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김근태가 걸어온 길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2. 1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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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안의 비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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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범 | 200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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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주류’ 김근태의 인생은 엄밀히 말해 언제나 비주류였던 동시에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김근태는 1947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난 이후 국민학교 교장이었던 부친의 전근 때문에 평택과 양평에서 네 곳의 국민학교를 옮겨가며 다녀야 했다. 그는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정도로 낯선 학교에서 텃세에 시달리는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동시에 교장의 아들이라는 일종의 특권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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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김근태는 동기들의 대다수였던 경기중학교 출신들에게 설움을 받아야 했다. 가난했던 김근태는 65년의 서울대 상대 진학으로 한국사회의 주류로 편입되는 듯 했다. 하지만 67년에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제적을 당하고 군대에 끌려가야 했고, 복학한 이후에도 69년의 3선 개헌 반대, 71년의 교련 데모 등에 가담했다가 남은 대학 시절을 도피생활로 보내야 했다. 학교에도 나오지 못하던 그가 대학 졸업장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대 학장이었던 변형윤 선생이 반 억지로 ‘밀어준’ 덕분이다. 그는 ‘KS 출신’이라는 정통 주류의 길을 걸어왔으면서도 정작 그 속에서 철저한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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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이후 그가 복권돼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는 95년까지의 약 30년의 인생은 쉼 없는 투쟁과 고난의 시간이었다. 70년대 내내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도피생활을 하며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교육 등을 하던 그는 83년 최초의 공개적 사회운동단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2대 의장을 맡으면서 재야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5년에는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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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재야라는 비주류의 집단 내에서 주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선에서 표명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 재야의 넓은 지지를 얻었을 때다. 이후로도 그는 재야와 야권의 통합을 주장했고 92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으로서 김대중 후보를 지원했으며, 마침내 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비주류의 주류가 주류의 비주류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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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입문 후 8년 내내 그는 비주류 자리를 벗어나기는커녕 ‘양심선언’으로 정치권에서 ‘왕따’를 당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원칙을 쉽게 꺾지 않는 고집스런 김근태가 재야에서는 주류로, 정치권에서는 비주류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는 비중있는 정치인으로 부상한 김근태가 애초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주류가 될 만큼 정치판이 변화할지, 아니면 그가 변심해 주류의 길을 추구할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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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범 기자 beemok00@snu.kr



[김근태 평전 4회] 아버지 잦은 전근으로 ‘고향없는 소년’
[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 2012/07/04 |김삼웅

김근태 고문의 학창시절.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gtcamp.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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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용과 어머니 이한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부모는 교육열이 강하여 아버지의 박봉에도 자식들 중에는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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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아버지가 번번히 전근을 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니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택군에서는 청북과 진위초등학교를 다니고, 양평군에서는 원덕과 양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김근태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열변을 토했으나 3등밖에 못해 어린 마음에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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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어린 시절이었고, 또한 상처받은 고향으로 경기도 평택과 양평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상처받은 고향조차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리운 양평’은 모두 유원지로 전락되어버렸고, 평택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버려 고향을 박탈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나의 고향 또한 잠겨버린 듯하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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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의 잦은 이사와 전근은 김근태가 아니라도 소년의 정서에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소년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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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전학 다니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고문이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서는 텃세를 부리는 본토 애들과 싸우기도 하고 알랑방귀도 뀌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질 즈음해서는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혹독한 처벌이었다.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자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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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다. 다만 교직자의 신분이어서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자식들에게는 여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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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매우 따뜻하신 분이었고, 어머니는 대단히 열정적이셨다. 아니 극성맞다고 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 두 분 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는 만장일치셨다”고 김근태는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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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지평> 편집위원 이재화는 1991년 봄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접견과 부인 인재근, 친형 김국태 교수(추계예술대 문예 창작과)를 비롯, 손학규ㆍ최민화ㆍ조화순ㆍ안병직ㆍ문익환ㆍ채만수 등 지인들을 만나고 <김근태의 삶과 사상>을 썼다. 그의 생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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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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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네 차례씩이나 전학을 하는 것과 관련, “어린 김근태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분이 아니라 작고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가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자연히 성격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형성된 구석이 많았다.” (주석 3)라고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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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이와 관련 부친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 인재근에 따르면, 남편은 “정열적인 면은 ‘기가센’ 어머니를 닮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 고 전한다. 김근태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또는 반항심은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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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아버지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읍내시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며 투덜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누나같이 당당하지 못한 것이 창피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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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소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고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여야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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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근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항심은 성장하면서 반독재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발산되었다. 어릴적에 “마음씨는 좋지만 무능하여” 늘 지방으로 옮겨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토박이 아이들 속에서 막 뿌리를 내릴 때쯤이면 다시 전학을 가야 하는 ‘뿌리뽑히는’ 고통을 어린 김근태의 가슴에 ‘약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울에 올 ‘빽도 없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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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태어난 1947년은 해방 2년차로서 미군정 시절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분단에 이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고,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12월 2일에는 장덕수가 피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ㆍ3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에 상이한 두 개의 정권이 서게 되었다. 해방 3년만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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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동시대의 아이들처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서 혼란시기에서도 생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기에 가족사에 불행이 겹쳤다. 김근태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때의 가족사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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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김근태, <희망의 근거>, 415쪽, 당대, 1995.
2> 앞의 책과 같음.
3> 이재화, <김근태의 삶과 사상>, <민족지평> 제3호(1991.봄여름), 153쪽.
4> 앞의 책, 153~154쪽.

