 연구원들이 그런 것에 굴복해서 曲學阿世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친목단체에 불과한 성우회 회장이, 그것도 이미 1971년에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여 이미 20년이나 지나 군내에 자신의 휘하는 아무도 안남은 끈떨어진 성우회장 말을 누가 듣는단 말입니까?
또한, 분명한 것은, 유재흥=원균 이런 식으로 비하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현리전투 관련 글들은 왜곡 날조된 부분들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어떤 견해나 평가의 기초로 쓰여서는 안되는 잡문들입니다. 일단 구체적인 팩트를 파악하는게 먼저고, 그리고 나서 뒤에 유재흥이 친일파던, 무능한 소위 똥별이던 하는 생각이 들어야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주장 근거 부족]
6. 유재흥은 두고두고 승승장구?
그리고 하나 더, 여러분에게야 흡족하지 않으시겠지만, 유재흥 장군이 군단을 말아먹으면서 아무 처벌도 안받고 일선 군단장직을 계속 유지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진급하고 요직을 거친 것도 사실입니다. 입맛 쓸쓸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최석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재흥 장군의 경우, 덕천 전투와 현리 전투 이후에 지휘권 박탈당하고 육본으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즉 패전 책임에 대해 징계를 받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이나 다시 군단장 직으로 나간건 잘한다고 불려간 것이나 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돌려막기로 보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당시 국군의 장군들의 나이를 보십시요. 김홍일 장군이나 이종찬 장군 정도를 빼면 다들 30대의 약관이고 그나마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고 지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홍일 장군의 경우, 영어 실력이 일천했고, 미군사고문단에서도 그의 중국국부군 경력을 그다지 좋게 쳐주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과 이후의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그들이 본 중국국부군은 그야말로 당나라 군대였으니까요. 그 자신도 새파랗게 젊은 미군사고문이 감내라 대추내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51년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표를 내고 전역을 했습니다. 그래도 미군사고문들이 높게 쳐주었던 것은 자신들과 2차대전에서 대등하게 맞싸웠던 일본군 출신들이었습니다. 그중 돋보이는 사람이 이종찬 장군이었으나 이분 또한 부산 정치파동당시 친위쿠데타를 거절하여 한직으로 떠돌다가 예편하였으니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최석도 빙신 찌다라고???]
7.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중위와의 일체의 면담요청을 죽을 때까지 거부?
괴담중 다른 하나는 “돌아온 사자”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가 유재흥 장군을 만나고자 했으나 유재흥 장군이 죽을 때까지 일체의 면담요청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재흥 장군과 조창호 중위는 최소한 2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번은 2000년 8월 21일 재향군인회가 주최한 국군포로 송환 촉구 집회에서 참전원로 대표 12명중 일원으로 집회 후 통일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방문했던 때이고,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008211918321&code=910100, <국군포로 1만9천명 추정>, 경향신문, 2000. 8. 21.같은 소식을 다룬 재향군인회의 2001년 9월 3일 보도자료 : "시위 후에는 이상훈 회장을 비롯한 백선엽, 유재흥, 김영관, 공정식, 조창호 등 참전원로 12명은 통일부 장관 및 국방부 장관을 각각 방문하고 『국군포로 송환문제는 당사자와 가족들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70만 국군장병들의 전투력과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은 물론 국가위난 극복을 위한 호국정신 함양과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조속한 시일내에 해결될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을 촉구했다."' height=14 valign="top"> 그 다음은 2002년 2월 21일로 동일한 목적의 집회 후 다시 통일부, 국방부 장관을 방문했던 때입니다.10, 중앙일보, 2002.02.23.' height=14 valign="top">
참전원로 대표로 장관 면담을 하던 분들이 한번도 안 만났다는 게 말이 됩니까? 두 번 다 유재흥 장군과 조창호 중위는 군원로 대표로 동일 시간대에 동일 장소에서 장관들을 면담했습니다. 통상적인 면담 절차로 봤을 때, 면담 전에 대표들끼리 사전의견 조율이 있었을 것이고, 접견실에서의 간단한 다과와 식사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식사는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대표로 만나면서 서로를 외면하기는 인사하기보다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위키백과의 <유재흥>편과 유재흥 장군 사망을 다룬 한겨레신문 그밖의 숱한 인터넷 홈페이지와 블로그 등에 게시되어 있는 <19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조 소위가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의 만남을 거부하였다.>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겁니다. [주장 근거 부족]
패전지장은 국립묘지에 안장불가?
