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2/2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1. 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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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교 평화운동

통일교측은 종교가 불러일으키는 무자비한 테러전을 없애려면 종교 간 장벽을 없애고 대화를 강화해야 한다며, ‘초종교(超宗敎)’ 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이단 시비 때문에 여의치 않으므로 주로 미국을 무대로 초종교 운동을 펼친다. 즉 미국에 있는 UN 회의장을 빌려 종교정상회의를 연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종교간 이해를 확산시키고 있다.

종교 화합을 위한 운동을 음지에서 지원하는 세력이 일본이다. 최근 통일교는 종교간 화해를 통한 ‘천주(天宙)평화운동’을 세계적으로 펼쳤는데, 이때 문 총재는 한국에서 운동을 일으키고, 그의 부인인 한학자 여사는 일본에서 이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은 아버지, 일본은 어머니 국가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부부가 한 마음이 돼 미국이라고 하는 ‘아들’을 움직이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초종교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뜻에서 통일교는 교회 간판 내리기 운동을 펼지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초종교 운동은 모든 종교를 통일해 통일교 하나로 모으자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이를 위해 국경을 넘어선 교차결혼으로 초국가 운동을 한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통일교의 황선조 회장은 그것은 기우라고 잘라 말했다.

“사람을 포함한 만물은 피조물(被造物)이므로 그것을 만들어준 하늘이나 조물주 또는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만물은 존재할 가치를 갖고 있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횡적 관계를 갖고 있다. 동물이 식물을 먹고, 동물이 죽으면 식물이 분해된 동물을 섭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를 ‘상호의존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통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개성진리체이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해야 할 상호의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 바탕 위에서 평화운동을 펼친다. 통일교인만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은 결국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9·11테러로 대표되는 종교분쟁을 불러온 원인이기 때문이다.”

靈人體가 되어야 한다

황 회장은 “세계 평화를 이루자는 거대한 운동을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인이 중심이 돼 펼치고 있다. 문 총재가 있는 한국에선 철학과 사상을 내놓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회인지라 돈을 내놓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오감(五感) 외에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영적 오감(靈的五感)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을 ‘영인체(靈人體)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영인체가 되기 위해선 순결을 지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한 ‘승공’, 가정당 창설로 대표되는 ‘순결한 가정 갖기’, 한일해저터널과 교차결혼으로 상징되는 ‘초국가 운동’, 종교간 장벽을 허무는 ‘초종교 운동’이 통일교를 이루는 키워드이다. 통일교는 이 운동을 이루는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다. 통일교측에 따르면 신자 수는 한국보다 일본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 SGI(창가학회) - “왜색(倭色)은 없다, 부처 마음 불러내면 여기가 극락”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한국SGI 본부


지난 2월8일 저녁 7시30분쯤 방문한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서민 빌라(25평 정도)의 거실은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양복 차림이지만 서민풍인 장년, 가정주부로 보이는 40~50대 여성, 그리고 20대 대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추의 여지도 없는 탓에 일부는 방안에서 거실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모인 것일까.

이방인(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베란다로 나가는 큰 창 위에 붙은 ‘ ○지구 △반 행복좌담회’라는 글귀였다. 행복좌담회라….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한 중년 부인(집주인은 아니다)이 율동을 유도하며 모임을 재미있게 이끌었는데, 그의 지적을 받은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낸 자신의 사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빠 가족과 함께 산다. 오빠가 사업을 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학비는 내가 벌어야 할 형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공부에 소홀해져 장학금을 놓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제목(題目-뒤에서 설명)’을 ‘창제(唱題-뒤에서 설명)’했더니 우리 과(科) 수석이 단과대 수석으로 옮겨가면서 나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세 아이와 함께 곰팡이가 핀 반지하 셋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좌절한 남편이 도박에 빠져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다. 내가 돈벌이에 나서자 남편은 그 돈을 빼앗아갔고 급기야는 숨겨놓은 생활비마저 훔쳐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수 없이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대신 창제를 거듭하며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을 위한 기원도 계속했더니 남편이 생각을 바꿔 다시 일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조만간 우리는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옮겨간다. 이제 우리도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박수)” 등등.

