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악명높은 「서빙고 호텔」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4. 22.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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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서빙고에 숲으로 잘 가려진 보안사령부 분실, 보안사 대공처 6과는 1979년 전두환 보안사 사령관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5공의 산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행한 민간인 사찰과 12ㆍ12뒤 각계인사를 고문한 내용은 아주 유명한 역사가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 서빙고역앞 교차로에서 크라운호텔쪽으로 1백m쯤 가다보면 승용차 한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오른쪽으로 휘어진 급한 언덕길이 나옵니다. 그 언덕이 끝나는 곳에 커다란 철문이 있지요. 


휘영청 높게 자라난 포플러로 둘러싸여 공중에서 내려다보지 않고는 어떤 위치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위장돼 있던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입니다.


일명 "서빙고호텔"로도 불렸던 이곳은 73년 보안사령부 창설 이후 각종 "공작"과 "수사"의 본산이었습니다. 특히 79년 12ㆍ12사태 이후 81년 3월 5공이 출범할 때까지 사회각계인사들을 협박ㆍ회유ㆍ고문하는 수사장소로 이용돼 그 악명이 하늘을 찌르던 곳이지요.


그리고 5공시절 내내 5공정권에 밋보인 많은 재야인사와 정치인 그리고 기업인들이 본의 아니게 묵어야했던 공포의 요새였습니다.


이때문에 서빙고 분실은 일반국민들에게는 보안사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전체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그 이름을 기무사령부로 바꾸고 또 그 장소를 없애버렸습니다.


대공처 6과, 국군보안사는 사령관 밑에 5처4실로 운영되는 보안사의 업무기능중 이름대로라면 이곳은 간첩사건 등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하는 일개 과에 불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간첩뿐 아니라 야당정치인ㆍ재야인사ㆍ종교인ㆍ대학교수ㆍ언론인, 심지어 집권당의 대표최고위원까지 사찰대상으로 삼는 특수한 기능까지 수행해온 곳이었습니다.


5공시절 이곳은 많은 간첩단사건이나 좌익사건 등을 적발하여 조사해왔지만 이곳에서 조사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법정에서 고문을 받아 거짓진술했다고 번복하고 폭로함으로써 그때마다 간간이 그 실체를 국민에게 드러내기도 했었습니다.


연대에 유학 중 83년 간첩혐의로 보안사에 연행됐다가 대공수사관으로 특채(?)돼 2년여 동안 근무했던 재일동포 김병진 씨가 86년 2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보안사"란 제목의 수기를 써 이곳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비로 내막이 일본에서 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빙고 분실은 정보의 기록관리, 대학 동향파악, 일반 대공업무, 상부의 특명사건을 전담하는 4개 부서가 있고 각 부서마다 15년에서 20년씩 근무한 준위ㆍ상사ㆍ중사ㆍ문관 등 10명 내외의 요원이 있었습니다.


이곳 요원들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부서가 다른 경우 서로 이름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생활을 하며 이를 위해 소속요원들끼리만 통하는 가명과 은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문은 "강력심사", 물고문은 "수도공사", 각목 등을 사용한 구타수사는 "토목공사"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VIP"실로 불리는 특실로 김재규, 김종필 등이 조사를 받았던 곳입니다. 이곳엔 대형침대에 커튼과 에어컨까지 갖춰 말 그대로 호텔수준 시설입니다. 


반면 대부분은 작은 방 백열전구 밑에 상하 이동식의 철제의자 1개만 갖춰놓고 "악질적"인 간첩들을 조작 생산하여 5공과 6공 정권의 고비마다 공안 몰이를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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