사령관으로서 패전했으니까 총살했어야 한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지만 그거야말로 일본 황군식 사고방식일 뿐이고, 아마 그랬다면 6.25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 중 총살 안 당했을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또한, 그가 패전지장이라고 해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이 안된다하면, 모든 패전 군인은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안되는 것입니까?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호국영령들도 그들이 패전지장이면 마찬가지로 국립묘지에 안장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국립묘지에 호국영령들을 모시는 이유는 그들이 적에게 맞서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를 위해 국난의 시기에 위국헌신했고, 그들이 그들의 청춘과 열정을 바쳐 국가에 충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군인이라도 패전을 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이 거부된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패전한 군인은 군법과 국법에 따라 평가되고 심판됩니다. 그가 범죄행위를 저질렀거나 명백한 직무유기 또는 적국과의 내통의 혐의가 있다면 군법에 의해 다루어집니다.
일반 국민도 다른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했을 때, 과실이나 고의냐 혹은 정당바위냐의 여부에 따라 그 죄의 유무와 값이 달라집니다.
유재흥이 패전지장으로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마땅하지만, 그가 국가에 바친 헌신까지 매도되서는 곤란할 것이며, 그가 행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덧붙여져서 비난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패군지장은 그 어떠한 말로도 자신의 지휘 결과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전 지휘 결과에 대해 누군가의 비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천전투의 승리로 태극무공훈장을 서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하였다고 하고, 적전도주한 적도 없는데, 도주했다고 하고, 21일 용평에서 열린 작전회의에는 아예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17일 현리에서 도망친 이후 21일 작전회의까지 참가하지 않고 도망쳤다고 하고(당시는 건재가 붕괴되어 후퇴중인 군단병력들을 수습중), 70% 이상의 병력이 수습되었음에도 30% 만 남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하고, 일체의 중장비가 손실 또는 노획되었다고 하고, 전투와는 상관없는 친일파 비난에....
친일/친미/정치군인이라는 키워드를 위해 사실도 아닌 거짓말로 특정인을 인격살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물론 이 글을 보셔도 믿음이 바뀌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믿고자 하는 것과 진실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함이지, 누구 하나를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 삼아 모든 죄의 원인을 그에게 씌우거나, 자신의 정파적 이익에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글을 올립니다. [주장 근거 부족] [나이가 어려도, 속성과정을 거처도 지휘능력을 나름데로 검증하여 지휘관을 뽑는거지. 괴변이라고!] [그니까 유재홍만 빙신 찌다가 아니고 다들 빙신 찌다라고???] [지랄한다 정말!]
참고자료
http://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768&page=1&search_pos=-2937&k_type=1000&keyword=Skidrow
http://mirror.enha.kr/wiki/%ED%98%84%EB%A6%AC%20%EC%A0%84%ED%88%AC
(엔하위키 미러 - 현리전투)
http://parizal.egloos.com/3523169 금성천의 한국전쟁사
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리.htm 육군대학 지휘학처
http://www.imhc.mil.kr/imhcroot/data/pdf_design.js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정보자료실-원문서비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008211918321&code=910100,
<국군포로 1만9천명 추정>, 경향신문, 2000. 8. 21.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2752&ctg=10
<박재규 통일부장관 "국군포로 송환 요구">, 중앙일보, 2002.02.23.