행복좌담회

이 모임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행사 마지막 과정으로 이 모임이 받드는 어본존(御本尊-불상은 아니다, 뒤에서 설명)을 모신 조그만 단(壇)을 향해 꿇어앉아, 떡시루 모양의 일본식 종을 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나직이 세 번 읊조릴 때였다.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 게쿄!”

19세기 말 집강소와 접소에 모여 들던 동학의 모임이 이러했을까? 이 모임은 40여 년 전 한국에 상륙한 일본 불교 남묘호렌게쿄의 좌담회였다. 좌담회 도중 이들이 모시는 일본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 대성인이 여러 차례 거명됐고, 니치렌 대성인이 한 말을 토대로 지혜와 용기를 나눠 갖자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좌담회에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모두가 토종 한국인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식 어본존을 모시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남묘호렌게쿄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일본식 한자 발음에 가깝게 읽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은 일곱 음절이지만 남묘호렌게쿄는 여섯 음절”이라며, 일본식 한자음만으로 읽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산스크리트어 발음에 일본식 한자 읽기를 더하고 여기에 변화를 줘 새로운 염불을 만들어냈다는 설명이었다. 이들은 제목 창제를, ‘나무묘법연화경(이것을 제목이라고 한다)을 ‘남묘호렌게쿄’로 소리 내 읽는 것(이것을 창제라 한다)이라고 설명했다.

교종(敎宗)이 우세하던 통일신라 말기 선종(禪宗)은 어려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참선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만 반복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해 요원의 불길처럼 세를 넓혀갔었다. 그와 비슷하게 이 종교는 ‘남묘호렌게쿄’를 반복해서 부르면 원하는 것을 이루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한국인이 무려 12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모든 회원 가정에 주간회보인 ‘화광(和光)신문’을 보내고 있는데, 이 신문의 발행부수가 55만부라고 강조했다. 한 가구를 3인으로 계산하면 120만 회원은 절대 허언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적잖은 한국인은 이 종교를 백안시해왔다. 일부 인사들은 남묘호렌게쿄를 남녀간 화냥질을 권하는 ‘남녀화냥지교’라고 빈정댔다. 화광신문은 애초 ‘성교(聖敎)타임스’로 창간됐는데(1991년 7월), 일부에서 “성교(性交)를 하자는 신문”이라고 악담하는 바람에 화광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1997년 7월).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표창패 수여

한국에 상륙한 남묘호렌게쿄의 정식 이름은 ‘한국 SGI’ 또는 한국을 뜻하는 K를 붙여 KSGI로 적는다. SG는 ‘창가학회(創價學會)’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소카 갓카이’를 영어로 옮긴 ‘Soka Gakkai’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고, I는 국제를 뜻하는 ‘International’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제 창가학회 한국지부’인 셈. 한국 SGI의 대표자는 여상락(呂相洛, 67) 이사장이고, 세계 본부 격인 SGI의 회장은 일본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78)씨가 맡고 있다.

한국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SGI라는 영어 이름 대신 창가학회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가치 창조’라는 뜻을 가진 창가(創價)가 노래를 뜻하는 ‘창가(唱歌)’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SGI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SGI가 소리 소문 없이 한국 서민층을 파고들었다면, 이케다 회장은 공개적으로 한국 상류층과 접촉해왔다. 이케다 회장은 경희대(1998년 5월)와 제주대(1999년 5월) 동아대(2002년 12월)에서 명예박사를 받았고, 경주대에서는 명예교수직을 수여받았다. 또 제주도와 강원도, 충남 부여시, 경북 포항시, 경남 통영시, 부산진구청 등 숱한 자치단체로부터 명예 도민증과 명예 시민증, 명예 구민증을 받았다.

