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내 친구 박용섭의 어릴적부터 살아온 서울 이야기 (연재중) 3]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7. 2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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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은....2

일찍 결혼하셔서 고향인 오송에선 더 이상 살 수 없어 무작정
아버지의 육촌형님이 계시는 미아리를 찾은 것은 내가 5살때 였고,
우리는 당장 추운 그 겨울을 보내야 했고, 여유가 없었기에
아저씨네와 한방에서 얼키고, 설키며 11명의 대가족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육촌아저씨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지팡이와 밥상을 만들면 아무런 기술없이
농사만 져오던 아버지는 그걸 매고, 들곤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떤 날은 지팡이와 상도 팔았지만, 가지고 나간 물건을 그대로 들고 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파는 것이 많아질 수록 아버지는 웃으셨고, 오는 여름엔 아저씨의 큰방을 벗어나
"ㄷ"자로된 그집의 문옆으로 짐을 옮기고 부모님과 형과 나, 여동생의 질기고도
기나긴 서울살이가 시작 되었다.

우린 그곳에서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의 다른 사촌의 도움으로
요리사일을 시작하셨고, 눈썰미가 좋고 잘 생기신 아버지는 열심히 잘 하셔서
자격증도 따시면서 다섯가족은 제2의 고향인 김포공항 정문에서 멀지않고, 
인천을 가는 똥골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27년을 넘게 살았다.

 

 

소풍은,,,,,3

그 안은 참으로 열악했다.
살이가 나아지진 않았으니, "ㄱ"자 형태의 그집은 다섯개의 방이 있었으나
방과방 사이는 쪽문이 있어 통할 수 있었으나, 막아서 통과는 못하고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도 거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울 여유도
없어서 아침일찍 일어나 각자의 일터로 떠나고, 
단, 하나뿐인 화장실은 전쟁이였고,
가득 차면, 돌아가면서 화장실을 비워야했다. 이땐, 그래도 집을 나와 조금 
걸으면 논과 밭이 많아서 그곳에다 밤에 몰래 퍼다 나르곤 했다.

그 집에서 막내 여동생은 태어났고, 그 동생이 벌써 40대 중반이다.

어머님이 병원에 갈때면,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때도 어머님이 걱정하시고, 약간은 두려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나 
병원에서 나오실때면 기운이 하나도 없으셔서, 내손을 꼭 잡고
의지하셨고, 집에 오시면 한동안은 누워 계셨다. 
이 일은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건 낙태수술이였다.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성실하신 아버님 덕에 우린 배는 골치는 
않았으나, 좁은 마루 한켠에 늘 자리를 차지한 곰이 그려져 있는 
밀가루를 중학교에 가서야 보지 않았다.

그러니 국민학교를 다니던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육성회비라는 누런봉투는 두려움에 대상 이였고, 
단, 한번도 일년치를 못내서, 도장을 한개, 혹은 많아야 세개정도가 
끝이였다.

6학년때는 점심시간이 제일 싫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난 운동장으로 나와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는 날도 여럿되었고,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싫었다.

 



소풍은,,,,,4.

하루는 나가려는 나를 선생님이 붙잡고, 아이들에게 일러 
도시락 뚜껑에 한숱가락씩을 퍼담은 뚜껑밥을 내밀어서 
여러번 그 많은 밥도 먹었으며, 친구 태희의 "난 밥이 많아" 
하며, 자기가 싸온 도시락의 절반을 덜어서 같이 먹자고해 
같이 먹기도 했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강제로 먹으라 해서 
먹는 것도 아닌, 혼자서 수돗가와 그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는게 싫었다가 정답일 것이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같은 아이들이 점심시간엔 도대체 
뭘하며 놀고, 뭘 먹고, 선생님의 배달 받은 자장면의 맛난 냄새와
함께,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런 와중에도 소풍날은 일년에 두번은 돌아왔고, 
그때마다 밤잠을 설치고,
"우리학교는 학교가 생길때 수위아저씨가 하늘을 나르는 
용이 될 이무기를 삽으로 죽여서 학교에서 행하는 행사에는
매번 비가온다"는 전설도 내일만은 비켜나가길 바랬다.

"용섭아 오늘 소풍은 가지 마라"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울면서 
"갈거야" 하고 맨 몸으로 나서기도 하면, 답답한 어머님에게 
얻어 맞기도 하고, 더는 말리지 못하기에 도시락에 맨밥을 
싸주기도 하셨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서 그 밥을 먹지만, 어린 난 김밥이 
너무도 먹고 싶었다.
김밥에 들어간 소세지나 햄을 넣은 것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삶아서 한가득 가져온 계란도 먹고 싶었고, 파란 유리병에 
거품도 나는 칠성사이다도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즐거운 소풍의 하루는 끝났고,-----다음~~~

 



소풍은... 마무의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성실하고, 재밋게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요리실력이 나아지면서 직장을 옮기고, 
집도 사서 이사도 했으며

그때부턴 소풍날엔 김밥에 소세지와 계란지단도 넣고, 
시금치도 넣은 것을,

기름에 두른 후라이판에 살짝 구워서 먹기 좋게 썰어준
엄마표 김밥을 원없이 먹었고, 
사이다는 물론 알콜 음료도 마시며 키득키득거렸다.

