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애국가 작사자 논란/ 신동립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3. 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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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칼럼 - 2017년 2월 22일 (수) - 백일곱 번째 이야기

애국가 작사자 논란

안익태(1906~1965)가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다들 안다. 하지만 누가 작사했는지는 공식적으로 알 수가 없다. 쉬쉬하면서 지낸 세월이 환갑을 넘겼다. ‘서경별곡’ ‘가시리’ ‘동동’도 아니건만, 세상에 이런 일이 따로 없다.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가 지었다고 주장하는 그룹의 선두에는 흥사단이 있다. 흥사단이 제시하는 안창호 작사설은 크게 두 가지다.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한 주요한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는데요 라고 하자 선생은 빙그레 웃고 말으셨다’는 기록, 안익태가 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 황사성 목사가 ‘애국가는 도산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며 지은 노래이니 이를 알고 작곡하라’고 했다는 회고기다.



▶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노년-장년-중년-청년 윤치호

그런데, 도산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 내부에서 이견이 나왔다. 모름지기 사상 최초다. 토론토 흥사단 창립 지부장인 강신봉 캐나다 역사교육원장이 “국사편찬위원회는 더 이상 지체 말고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1865~1945) 선생을 결정해 줄 것을 촉구해 마지않는다”고 선언했다. 흥사단원이 좌옹(佐翁) 윤치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실을 비켜 놓고 다른 이유로 언쟁을 벌이고 사실이 아닌 아집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묻어 버린다면, 이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역사의 왜곡이요 오류를 조장하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강 원장은 “2009년 토론토에 흥사단 지부를 유치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뜻을 높이 받들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애국가는 안창호 선생이 아니라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다. (윤치호가) 친일을 했다고 애국가의 작사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내 편, 네 편 하며 편 가르기부터 먼저 생각을 잘한다. 그래서 흥사단을 하고 있는 후예들이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 선생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다.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도산 선생의 심기가 오히려 불편할 것이다. 그 어르신은 비록 자기가 애국가의 일부를 작사했다 해도 윤치호 선생이 작사를 한 것이라고 할 분이다. 그만큼 두 어르신은 우의가 좋았고 선후배 간 사랑을 나눈 분들이다. 우리 후손들이 편 가르기 식으로 우겨댄다면 이는 역사를 공부하고 정의해 가는 우리 세대의 잘못이요 치욕이다. 올바르게 정도를 가야 한다. 그러한 일에 무슨 욕심을 부리는가. 도산 선생의 뜻을 따르는 흥사단의 일원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경기 의왕에서 태어나 용산중고와 건국대, 공군 비행관제경보학교를 졸업한 강 원장은 1968년 캐나다로 가 온타리오 주에 살고 있다. 토론토 요크대학 계리사 과정, 몬트리올 철도청 열차통제관 과정을 마쳤다. 현지에서 김치 사업으로 성공했다. 캐나다한인회 총연합회장, 요크한국인학교장, 캐나다문인협회 이사장, 무궁화사랑모임 회장, 스코필드추모재단 회장, 캐나다애국지사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캐나다헌법인권헌장 제정위원, 연방정부 복합문화성장관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도 수훈했다.

1955년 4월 13일 당시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제1차 회의는 ‘안창호가 작사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봤다. 그러나 2차 회의일인 5월 13일까지도 안창호·윤치호 합작설, 윤치호 단독 작사설 등이 맞섰다. 두 달하고도 보름이 지난 7월 28일 마지막 3차 회의가 개최됐다. 조사위원 19인 중 13인이 출석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판정함에 있어 현재의 수집된 사료는 충분하다”고 이병도 위원이 말했다. “윤치호 씨가 가장 유력하다고 판정함으로써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겠다면서 윤치호 작사 사실 확정을 논하는 자리였다. 이어 표결에 들어갔다. 11인은 윤치호로 확정, 2인은 유보하자고 했다. 11대 2,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팩트의 확정은 그렇게 미뤄지고 말았다. ‘윤치호 작사 미확정’이다. ‘윤치호 작사자 미확정’은 그동안 ‘작사자 미상’이라고 잘못 알려져 왔다.


▶ 왼쪽: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지. 미국 에머리대 도서관에 있다.
오른쪽: 애국가 영어악보. 윤치호 작사로 적혀 있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증거는 많다. 대표적인 것만 8가지다.
①1897년 독립협회 주최 조선개국 505회 기원절 행사 기록인 ‘아펜젤러와 한국’ 제1권 중 서재필 작성 ‘편집자 주(Editorial Note)’에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작사했다고 돼 있다. ②1910년 8월 14일 동경유학생회가 한국개국기원 축하회에서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라고 확인했다. ③1911년 재외 선인(鮮人)들의 행사 안내서에 ‘윤치호 애국가 1부 40전’이라고 표기돼 있다. ④1914년 하와이 ‘태평양 잡지’는 ‘(애국가는) 윤치호가 무궁화가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라고 보도했다. ⑤1920년대 김종만 소장 ‘가사집’이 ‘윤 선생 치호’로 명기했다. ⑥1931년 한석원 편저 ‘세계명작가곡집’은 ‘무궁화’의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소개했다. ⑦1952년 E R 그리피스 저 ‘국가’는 애국가 작사자를 ‘치호 윤’이라고 지목했다. ⑧1954년 ‘코리아 랜드 오브 송’은 ‘코리안 워즈 오브 윤치호(Korean Words of Yun Chi-Ho)’라고 밝혔다.

애국가를 좌옹이 작사했다는 것은 심지어 일본도 안다. 1911년 ‘105인 사건’ 관련 일제경찰의 재판기록에 ‘윤치호가 전에 지은 애국가’라는 구절이 있다.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이면 정말 좋겠다. 그렇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위인 도산의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은 민족의 영원한 사표이기 때문이다. 금상첨화 의욕이 소탐대실로 반전될까봐 두렵다.

글쓴이 신동립
뉴시스 문화대기자

주요 저서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 지상사, 2015
『귀가 따가운 남자』, 맑음, 2002
『귀신은 있다 1·2』, 명지사, 1997

『이래도 기자할래』, 반도기획, 1996(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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