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1909년 4월 1일 전국 호구조사를 하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5. 10.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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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8 | 권 영 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


1909. 8. 29.~1910. 8. 29.

1909년 4월 1일부터 민적법(民籍法)이 새로 시행되었다. 황성신문 4월 3일자 '민적실시(民籍實施) 유고문(諭告文)' 기사는 내부(內部)에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안내문을 그대로 전한다.

"종래로 호구조사(戶口調査) 규칙이 유(有)하나 그 조사 방법이 완전치 못한 바 그 목적을 달(達)하기 불능한 고로 인민의 신분관계를 법률상 적확히 하고 동시에 일국의 인민의 실수(實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민적법을 실시한다."

통감부가 주도하여 제정한 새 민적법은 1909년 3월 법률 제8호(구한국관보, 4318호, 1909.3.6.)로 공포되었고, 내부 훈령(1909.3.23.) '민적법 집행 심득(心得)')에 의해 시행 규칙이 공시됐다. 민적법의 핵심은 호주와 그 친인척을 중심으로 '가(家)'를 이루고 이들 사이의 가족 관계를 한 장의 민적에 기재하는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라는 점에 있다. 이 법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주지를 본적(本籍)으로 하고, 각 경찰서에서는 관할 구역 안에 본적을 가지는 '가(家)'의 민적들을 민적부(民籍簿)〈작은 사진〉로 편철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각 면에는 신고부(申告簿)를 설치하여 이후에 발생하는 출생 사망 혼인 양자(養子) 이거(移居) 등과 같은 신분 변동 사항을 10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규정했다.

경무국에서는 민적부를 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1909년 7월부터 실시하게 된 호구조사는 경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황성신문, 1909.7.18.), 1910년 12월 그 조사가 종료되었다. 이와 비슷한 호구조사는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1896년에도 실시된 바 있었다. 당시에는 개별 가옥을 '호(戶)'로 삼아 호적을 편제하고 그 '호(戶)'에 동거하는 사람을 등록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그러나 새 민적법에 의한 호구조사는 법적으로 규정한 개인 신분 등록 제도를 위한 경찰 조사라는 점에서 일반 백성의 적극적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호구조사를 주도한 경찰은 '인민 보호와 시정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라고 선전했으나 호구조사 자체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경찰 당국은 호구조사〈큰 사진〉(1920년경 콜레라 감염 확인을 위한 호구조사/출처=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가 징세나 범죄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며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호소하고, 민적법에 대한 상세한 해설 책자를 제작해 널리 배포하기도 했다. 경찰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나 의병 출몰 지역에서는 아예 일본 헌병이 호구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실제 호구조사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혼인한 부인을 민적에 올리기 위해 그 성명을 모두 기입하도록 하였는데, 하층민 여성들은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고 호칭이 있었다 해도 그 표기가 정확하지 않아 등재가 어려웠다. 그래서 호구조사 때 부인에 대해서는 그 성(姓)과 신분만 기록해도 된다는 지침이 나오기도 했다.

민적법의 시행과 이를 위한 호구조사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 조사 결과 당시 전국 인구가 1293만5282명으로 집계(조선민적요람, 1915)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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