자라면서 온가족이 단 한번도 소풍을 가지 못해서 결혼하고, 
아내와 아이들 손을 잡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도시락을 싸서 
가기도 하고,

먹을 것을 잔뜩 싸서, 부모님을 모시고 1박2일의 원없는 
소풍놀이를 한다.

일 또한 여행업이여서 고객과 세계 곳곳을 누비며 소풍을 
다녀오지만,

난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소풍이 제일 소중하며, 고맙고, 
감사하고, 온가족이 함께한 제주도에서의 2박3일은 
사는동안 날 행복하게 한다.

 



ㅎㅎㅎ. 별걸 다 쓴다.
상상은 하지마라.ㅎㅎㅎ.

1.화장실이 너무 멀다.

재수를 8월부터 시작했다. 그전엔 거의 합격통지만 오면 된다는 
그것이 7월23일 발표여서
판판이 놀아도 되는 그런곳이여서 충격은 컷다.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하고, 부족한 과목은 서대문의
정진학원에서 보충하며 정신없이
공부했고, 대학에 합격을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응준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파트너는 
딱히 없었지만 여성도 몇되는
그런 자리를 만들기로 했고, 술은 염창동에서 식당을 하시는 
전근이 어머님께 부탁하고,
장소는 가양동의 어느 허름한 지하 다방을 빌려서 십여명의 
친구들이 다방이 끝나는
시간에 집결하여 탁자와 의자를 정리하고 나머지는 한쪽으로
몰아서 아득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해의 겨울은 엄청스레 추워서 밖에 놓은 맥주가 
얼어서 녹여 먹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얼근하게 술이 오르니 밖에 있는 화장실이 너무도 멀었다.
빈병이 많아서 후미진곳에서 해결했다. 
그리곤 다시 박스에 넣었다.
그리곤 정신없이 노느라 술도 얼근하고, 취기가 돌때,
"맥주 아직도 남았냐"
"조금 있을걸"
"내가 갔다 올께"

얼은것이 녹기도 했고, 실례한것도 있었다.

"와 이건 너무 녹였나 봐"
"왜"
"뜨듯한게 좋아"
그러더니 잔에 따르고, 마신다. 뭐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난 안먹었다

 



화장실이 너무 멀다.-2-

82년에는 1리터짜리 콜라병이 나오던 해였다. 자취하는 친구들이
방에가면 언제나 있었고, 빈병도 여러개 있다.

그방에 너댓명이 소주와 맥주, 그리고 막걸리도 받아서 간단한 안주와 먹는다.
함께하는 녀석들이 사내놈들만 있으니 뭘 가리겠는가?
"오줌마려, 화장실은 어디냐"
"밖에나가 아무데나 봐"
"그럼 이병에 넣도 되냐?"
"니 맘대로"
""졸졸졸"
그리곤 술도 한잔했겠다, 흔들거리다 부딫이는 촉감이 성이나버렸나보다.
"야 이거 안빠져"
일행은 우르르 가보고 박장대소
"야 새꺄, 딴생각해,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봤을까? 봤겠지.

또 종문이하고 여럿하고 술한잔을 했다. 
이때 처음으로 "캡틴큐"란 술이 나왔다
처음에 이술을 마시고, 나머지는 늘상 먹는 술을 마신다.
여름날의 언제여서 종문이가 감당이 안되서인지 형님이 오셔서
날 들쳐업고, 집엘 데려갔나보다. 
저녁이 시작되는 그날에 막내친구들이 =중삐리-
안방에 오골오골 모여 있다가 작은오빠가 술이 
떡이되서 큰오빠 등에 업혀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황이 퍽이나 충격이였을 것이다.
"상길아 수도가 좀 정리해"
"네,형"
"아휴 무거워, 아~녀석 얼마나 먹은거야, 형 좀 받아라"
그리곤, 사촌동생인 상길이는 뒤에서 나를 빽허그해
수도가에 곱게 내려 놓는다. 
그리곤 ...
""상길아 형 청바지 좀 벗겨라"
"네"
나야 이미 맛탱이가 가서 옷을 벗기는지 입히는지 
전혀 알턱이 없고,
이때 입은 빤추가 오토매틱이여서 바지의 지퍼만 내려도 
자동으로 고추가 턱 나와서 볼일보기가 편한 그것이였다.
청바지를 내리니
"꺄~아~~ㄱ~~~~~~" 
막내 친구들이 얼굴을 가렸다는데,
얼굴만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

 

 

 



산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뭐 여행사사무실(#허브투어)이니 대부분 오시는 분들은 기분이 좋으셔서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간혹 급한볼일때문에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땐 저도 급해지기도합니다.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습니다. 무차별 난사하는 라디오의 소음은 때론 감동도 주고 ,때론 분노를 일게도 합니다. 상상력도 대단하게 만들곤합니다.