5> 앞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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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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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대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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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9월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23일간 안기부[1]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을 받았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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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부터 제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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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 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2][5] 2011년 12월 초 뇌정맥혈전증 투병사실을 공개하였고, 12월 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였다.[6] 향년 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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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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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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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 : 경기도 양평군 양주국민학교 졸업
1962년 2월 : 서울 광신중학교 졸업
1962년 - 1965년 경기고등학교
1965년 - 197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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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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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 1970년 8월 육군 병장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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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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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 수배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1983년 민청련 초대 의장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당해 고문을 당함 (~ 1988년까지 복역)
1987년 부인 인재근과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1989년 전민련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 역임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구속 (~ 1992년까지 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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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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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총재로서 정계 진입.
1996년 제15대 민주당 국회의원
1999년 국제금융박람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0년 4월, 제16대 도봉 갑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2001년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전략연구재단(한반도재단) 이사장
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2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2003년 10월 2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2004년 4월, 제17대 도봉 갑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2월 18일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당선
2006년 6월 10일 열린우리당 의장
2007년 6월 12일 대선 불출마 선언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위원
2008년 2월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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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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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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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 (중략) ...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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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의 진술, 1985년 12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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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선전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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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에 충청북도 도청 소속 6급의 한 공무원이 김근태 형제, 숙부가 월북, 빨갱이라는 내용을 350차례 언론사 독자게시판에 올리는 혐의로 구속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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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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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5대 총선 국회의원(도봉구) 15대 새정치국민회의 38.9% 27,768표 1위 도봉구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도봉구) 16대 새천년민주당 50.9% 34,233표 1위 도봉구 국회의원 당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도봉구) 17대 열린우리당 52.1% 42,583표 1위 도봉구 국회의원 당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도봉구) 18대 통합민주당 46.2% 31,335표 2위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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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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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인재근
딸: 김병민
아들: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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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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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미주한인입양인네트워크 감사패
1987년 로버트케네디 인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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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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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0일 《남영동》, 중원문화, ISBN 9788977287150
2007년 6월 21일 《일요일에 쓰는 편지》, 샛별디앤피,
2004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올벼, ISBN-10 8990987016
2001년 10월 31일 《희망은 힘이 세다》, 다우, ISBN-10 8988964128
1995년 6월 30일 《희망의 근거》, 당대, ISBN-10 8981630038
1992년 《열린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1992년 《우리 가는 이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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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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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육남매> 김종철(배역: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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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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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1947년)
민청학련 사건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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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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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국정원의 전신.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은 정형근이었다.
↑ 가 나 장일호 (2011년 12월 24일). 김근태는 27년째 고문받고 있다. 《시사IN》.
↑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목사됐다”, 2008년 11월 1일 작성. 2008년 11월 1일 확인.
↑ 가 나 “네티즌 사이 다시 회자된 김 의원 고문사건”, 《오마이뉴스》, 2004년 6월 23일 작성.
↑ “법정에 선 ‘밀실 고문’…재판부는 ‘증거 보전’ 기각”, 2009년 12월 21일 작성. 2011년 12월 28일 확인.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별세”, 2011년 12월 30일 작성. 2011년 12월 30일 확인.
↑ 강준만 교수. 〈'깃발사건'과 김근태 고문사건〉, 《한국 현대사 산책》, 부제: 광주 학살과 서울 올림픽. 1980년대 편, 313쪽
↑ 보도 통제·방청 제한…법정 안팎 공권력 장벽,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3일
↑ 인터넷 총선후보 비방 글…6급 공무원 구속영장 동아일보 2004년 4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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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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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 대한민국헌정회
'김근태와 함께' 블로그 - 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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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구 갑)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전 임
유인태(도봉구 갑)
김원길(도봉구 을)
후 임
김근태(도봉구 갑)
설훈(도봉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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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구 갑)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전 임
김근태(도봉구 갑)
설훈(도봉구 을)
후 임
김근태(도봉구 갑)
유인태(도봉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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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구 갑)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 통합민주당
전 임
김근태(도봉구 갑)
설훈(도봉구 을)
후 임
신지호(도봉구 갑)
김선동(도봉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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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4년 7월 1일 - 2006년 2월 10일
전 임 김화중
후 임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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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열린우리당 의장 |2006년 6월 9일 - 2007년 2월 14일
전 임 정동영
후 임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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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
1947년 태어남
2011년 죽음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장관
부천시 출신
경기고등학교 동문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
참여정부의 장·차관급 공직자
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당 (대한민국)
민주통합당
국민의 정부
고문 피해자
열린우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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