세를 넓혀가는 한국 SGI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들은 이케다 회장이 경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반대 시위를 벌였으나, 1년 후인 1999년 9월21일엔 이케다 회장에게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하며 신념을 관철해오신 사상에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현창패(顯彰牌)를 수여했다.

한국 SGI도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2000년 9월23일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SGI가 1999년 강원 엑스포를 통해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며 감사장을 수여했고, 2004년 5월14일에는 한겨레신문사가 ‘한국 SGI는 민주언론 한겨레 발전에 헌신한 공로가 있다’며 감사장을 주었다. 한국 SGI와 하부의 지방 조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사장과 표창패 현창패를 받았다.

한국 SGI가 표창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토대청결 같은 환경운동, 각급 학교 도서관에 대한 도서 기증, 소년소녀 가장을 비롯한 불우 이웃 돕기, 노인 무료급식, 장애인 단체에 대한 김장 담가주기, 음악회와 무용회 등 각종 문화 예술 행사 지원 등, 누가 봐도 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치거나 지원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 종교단체로 등록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로 난항에 빠졌던 한일어업협정 개정에 동의함으로써, 일본측의 만기 연장 거부로 촉발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김대중씨는 유신 시절 일본에서 체류하다 한국으로 납치돼(1973년 8월8일) 왔을 정도로 일본의 실력자들과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왔다.
한국 SGI는 1975년 6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조직을 모아 중앙사무국을 만들었으나 반일(反日) 정서가 팽배해 종교단체로 등록하지 못했다. 한국 SGI는 이 ‘비원(悲願)’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풀게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특사로 활약했던 박지원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던 2000년 4월15일, 한국 SGI는 문화관광부에 재단법인 형태의 종교단체로 등록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 SGI에 대한 이단 시비는 확연히 잠잠해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법인 등록 후 한국 SGI의 교세 확장이 주춤해졌다는 사실이다. 창가학회는 한일국교정상화(1965년)가 이뤄지기 전인 1960년대 초 고국을 방문한 재일교포들에 의해 전파됐다.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영남 출신이었으므로, 대구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는데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당시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으로도 불렸다. 일련정종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한다).

여상락 이사장.


영남지역에서 창가학회 회원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른 1964년 1월17일, 종교심의회를 연 문교부는 창가학회를 국수적인 집단이라고 판단하고 내무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고 1월21일 열린 국무회의는 창가학회 단속을 의결했다(1965년 2월27일 고등법원 판결문 근거).
이 의결이 있기 전 이미 전국의 국제공항과 항만에서는 창가학회 관련 책자의 반입이 금지됐고 우체국은 일본 창가학회가 보내온 우편물을 반송했었다. 경찰은 창가학회 회원들이 좌담회에서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국무회의가 창가학회 활동을 단속하기로 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창가학회 대구지부 임시대표인 최규원(崔圭垣)씨가 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을 위반한 행정조치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고법이 ‘피고(정부)는 포교 집회와 간행물 반입 등을 금하게 한 조치를 취소하라’며 원고(창가학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측은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로써 대법원은 일제의 재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명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대법원은 ‘솔로몬의 지혜’ 같은 판결을 이끌어냈다. 1966년 10월25일 대법원은 ‘행정조치는 법적 근거를 갖고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가 한 조치는 법적 근거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창가학회 활동을 규제하지 않았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이로써 정부는 범법자가 되지 않았고, 창가학회는 비록 승소하지 못했지만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은 창가학회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최씨의 근거지인 대구에서 특히 높았는데 1964년 1월말 대구매일신문은 ‘창가학회의 정체’란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이러한 보도는 창가학회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했다.

삼일절과 광복절이 다가오면 민족지를 표방하는 한국 언론은 창가학회의 침투를 염려하는 내용의 기사나 사설을 게재했다. 그런데도 창가학회는 초스피드로 확장을 거듭해 100만 회원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한국 SGI는 2000년 종교재단으로 등록한 이후 교세 확장속도가 떨어져 회원수가 120만에서 멈칫거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 경희대 재학 시절(89학번) 학생운동을 했다고 밝힌 차경환 홍보부장은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도 오랜 시간 탄압받다가 이차돈이 죽은 후 세를 확대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지라 탄압을 받으면 오히려 광포(廣布, 포교를 뜻하는 SGI의 표현)에 도움이 된다. 탄압이 줄어들자 교세 확장이 더뎌지고 있다”라며 웃었다.

