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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FACT
▲일제 식민사관의 두 축인 ‘한사군=한반도설’과 ‘가야=임나’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은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정치선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민사관이 광복 후 70년 이상이나 유지되고 있는 데는 우리 사회 각계에 포진한 카르텔 때문이다. ▲이 카르텔의 정점에는 광복 직후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 매국세력이 거꾸로 한국 사회의 중추부를 장악했던 굴절된 역사가 있다. ▲근래에는 국고 47억을 투입해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주도해 만든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를 삭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독도를 삭제한 것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서 발주처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5개월 간의 수정기한을 줬는데도, 역시 독도를 그려오지 않았다. ▲독도는 한국령이 아니라 일본령이라는 뒤틀린 신념의 표출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지도를 폐기시켰더니 일부 언론에서 “학계에 대한 정치권의 폭거”라는 식으로 매도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역사지도에 독도를 거듭 삭제한 것이야말로 국민과 나라와 역사에 대한 식민사학계의 폭거인데도, 식민사학 카르텔에 속한 일부 언론에서 거꾸로 독자들을 호도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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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 자신의 책 ‘우리 안의 식민사학’(만권당)에서 ‘주류사학자’로 분류되는 김현구 명예교수(고려대 역사교육학과)를 “일본사관의 식민사학자”라고 실명 비판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당했다. 1심 재판부는 유죄(징역6월에 집행유예 2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1월 3일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이 상고하면서 이 사안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 소장은 왜 그렇게 '식민사관'에 몰두하는 것일까? 그는 “식민사학 카르텔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며 팩트올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병든 역사학
‘서울시 광복회’가 주최하고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가 후원하는 ‘바른역사 아카데미’ 강좌가 지난 11월 2일, 서울교육문화회관 교육문화관에서 열렸다. 여기서 필자는 “식민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당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인사말에서 “자신이 많은 역사학자를 만나 보았는데, 많은 학자들의 정신에 병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이 인상에 남았다. 정신에 병이 들어 있다는 것은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종찬 원장은 “자신이 항일가문에서 자라면서 독립운동하던 선조들에게 배웠던 역사와, 광복 후 가르치는 역사가 왜 다르냐”고 자주 항변하곤 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역사학자였다.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재무총장 성재 이시영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역사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전쟁의 논리가 나왔다. 그래서 독립전쟁은 한편으로는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이론을 두고 다툰 역사전쟁이기도 했다.
일제는 대한민국 강점 직후인 1910년 9월 20일 일왕의 칙령(勅令)으로 조선총독부 내에 취조국(取調局)을 설치해 이른바 ‘도서 정리사업’을 했다. 말이 도서정리 사업이지 역사서를 비롯한 한국학 관련 서적 강탈사업이었다. 공식적으로만 모두 14만권 이상의 서적을 모았는데 이중 얼마나 많은 한국사 관련 서적이 일본으로 빼돌려지거나 불태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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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위키피디아.
'반도'에 가둬놓은 역사
일제는 또한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해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반도’라는 말 속에 일제가 한국사를 '반도'라는 틀 속에 가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편찬하던 '조선반도사'는 앞부분만 편찬한 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로 넘어가서 보다 체계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는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서 송진을 채취시킬 정도로 극심한 예산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조선사편수회 예산은 깍지 않았다. 일제는 역사관을 장악하고 있으면 비록 전쟁에서 지더라도 다시 한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역사전쟁의 최전선으로 삼은 분야가 한국 고대사였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대사를 연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구상한 한국고대사상(像)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사군=한반도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임나설’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이었다. '조선반도사'라는 틀 속에 한국사를 가둔 다음 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고대 북부와 남부가 모두 외국의 식민지였으니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논리다.
'한사군=한반도설'은 중국 사료와 다르다
어쨌든 역사학의 외피를 썼으니 이 두 논리가 과연 사료적 근거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사군=한반도설’은 지금으로부터 2100여년 전인 서기전 108년에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도읍에 세웠다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라는 논리이다.
그런데 한사군의 숫자가 과연 4개가 맞느냐 하는 문제부터, 그 위치가 과연 한반도 북부가 맞느냐는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를 기록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자체에 많은 의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국사교과서 등에서 ‘한사군’이란 표현 대신 ‘한군현(漢郡縣)’, 또는 ‘한의 군현’이란 표현으로 대체해서 서술하고 있다. 전형적인 조삼모사(朝三暮四)의 행태로 본질을 호도하면서 그 논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단사학은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중국 고대사료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 고대사료나 지리지들은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1차 사료에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된 것이 가장 불편한 세력 중 하나가 강단사학계일 것이다. 과거에는 '사기', '한서' 등의 중국 사료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만 열람할 줄 알고 한문만 알면 '사기', '한서'를 필두로 중국의 25사 전체와 수많은 지리지들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이런 사료들은 하나같이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고조선은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순서로 말한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 강역 일부를 차지했던 제후국이다. 그런데 ‘한사군=한반도설’은 기자조선의 도읍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같은 곳이었으며,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논리다. 즉 ‘기자조선의 도읍=위만조선의 도읍=낙랑군=평양일대’라는 것인데, 문제는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기초 사료인 한서(漢書) '지리지'는 달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서 '지리지'는 기자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고,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각각 ‘낙랑군’과 ‘요동군’으로 소속 군 자체가 다르다. 소속 군이 다르고 현도 다른데, 강단사학계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평양일대라고 뭉뚱그려 우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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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YTN 캡처.
