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논장서점 대표 백완승 선배님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2. 8. 14:31
반응형

백완승 선배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
.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백완승 선배님께서 오늘 동국대일산병원에서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가족분들께서는 일절 조문은 안받겠다고 하셨답니다.
.
작고소식에 참담함을 금할길 없습니다.
.
+++

 
대학을 졸업할 시기에 고려대 대학원 토목공학과 윤용남 교수님 밑에서 공부해 볼까 하여 한 학기를 열심히 출퇴근(?)하며 공을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하도 더럽고 치사하여 미국유학을 떠나는 게 쉽고 속 편할 것 같아 들이던 공을 포기한 게 제가 고려대와 맺은 인연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툴레인대학을 다니던 제 아들 녀석이 한국에 빠져 고려대 국제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그만 고려대학교를 졸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려대학 졸업생의 아버지가 되어버렸습니다.
.
그래서 민주화운동의 동지인 고려대 출신 백완승 선생님을 제 아들의 선배님으로서 백완승 선배님으로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백완승 선배님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출생하여 설천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뒤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75년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합니다. 고려대 정경대 호남향우회를 창설해서 초대회장을 맡았고 고려대 민속학연구회(탈사랑 우리)도 창립해서 초대회장을 맡았습니다.
.
1979년엔 서울시 구로구 독산동의 YWCA 청소년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구로공단 지역 야학연맹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았습니다. 수배 기간에 10월 유신 반대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구속되어 갇혔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출소합니다.
.
1980년 복학은 했으나 청년연합 여성조직위원으로 5월 광주민중항쟁 발발과 함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계엄 포고령 위반혐의로 지명수배되고 2개월 뒤인 7월 재구속됩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고려대 학보사 사진부장 경력을 살려 월간 디자인 기자, 디자인전문지 포럼 기자, 진명문화사 편집부장 등을 거친 뒤 1986년에야 대학을 졸업합니다.
.
1983년 3월에 1980년 5월 항쟁의 동지이자 감방 동기인 박강희 선생님과 결혼을 합니다. 부군 박강희 선생님은 민중불교운동 연합 창립 운영위원장과 불교인권위원회 사무처장을 역임합니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둘을 둡니다. 두 분은 1989년까지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으로 유명한 서울 광화문 소재 논장서점과 대학로 소재 논장서점을 경영하였습니다.
.
백완승 선배님은 전국인문사회과학 서적상연합 2대 회장으로 1985년 한국출판문화 운동협의회(회장 정동익)와 연대하여 동맹 휴업 및 침묵시위를 주도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차례 구류처분을 받았습니다.
.
백완승 선배님은 1994년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 청년특별위원회 부위원장과 1997년 무진장지구당 유세 특별위원장을 역임하며 기성 정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1998년 무주군 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2000년 새시대개혁당 창당 발기인으로서 무주 진안장수지구당 조직책으로 선임된 뒤 그해 민주국민당 무주 진안장수지구당 조직책으로 선임되어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
오래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완승 선배님은 "선거에서 두 번 떨어지고 나니 또 도전할 여력이 없어 꿈을 접고 무주에서 경영하던 라제 주유소도 남동생(백광철) 맡기고 보따리를 챙겨 서울로 올라왔다"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소회(所懷)를 밝힌 바 있습니다. 백완승 선배님은 2002년 그래픽정보기술사 자격에 도전하여 현재도 어린이도서 전문 "논장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서총판 "서당"은 IMF 파고를 못 견디고 넘기셨다는군요.
.
흐트러지는 탈춤과 반백의 머리 그리고 우람한 체격, 거침없는 목소리 등으로 백완승 선배님은 강한 이미지로 각인됩니다.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