가끔씩 출장가는 외국에서도 길에서 한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는건 다 똑 같은 모양입니다. 사람은 가장 확실한 진리를 압니다. 반드시 죽는다는것이지요.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지는지는 각자의 몪입니다.

제가 사는 삶이 정답이다.이건 절대로 아닙니다. 지구상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삶이 있습니다.정답또한 없다고 봐야지요. 물이 차면 넘치는 이치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고이면 썩고,냄새 또한 진동합니다. 물은 흘러야하듯 돈도 고여있으면 삮습니다. 돈도 물과 같이 돌아야합니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것 같습니까?

일생을 살면서 처음보는 얼굴은 불과 1억명도 안됩니다. 전생애를 통해서 만나도 우리가 보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숫자는 그보다는 더욱 적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은 많으나 나를 아는 사람은 정말 몇 안됩니다. 어린 나이였을땐 집을 뛰쳐 나가도 갈곳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갈곳도 없거니와 반겨주는 이도 없습니다. 한살한살 먹으면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집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야합니다. 그 행복은 노력없인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살아서 몸도 부지런히 놀려야 굳지가 않습니다. 죽으면 썩을샥신 살았을때 행복하게 하자구요. 오늘하루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진지한사람,그늘이 가득한사람,웃는사람,우는사람등 다양한 인간 군상은 오늘하루도 최선을 다하며 오늘하루를 보낼것입니다. 이왕 하루를 살것이라면 웃으면서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고 싶습니다. 파랑새는 멀리있는게아니라 내집 처마밑에 있다는 이야기를 모두는 알것입니다. 살아있다는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는 제겐 행복입니다.

여러분의 오늘하루을 응원합니다. 모두 행복하십시요.힘차게 박수를 보냅니다.^^

 



나 하나 없어도 잘 돌아 간다.

난 여행사를 운영하는 행운으로 가끔 해외출장을 다녀 온다.
난 집에도 없다.
난 사무실에도 없다.
물론 한국에도 난 찾지 못한다.
그렇게 난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한국은 돌아가고,
사무실도 나 없이도 아내가 잘해서 돌아간다.
집도 나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

물론 난 살아 있다. 단 출장을 가있는 동안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가끔 먼저간 친구나 지인들을 생각 할 때가 있다.
내가 출장을 갈때가 그런 생각이 나서 씁쓸할때가 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이 밉기도 하지만,
어쪄랴~! 살아 있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인것을...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은 정말이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도 열정적으로 말이다.

살아있다는것은 참으로 행복이고, 내게는 커다란 축복이고, 행운이다.

열심으로 쌔빠지게 일하고 ,사랑하고, 감동하면서 살자.^^

 



아빠로서 듣는 우리공주님의 최대의 찬사.

애엄마가 허리를 삣끗하여 일주일째 한의원을 다닌다.
한의사님 왈 "절대 안정을 취하고,절대로 무거운것과
허리를 구부리는 일은 삼가하십시요"다.
안한것은 아니지만 피곤을 핑계로 설것이도 하던것을
아내의 아픔을 핑계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는 내 담당이
되어서 열심히 닦고 있고, 오늘 아침에는 머리가 가렵단다.

아침운동을 마치고 다녀오니 아내가 "머리 좀 감아줘"한다.
알아다며 옷을 갈아입고, 호수도 길게 늘여서 대강 준비를 마치곤
아내에게 누우라한다. 그래야 화장실 문턱에 머리만 남겨두고
거실에 눕는 정도이지만 어쪄랴.ㅠㅠ

그리곤 아내의 머리를 감기는데 그 하는양을 바라보는 
큰공주님이 한마디 거든다.

"엄마는 자상한 아빠만나서 호강하는 줄 알라고"
나도 아빠같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고"

아~~~~~~~~~~~~~~~~~~~~~~~~~~~~~~~~~~~

난 이 한마디에 뽕간다.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딸아이가 아빠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단말이 너무도 좋다.ㅎㅎㅎ

기분 좋게 아내 머리 감기길 마치고 나도 샤워를 한다.

토요일 아침 아이가 아빠를 감격하게 한다.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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