「전쟁과 휴전-6.25비록」, 정일권, 1986. 1. 10, 동아일보사.
「軍과 나」, 백선엽, 1989.6. 10, 대륙연구소.
1. P315~P321, 「전쟁과 휴전-6.25비록」, 정일권, 1986. 1. 10, 동아일보사. [본문으로]
2. http://www.imhc.mil.kr/imhcroot/data/pdf_design.js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정보자료실-원문서비스, 「한국전쟁전투사」, 현리전투, 1988 [본문으로]
3. 안개와 마찰(fog and friction)은 전쟁이 내포한 우연적 요인들, 인간의 판단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복잡한 요인들로 구성된다. 적에 대한 불충분한 정보, 전장의 갖가지 소문들, 아군의 위치와 화력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 기대와 현실간의 괴리, 예기치 못한 전장의 돌발 사태 등, 이 모든 것들이 전장의 안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전쟁론, 칼 폰 클라우제비츠- [본문으로]
4. 군단장 유재흥 장군 1921년 생, 31살, 3사단장 김종오장군 30살, 9사단장 최석장군 1917년생, 35살 [본문으로]
5. 이 당시 최석 장군의 졸전과 비겁함에 대해서는 “금성천의 한국전쟁사 : 현리 패전의 한 요인 - 인사의 난맥” 금성천의 http://parizal.egloos.com/3523169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본문으로]
6. 그가 전쟁 발발 15일 전에 부임한 7사단 지역은 105 전차여단을 주축으로 한 북한군의 주공격로로 예측되어온 곳이었다. 그의 전임이었던 중국군(광복군) 출신 L 사단장은 1949년 1월 7일부터 17개월이나 7사단장으로 동두천 포천 의정부 방면을 맡아왔으면서도 진지 구축이나 대전차 방어에 있어 가장 부실한 지역으로 방치해 놓았고 이로 인해 새로 부임한 유재흥 장군과 7사단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 금성천의 한국전쟁 비사,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74&pn=2&num=671 [본문으로]
7. 전쟁 발발시 화천 춘천간 도로변에는 10여개소의 토치카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는 유재흥대령이 49년 여름에 정부로부터 예산을 조금 끌어와 구축한 것인데 이때 유대령은 예산을 좀더 얻어와 양구와 화천에서의 접근로에 몇 개의 토치카를 더 구축한다면 만일의 사태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와했다. 6.25동란 발발 당시의 작전국 차장 박임항장군은 “책임감 강한 사단장은 만일을 염려하여 진지를 구축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사단장은 진지를 구축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진지를 구축했다고 해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장병들이 괴롭고 힘 드는 공사를 좋아할 리도 없으니 38선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만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유재흥장군은 이런 유형에 속하는 훌륭한 사단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토치카는 과연 6.25가 발발하자 노도와 같이 남침하는 적의 지상병력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는 등 큰 효과를 본 것으로 판명이 나 유재흥 사단장의 선견지명을 뒷받침해주었다. 위의 글. [본문으로]
8. 출처 : Paul F. Braim, The Will to Win: The Life of General James A. Van Fleet, US Naval Institute Press, 2001, 재인용 출처 : '육군 교육 참고 CD' 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강의9.htm, august님 제공 [본문으로]
9. '<재향군인회(회장 이상훈)와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회장 정승화), 한국참전단체연합회(회장 유재흥)는 21일 정부 중앙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중략-- 6.25 전쟁 기념사업위원장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비롯해 1994년 귀환한 조창호씨(70) 등 참전 원로 12명은 집회를 끝낸 뒤 통일부·국방부 장관을 방문해 “남북 적십자회담과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국군포로 문제를 논의, 이들의 송환에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해달라”고 요청했다. [본문으로]
10. '2002년 2월 21일 유재흥장군, 조창호 중위등 군원로 18명이 박재규 통일부 장관과 조성태 국방부 장관을 항의방문했음.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2752&ctg=10 <박재규 통일부장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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