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건빵 맛이 변화됐는데도 "여전하다"고 한 그의 미각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2. 8.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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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교도소 죄수 번호 5046번 '한라산 필화사건'의 '산하 이상백 시인'이 1988년 6월 11일 작성한 항소이유서 말미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담당 공안검사는 건빵 맛이 '여전하다.'라던 현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 황교안. 밀가루와 소금으로 만들었던 그 옛날 건빵과 버터, 분유, 달걀 등이 첨가된 지금의 건빵 맛이 어찌 여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 불광동 보건원 사택에 살 때 실험동물용 먹이로 들어온 건빵을 양동이로 담아 먹던 기억과 군 복무 때 지급된 건빵을 모아 내무반원들과 식용유에 튀겨먹던 그 건빵 맛은 요즘의 건빵 맛과는 절대로 여전하지 못하다.


[김명환의 시간여행] [55] 건빵, 주전부리 아닌 '비상시 主食'.. 수재민들에 끼니당 5개꼴 배급도


김명환 前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 | 2017.02.01

1968년 11월 하순, 강원도 삼척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토벌작전에 참여한 지역 경찰관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선물이 도착했다. 선물은 다름 아닌 건빵 2000봉지였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67년 추석 때 가뭄 피해를 본 영호남지역 어린이 11만여 명에게 보건사회부가 보낸 명절 선물도 한 사람당 건빵 한 봉지씩이었다. 건빵을 값싸고 소박한 과자 정도로 여기는 오늘의 상식으로는 정부의 특별 선물이 건빵 한 봉지라는 게 잘 이해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50년 전 한국에서 건빵이란 심심풀이용 주전부리가 아니었다. 허기를 채워주는 비상식품으로 첫손 꼽혔다. 인스턴트 식품의 등장을 소개한 당시의 일간지 기사는 라면, 칼국수, 냉면, 핫케이크, 식빵과 함께 건빵을 '6대 주식(主食)용 인스턴트 식품'으로 꼽고 있다 (매일경제 1969년 3월 5일 자).


1960~1970년대엔 병영 밖에서도 건빵으로 허기를 채우는 일이 있었다. 한여름 홍수 때마다 정부가 이재민에게 나눠준 대표적 비상식량이 건빵이었다. 고립된 수재민에겐 경찰이 헬기로 건빵 상자를 투하하기도 했다. 수재민이 건빵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나마 물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1969년 여름 부산의 수재민 3076명에게 당국이 3일간 지급한 식량은 1인당 라면 2개와 건빵 1봉지가 전부였다. 수재민 중엔 허기에 지쳐 수용소를 빠져나와 구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경향신문 1969년 9월 20일 자). 1965년 7월 서울 홍수 때도 초등학교로 대피한 이촌동 주민 1만여 명은 아침을 건빵 5조각으로 때우고 오후 6시 반까지 꼬박 굶었다.

건빵은 가난한 이들의 식량이기도 했다. 온갖 고생을 견디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회고담엔 종종 "건빵과 냉수로 한 끼를 때우며 이를 악물었다"는 식의 말이 빠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면이 차지하고 있는 '가장 소박한 식사' 자리는 원래 건빵 몫이었다. 검소한 생활을 했던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고(故) 해리 홀트씨도 점심을 건빵과 물로 자주 때웠다고 한다.

오늘날 수재민 대피소에서도 건빵은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구호품으로는 즉석밥, 컵라면, 통조림, 생수 등을 나눠준다. 건빵은 지금도 군 장병에게 지급되고 시중에서도 판매되지만 옛날과는 맛이 아주 다르다. 밀가루와 소금, 설탕만으로 만들던 군용 건빵은 1996년경부터 분유, 계란, 버터, 참깨 등이 첨가돼 달고 고소해지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서너 차례에 걸쳐 맛을 개선해 왔다. 지금은 총 12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 엄밀히 말해 '건빵 모양 과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지난 24일 육군훈련소를 찾았을 때 "건빵 맛 여전하네"라고 말했다가 "군 면제자가 옛 건빵 맛을 알 수 있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건빵을 군인만 먹었던 것은 아니니 맛을 평가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건빵 맛이 계속 변화됐는데도 "여전하다"고 한 그의 미각이라고나 해야 할까. 공교롭게도 같은 날 국방부는 올해 군 장병에 대한 건빵 지급량을 연 36개에서 30개로 줄인다고 밝혔다. 신세대 취향에 맞춰 맛을 바꿨는데도 장병 선호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 건빵의 맛도 지위도 전혀 '여전'하지 않게 됐다. 군 훈련이든 자연재난이든 늘 힘든 상황에서 허기를 채워줬던 '밀가루 덩어리 비상식량' 역사의 한 페이지가 그렇게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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