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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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박용섭의 어릴적부터 살아온 서울 이야기 (연재중) 1]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6. 2.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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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섭이가 페이스북에 쓰는 어린시절 부터 살아온 우리들의 서울 이야기:

 

 

 

라면이 뭐 내 영혼을 위한 음식이랴마는..

가끔 일요일 마땅히 먹을거리가 없을때 우린 라면으로 
한끼를 떼운다.
늘 먹는 라면이지만 내게도 아주 특별한 라면이 있었다.
남은 인생에서도 라면을 먹겠다만, 이 라면처럼 특별하고,
맛났으며, 사랑이였고, 서글픔 이였으며, 미안함이 였던 라면은 없다.

 

 

 

 

 

매년 추석 명절이 돌아오면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의 손을 잡고,

자주 이사를 가시는 큰아버님댁으로, 어떤 해는 보광동으로,

또 이듬해는 사당동으로, 하계동으로 차례를 지내러 갔다.

 

"여보 이번 추석은 아주버님댁이 또 이사를 했다는데 집도 모르고,

보광동은 어딘지도 모르는 양반이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는게 어려우니,

애들은 집에 놓고 당신이나 다녀오시지요"

 

"아이들이 추석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내 혼자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안그래도 1년이면 2번을 겨우 만나는데 찾아뵈야지"

 

"가는 길은 알아요"

 

"형님께 전화로 찾아가는 길을 들었응께 찾을 것이구만"

 

 

 

 

그렇게 이사 간 큰댁을, 추석 차례를 지내러 정성스레

다림질하고, 새옷은 아니여도 깔끔하게 차려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0년의 추석 전날 이였다.
막내는 간난아이여서 초행길은 무리라 여겨 집에서 어머님과
보내고,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아버지가 손을 꼭 잡고
똥골을 떠나 보광동 큰집을 찾아 나섰다.

김포공항 입구에서 128번 버스를 탈때 까지만도
우린 버스를 탄다는 기쁨으로 형과 장난도치고
재잘거리며 즐거웠다.

버스는 곧 용산에 내려 주었고, 길을 건너 보광동을 가는 버스를 갈아 타고
운전기사님께 길을 물어물어 정류장에 내렸다.

전화기가 흔하던 시절이 아니였기에 공중전화를 찾기도
만만치 않았고, 겨우 찾아서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니 오는 길을 일러 주셨지만
일러준 약도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기에 길거리에서
걷기만도 한두시간이 지나고 곧 어두워져서 큰집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였고, 동생은 배가 고프다고 칭얼댔고, 아버지도 더는
형님댁을 찾기를 포기했으나, 시간이 꽤나 지났다.

더는 어두워서도 못찾고, 더는 피곤하고, 어린 아이들 때문에도...

아버지는 이제 여인숙을 찾아 우리를 잠깐 세워두고,
바지런히 부산하시더니 이내 우리를 찾아, 찾아들어간 곳은
마당 한가운데 세면장이 있고, 방문이 일렬로 쭉 늘어선,
그곳 중 한 방을 우린 들어갔고, 신발은 신문지를 펴서
방 한구뎅이에 놓아두고 잠시 누웠으나 허기진 배를 어찌 할 줄 몰랐다.
주전자와 컵이 있어 물을 마셨지만 허기를 채우기는 어림없었다. (6/1/2017)

 

 

 

"잠시만 기다려라 아버지가 맛난 것 곧 가져올테니"
그리곤,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정사정하는 소리가 들렸고,
손수 남비를 빌리시고, 라면을 사오셔서 방 앞에 있는
연탄아궁이에서 라면을 끓여 오신 것이다.
"어여 먹자"
"네, 헌데 아버지는 왜 안드세요" 형이 물으니,
"난 끓이면서 좀 먹었다, 니들 불기 전에 많이 먹어라"
큰냄비를 빙둘러 앉아 형과 나, 그리고, 은숙이는
쫄깃하고, 맛난 그 라면을 맛나게 먹었다.

 

아버지는 한쪽에서 담배를 피고 계셨다.-지금에서야 아버지의 담배를 알겠다-

아버지가 끓여주신 라면은 귀하기도 하였지만,
사랑과 우려가 가득 담겼었고, 안타까움이셨겠지만
어린 우리 형제에게는 특식이였고,
피곤함을 잊게하는 힘나는 드링크였고,
허기진 배를 불리는 최고의 한끼 였고,
추석 명절에 먹어보는 진기한 음식이였고,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이였다.

그 라면은 내 인생에서 최고 였다.

그렇게 최고의 한끼인 라면을 맛나게 먹곤,
우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닦고, 다시 큰집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 못찾게 일부러 명절 전에 이사간거야" 하시는 어머님은
못됐다며 화를 내셨고, 아버지는 또 아무말도 없이 담배를 피우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서글픈 추석은 덧없이 지났지만,
그날 먹은 그 라면은 평생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였기에
지금도 고이고이 한켠에 잘 간직하고, 내 아이에게
내가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베풀고 있다.

"아버지^^, 그날 먹은 그 라면은 제 인생에서 최고의 진수성찬이였습니다."