마음 속 佛性을 불러낸다

토종 한국인들은 왜 SGI에 가입하는 것일까. 한국 SGI는 회원이 되는 것을 ‘입신(入信)’이라고 표현한다. 부산 배정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84학번)를 졸업한 서진천씨가 밝힌 입신 경위이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를 따라 울산에 있는 절에 다녔다. 고 1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창가학회 회원이던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성불(成佛)시켜 드리겠다며 두어 시간 남묘호렌게쿄를 불렀다. 나도 좋은 뜻으로 알고 따라 불렀는데 얼마 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색이 희어지고 표정도 편안해져 있었다.

그때서야 숙부께서는 ‘만물은 생사를 불문하고 불성(佛性)을 갖고 있는데, 그 불성을 끌어내는 것이 성불이다. 성불하게 되면 돌아가신 분일지라도 그 표정이 편안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 후 숙부께서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지만 일본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불교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년간 과연 이 단체의 주장이 옳은지 나름대로 검증해 보고 사실이라고 판단돼 입신했다.”

한국 SGI 회원들은 하나같이 남묘호렌게쿄를 창제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남묘호렌게쿄를 소리 내 보면 비음(鼻音)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ㅁ과 ㄴ,ㅇ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 비음은 몸속으로 부드러운 파장을 전달한다. 요가 수련자들은 수련 방법의 하나로 반복해서 “옴~”음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비음이다.

비음을 반복해서 내면 분노와 울분에 의한 긴장은 물론이고 너무 좋아서 생긴 긴장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기(氣)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기라고 하는 에너지는 빛과 소리의 파장으로 전달되는데, 비음을 반복해서 내면 몸속으로 기 에너지가 소리와 파장의 형태로 퍼져나간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퍼진다는 것은 곧 잠재해 있던 생명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인데, 소리를 낸 본인은 물론이고 옆에서 듣기만 한 사람에게서도 일어난다고 한다.

“독도는 한국 땅”

2005년 5월 15일 한국 SGI는 서울 잠실 운동장에서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를 갖고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한국 SGI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까. 한국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하던 지난해 5월15일 한국 SGI는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를 열고 ‘독도는 우리(한국) 땅’이라고 외쳤다. 이 행사를 전후해서 발행된 ‘주간신조(週刊新潮)’ 5월19일자와 ‘주간문춘’ 5월26일자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한국 SGI는 화광신문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 국민의 감정을 거슬려 왔다며, 일장기를 태우는 반일 데모대와 별 차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케다 SGI 회장은 ‘한국은 일본에 문화 은혜를 준 나라라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있다’며 이케다 회장이 반일사상의 소유자인 듯이 기술하고 있다.…’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 도중에 대형 스크린에 독도의 영상이 비춰지자 객석에서는 ‘독도는 한국의 영토다’라는 제목의 매스게임이 펼쳐졌다. 일본에서 발생한 종교단체가 반일을 외치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주간문춘은 다른 호에서 ‘SGI가 한국에서 반일운동을 선동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SGI는 탈퇴한 회원이 많기 때문에 실제 회원은 120만이 아니라 30만명일 것이다…일본 SGI는 과격한 한국 SGI를 견제할 수 없는 것 같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SGI가 상대국 신자에게 각기 다른 말을 하게 된다면, SGI가 말하는 평화를 향한 대화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SGI는 일본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될 정도로 발전했다. 이러한 한국 SGI는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 SGI 시경술 부이사장은 “이제 각 종교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테러전쟁을 중지하고 어느 종교가 인류를 위해 더 많이 헌신했는지 견주는 인도적 경쟁을 해야 한다”는 말로 그 방향성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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