역사서에 엄연하게 나와 있는데도…
중국의 동북공정이 차라리 한국의 강단사학계보다는 양심적이다. 중국에서는 기자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조선총독부의 위치비정을 따라서 평양 일대라고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요동군 험독현의 위치는 중국 요녕성 안산시 산하의 태안현이라고 달리 비정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지만 요동군 험독현을 요녕성으로 비정한 것은 그나마 한국 강단사학계보다는 학술적이고 양심적이다. '한서' '지리지'에서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험성 자리에 ‘요동군 험독현’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요동군’을 한반도 내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위치비정에 의해도 지금의 요녕성 서쪽의 안산시 태안읍 일대까지는 위만조선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고대사학계는 요동군 험독현이 평양에 있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언제부터 요동군이 평양이 되었나? 최영과 정도전은 평양이 요동인 줄 모르고 왜 압록강을 건너려고 했는가?
이처럼 중국 사료를 조금만 살펴보면 중국에서도 요녕성 서쪽까지는 위만조선의 강역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한국 강단사학계는 “아니다. 위만조선은 평양에 있었고, 낙랑군도 평양에 있었고, 대방군은 황해도에 있었다. 북한 강역은 모두 중국 땅이었다”라고 북한강역 전체를 중국에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제부터 평양이 ‘요동군’이었냐고 물으면 일제히 묵언수행에 들어간다. 이미 학문의 경지를 넘어선 정치선전에 다름 아니다.
공공연하게 ‘가야=임나’라고 주장하는데…
가야고고학을 전공했던 안춘배 전 부산시문화재 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년퇴직 후 논문들을 살펴보지 않다가 필자의 1심 재판 이후 ‘임나’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젊은 학자들까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라가 다시 망하려나 보다”라고 한탄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워낙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식민사학의 태두라고 추앙 받던 이병도조차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한국 고대식민사학계는 거침없이 ‘가야=임나’라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70여 년 동안 한국사학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다보니 일본 유학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공공연하게 ‘가야=임나’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한사군=한반도설’처럼 ‘가야=임나설’도 그를 뒷받침해주는 사료는 '일본서기' 외에는 하나도 없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왜곡하기로 마음먹고 편찬된 희한한 역사서인데 이들은 총론에서는 '일본서기'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각론에서는 추종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가야를 '일본서기'의 임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라면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부터 맞는지 살펴봐야 하지만 그런 과정은 생략한다. 이들은 임나의 성격을 가지고 외교기관설이니 교역기관설이니 갖은 말장난을 하면서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여년 간 ‘가야=임나’가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격은 둘째치더라도 369년에 임나가 설치되었는데 그 임나가 가야라면 그 해에 가야의 왕통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고 '삼국유사'는 가야 5대 이시품왕이 346~407년까지 왕통의 단절 없이 왕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다르면 '일본서기'가 거짓이다. '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초 중의 기초인 연대부터 맞지 않는,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야가 임나라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금관가야가 멸망한 532년, 그리고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일본서기'에도 임나가 나오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그 100년 이후에도 임나가 버젓이 존재한다.
그래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1963년 임나를 비롯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아니라 이들 나라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分國)들이었다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을 주장했다. 이 학설이야말로 '삼국사기' 및 '일본서기'의 내용까지도 모두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일본의 고대사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임나=가야’라고 주장하는 한국사학계는 이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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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위키피디아.
북한 학자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일본 진출" 주장
임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나의 위치다. 강단사학자들은 한결같이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참모본부가 ‘가야=임나’를 주장하면서 일제의 한국 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 복원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를 식민지배기구라고 말하면 국민적 저항이 우려되니까 사신, 교역기관설 등의 교설(巧舌)로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일례로 임나일본부가 외교기관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다음에는 이 사신이 신라와 백제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식으로 사실상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일제 식민사학, 즉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남북한의 모든 학자들은 임나의 위치를 일본 열도 내로 비정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임나의 위치를 오카야마 현 키비(吉備) 지역이라고 비정하고 있고, 남한학계에서는 문정창·최재석·황순종 등은 대마도설을 주장하고, 김문배·김인배 등은 큐슈설을 주장한다.
최근 황순종 선생은 바른 역사 아카데미에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라는 자신의 저서를 주제로 강연했는데,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임나의 위치는 당연히 일본 열도 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 극우파 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까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임나의 위치를 한반도 남부에서 찾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막강한 식민사학 카르텔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식민사관은 존속할 수 없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일제 식민사관의 두 축인 ‘한사군=한반도설’과 ‘가야=임나’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은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정치선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민사관이 광복 후 70년 이상이나 유지되고 있는 데는 우리 사회 각계에 포진한 카르텔 때문이다.
이 카르텔의 정점에는 광복 직후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 매국세력이 거꾸로 한국 사회의 중추부를 장악했던 굴절된 역사가 있다. 식민사학이 청산되지 않다보니 이제 이 이론은 학문을 넘어서 뒤틀린 신념의 경지로까지 악화되었다. 사료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맞으니 따지지 말라는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학자가 나타나면 온·오프라인상에서 온갖 모독을 가하는 것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근래에는 국고 47억을 투입해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주도해 만든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를 삭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독도를 삭제한 것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서 발주처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5개월 간의 수정기한을 줬는데도, 역시 독도를 그려오지 않았다. 독도는 한국령이 아니라 일본령이라는 뒤틀린 신념의 표출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지도를 폐기시켰더니 일부 언론에서 “학계에 대한 정치권의 폭거”라는 식으로 매도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역사지도에 독도를 거듭 삭제한 것이야말로 국민과 나라와 역사에 대한 식민사학계의 폭거인데도, 식민사학 카르텔에 속한 일부 언론에서 거꾸로 독자들을 호도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독도를 사실상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이 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현상의 뿌리에 '일본 극우파의 자금이 흘러들고 있는 현상이 있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봐야 할 때다. 식민사학을 비롯한 독도문제 등을 국가 존립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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