 

 

우선 나! 나를 알려주마^^

난 충북 청원군 강외면에서 나서, 유년기를 촌놈으로 살다가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입성했고, 서울시 영등포구 공항동 에서
서울송정국민학교와 공항중학교를 거쳐, 장훈고등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를 다녔고,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
발칸포병으로 3년이 좀 안되는 군생활을 하였고,물론 현역으로다.
대학을 졸업하곤 여전히 똥골에서 살았고, 다우여행이라고 첫 사회생활을 했다.
그리곤 결혼을 하면서 장승백이로 이사해 살았고,여행사도 여러곳을 거쳐서
지금의 #허브투어 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 모두투어구로구청점 이다만 잘 운영하고 있다.-

사는곳도 영등포구 대림동 성원아파트로 살이가 나아졌다기보단 아내의 힘으로
조그마한 아파트에 우리4식구 아웅다웅 행복하게 잘도 산다.ㅎ.
그리고, 난 잘 생기지는 않았어도, 못생긴것도 아니며, 처음 만나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아주 평범하면서도, 첫인상이 좋은 아저씨다고
믿을만한 그저그런 얼굴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내겐 커다란 장점이다.
키는 반올림하면 2미터가 되고, 영준이보단 좀 크고, 
용복이보단 아주 조금 작으며,
잡으면 100근이 넘는 중간치 돼지만큼의 몸무게를 훌룡하게 굴리며,
오늘하루도 열심히 잘 살고 있고, 지금처럼 글쓰기를 좋아해 별걸 다 쓴다고 쓰고 있다.

 

 

다음은 친구,

하~~~~~아~~~~~~~~~~~~~
어떻게 써야하나...., 좀 있다. 우선 국민학교 동창이 700명이 넘으니 똥골친구가

적어도 1000명은 넘을것이고, 고교친구가 420명 정도에 선배,후배를 합치면
이또한 1000명 안되겠나한다. 대학은 47명이 졸업했으나 그래도 300명정도는 알고 지내며,
사회생활하면서 만나는 23년간의 총합체가 1만명은 넘으라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면 12,300명은 통계적으로 안다는데, 전화를 아무생각없이 할 친구가
몇이나 될까? 나도 궁금해 진다.
니가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전화할께^^, 그래서 친해지는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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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정말 있다만 우리네 어린시절 읽었던 내 목숨을 내놓아도 후회하지 않을 친구가
몇일까? 그도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친구가 과연 있기는 할까? 결론은 난 모른다다.
그렇다고 인생을 헛살은건가?하니 그렇치만은 않고, 이부분은 정말이지 복잡하기도하고,
편을 만든다는 애매모함이 있어 죽을때까지 안고 가야겠다.
한가지 확실한건 알거지가 되어도 한달은 살 수 있을것 같음은 자부한다.ㅎㅎㅎ

 

아는사람,

난 주변머리도 많고, 속알머리도 많아서 안면이 있거나 조금만 
앉아서 이야기하면
금방 형이고, 동생이며 누나고, 형수다. 어디에 내다놓아도 
굶어죽지 않는다가
울마눌의 지론이다. 그러니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한잔할랏치면 
30분이면 주위에 있는
모든사람이 아는사람이고, 형이고, 동생이여서 자기집에 죽어도 
가야한다고 해서
남의 아파트에서 눈부시시하고 일어난 적도 있다. 
얼마나 쪽팔리고, 난감한지....
그리고, 인사성도 밝아서 아무에게나 "안녕하세요"한다.그러면 
자연스레 다음엔
그낯선사람이 내게 인사를 하고, 난 자연스럽게 그 인사를 받으며,그냥 아는사람이 된다.
굳이 그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아는 
사람이 된다.

아는 사람중에도 등급을 혼자 매긴다.ㅎ 별짓을 다한다.
잘아는사람:허심탄회는 아니여도 나를 막 떠벌리며
나란놈을 알린다.
아는 사람:간단한 이야기정도를 나누고, 술이라도 마실 일이
있으면 정중하게 두손으로 받고 주는 정도.
그냥 아는 사람: 가볍게 인사정도 나누고, 탐색전을 통해 
내안으로 끌어들일정도.
사교성 하나는 타고 났다.

그래서, 울 마눌님은 피곤하단다.

 

 

마무리도 야무지게~~~~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이유는 난 우선 튄다.

내 좌우명은!!!
"1.크게 웃어라 
2.빨리 걸어라 
3.상대방보다 먼저 아는체 하라
4.이야기할땐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라 
5.언제나 맨 앞자리를 이용해라"가 내 모토다.

이런 이유에서 먼저 말하고, 상대방보다 먼저 아는체하니 마다하지 
못하게 만들고,
크게 웃으니 말하는 상대방이 좋아라하며 자기 이야기를 다 들어주니 
난 좋은 놈이고,
노래도 적당하게 잘하고, 더불어 춤도 춰주니 좋아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많다.
그건 내가 영업하는 여행사(#허브투어) 입장에서는 커다란 장점이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울 마눌님의 주머니에서 나오려면 돈을 많이 
벌어다 주어야 하는데
개도 안먹는다는, 돈이 벌기가 결코 쉽지 않은것이 내가 아내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이유다.

나와 친구와 그리고, 아는 사람은 모두가 소중하며, 
내가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는 내가 사는 목적이기도 하며,
내가 사는 이유이고, 오늘하루도 열심히 사는 이유이기도 한다.

이글을 읽는 이는 친구이고,선후배이기에 더 좋고, 이글에 댓글을 달아주면 
더없이 행복해 한다만 내욕심만 부릴수 없음이
내가 친구들에게,아는 이에게 보여준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지럽게 쓴 글을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복받을껴.

 

 

http://blog.daum.net/enature/15854663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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