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김경천 장군의 아버지 김정우는 35살의 늦각이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1900년부터 1908년까지 8년간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을 지냈습니다.
러시아에서 간첩죄로 체포된 김경천 장군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유형소에 들어와 머리를 깎이기 전 유형소에서 찍은 사진 (1939년)
러시아에서 간첩죄로 체포된 김경천 장군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유형소에 들어와 머리를 깎이고 난 후 유형소에서 찍은 사진 (1939년)
백마를 탄 김경천 장군의 모습만 보여도 일본군을 벌벌 떨었다. 김경천 장군과 애마
부인과 김경천 장군
김경천 부대의 부대원들 사진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 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 장군은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었으며,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휘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사령관·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치가 겸 정당인으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이후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공산당이 가장 처음으로 생겼다. 1930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학교에서 공부한 아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사진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단야". 세번째가 "박헌영",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주세죽"이고 맨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다.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북만주 지역 지휘관들의 모임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항일연군 지휘관들은 20대이하 청년들이었다.
1921년 3월 연해주 공산당 지역중앙위원회 고려인 부서의 제안으로 아무르 주 크라스노야르 마을에서 개최된 연해주 빨치산 활동가들의 첫번째 모임의 사진이다. 여기에서 고려인 빨차산 부대들을 통합하여 연해주 인민혁명군 소속으로 합병시키자는 결의가 나왔다, 맨 뒷줄 왼쪽에서 세변째가 김경천 장군이다. 당시 김경천 장군은 만주에서 연해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별다른 전투를 치루기 전이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 또 공산당원이 아닌 탓에 맨 끝줄의 찬밥신세였다. 하지만 이듬해 여름에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가 그를 뽀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지산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둘째 줄 왼쪽부터 첫번째는 창의회에서 활약한 안희재(1885~1943), 두 번째는 나중에 선봉신문 농업부장을 역임한 황동훈(1903~1938), 세 번째는 연해주 한인독립운동 지도자 이동휘(1873~1935), 네 번째는 한인 지도자로서 소비에트 당국에 한인의 권리를 적극 주장했던 한명세, 여섯 번째는 1930년대 뽀시예트 구영 당서기장을 역임한 김 아파나시, 셋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1924년 니시고려사범학교, 1931년 해삼고려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이듬해 조선극장 창립에도 관여하는 등 한인 문화교육부문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만금, 넷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는 중국과 한국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채 그레고리(1891~1926), 멘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는 제 76 고려인 포병부대 정치교육장교를 역임한 김광택(1898~1957)이다.
1943년10월 5일 소련군 88여단의 야전연습북야영에서 촬영한 대원들. 맨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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