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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2010.06.16
김철수가 걸어온길부터 소개한다
● 1893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新安) 주씨(朱氏) 사이에서 태어남
● 1906 김아로와 결혼. 3남 2녀 낳음
● 1908 한학자 서택환을 만남. 군산 금호학교에서 신학문 공부.
● 1912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 입학
● 1915 일본 유학생들과 비밀결사 ‘열지동맹’ 결성
● 1916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반일단체 ‘신아동맹단’ 조직, 귀국
● 1920 사회혁명당 결성(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등)
● 1921 고려공산당 창립(상해), 재무담당 중앙위원, 코민테른 자금 40만루블 관리
● 1922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피선
● 1923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참가(상해)
● 1924 귀국. 거주제한조치 당함. 전북민중운동자동맹 가입
● 1925 조선공산당 입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피선
● 1926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 피선
● 1927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2차대회를 승인받음, 서울 상해파 결성
● 1929 길림성 돈화현,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
● 1930 귀국, 체포, 치안유지법 최고형 10년 선고
● 1938 대전형무소 출옥
● 1940 서대문 예방구금소 구금
● 1945 공주형무소 출옥,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피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전형위원 피선
● 1946 3당 합당문제와 관련하여 박헌영에 반대, 무기 정권 처분 받음, 조선공산당 당대회 개최 주도, 중앙간부 전형위원에 피선, 사회노동당 임시중앙위원회에 피선
● 1947 사회노동당 해체, 정계 은퇴, 고향 낙향
위 연보에서 보듯이 지운 김철수는 일제 하 민족주의 진영의 거두였다. 그런 그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는 사상적 이유로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이라 할 수 있다.
▲ 일생의 스승 서택환 선생 묘비 앞에서(1978년)
역사에 묻힌 이름, 지운 김철수
지나간 역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자 미래 삶에 대한 방향타로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와 미래 그 연속상에 있는 것이리라.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회체제와 생활양식이 있었고 그 시대상황에 이를 받쳐주는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상 속에서 수많은 선각자와 행동가들이 명멸하면서 민중들과 함께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의 근세사와 현대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타의에 의한 문호개방으로 역사적 전환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근현대 100년, 격동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 시대적 상황 속에 조국의 광복과 통일에 온몸을 던졌던 부안 사람 지운 김철수가 있었다.
대결적 정치 상황 속에 묻혀진 이름으로, 구름에 가리워진 밤하늘의 별빛처럼, 언젠가 후세인들이 그에게 씌워진 왜곡된 사상의 질긴 껍질을 벗겨주기를 고대하고 있을 지운 김철수!
부안이 낳은 위대한 선각자이자 사상가,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1893년 이 땅 부안에 와서 1986년 3월 16일 94세를 일기로 그가 염원하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 하나. 스스로 지운당이라 이름지은 토담집. 벽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의 서호(恕乎)라는 글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생전에 그는 『본대로 들은대로 생각나는대로』, 『해방후 동작개요』등의 친필유고와 녹음 증언을 손자 김소중과 제자 정진석 등에게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서거 13주년인 1999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지운 김철수」자료집을 출간하면서 그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은 지운 김철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국내와 만주, 일본, 중국, 소련 등을 오가며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에 몸바쳤던 인물, 하지만 이념 대결 상황의 남북 정치 구도 속에서 고난과 감시 속에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거인 김철수, 그가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 인물의 사상과 일생은 그 시대적 상황과 함께 설명될 수밖에 없다.
▲ 생전에 거처한 지운당(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산 28 소재) 삶의 족적을 따라서
지운 김철수는 1893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본관은 광산으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新安) 주씨(朱氏) 사이에 5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구 씨는 당시 뱃길이 닿는 동진강수로를 이용한 쌀 위탁 판매업으로 꽤 돈을 벌었던 넉넉한 소지주였다. 그러면 지운 김철수의 출생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여세를 몰아 1876년 2월17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시켰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을 했던 일본이 불과 22년 만에 메이지 유신을 거쳐 산업화를 완성하고 제국주의 대열에 서서 조선을 개항시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과거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갔던 문물의 이동이 이제는 거꾸로 제국주의 열강과 함께 일본에서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10년 집정이 끝나고 왕후 민씨 일파가 주도하는 국왕 고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의 골자는 부산 외에 두 개의 항구개방과 통상 허용, 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일본화폐 통용과 관세철폐, 조선 해안 측량 등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서양 제국주의에 문호를 개방한 계기가 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본토의 만성적인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쌀을 싼값에 사들이기 시작했고 미곡수출이 증대하자 소작농으로부터 지대를 곡물로 거둬들였던 지주들은 토지에 재투자하여 대지주로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지주들의 성장 이면에는 일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고 또 일본은 몰래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집중적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당시 정부가 시행했던 토지조사사업은 지주들의 성장을 법적, 제도적으로 뒷받침 해주었을 뿐 토지개혁은 물건너가고 있었다. 거듭된 흉작에도 일본 상인들의 미곡매입은 계속 늘어 곡물가격은 급등하고 이 와중에 관리들의 횡포와 가렴주구가 겹치면서 소작농들까지도 노예로 전락하고 있었다.
당시 무역상황을 보면 일본은 대중용 저가품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팔고 조선의 미곡을 일본에 실어가는 구조가 자리잡게 되어 가내 수공업 형태의 국내 면직물 생산조차 중단되었고 계속되는 미곡수출로 소수 지주층의 성장과 대다수 농민들의 가난이 더욱 가속되었다.
이로인해 전국 각지에서 움트기 시작한 민란은 마침내 동학혁명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조선사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호남을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한 지주계층은 조선의 새로운 주도층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김성수가(家), 백관수가(家)가 그 예이다. 지운 김철수 또한 쌀 위탁판매업을 했던 부친 김영구 씨가 돈거래 문제로 함경도 출신 변호사 허헌(許憲)을 내세워 김성수가와 재판을 벌일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유한 신흥 부유층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자가 김철수를 낭만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은 부유한 지주 출신의 자제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김철수의 성품을 볼 수 있는 단면을 구술자료를 통해서 보자.
“내가 출생하기는 소지주집이서 났어. 한 벼 천석이나 받어. 아버지가. 그래. 소지주의 대농가라. 삼백 한 오십 정도 농사를 지었던 말이여, 그때. 그런게 대농가고 소지주집에서 났는디, 내 자신이 어떻게 해서 어려서 아주 어려서버터 그 조금 달랐었단 말이여. 무엇이 그랬는고 허니, 똑 교동으로 커 나서 할아버지가 여간 사랑해주고 그랬들 안했는디, 아버지가 독신이거든.
그런디, 내가 지금까장도 어찌서 내가 그 저 위험한 혁명운동 그런디 참가할라고, 특히 없는 사람에게 동정을 허고. 여섯 살 먹어서버터 그랬어. 걸인이 오믄 밥을 내가 갖다주고 동냥을 내가 주기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울고 그랬어. 그래서 밥을 갖다 저 문앞에다 주면 밥을 어떻게 맛있게 먹는지, 내가 내 밥그릇을 가지고 혼가 거기 가서 먹어보고 그랬단 말이여. 그런 것이 어찌서 그랬는가 내가 시방도 몰라. 그래 그 동냥을 돈을 주던지 나락을 주던지 쌀을 주던지 내가 갖다주어야 좋아허고 남 그 동정허기를 좋아했어. 그래서...”
그는 지주 집안의 부유한 출신이었지만 인본주의자였다. 넉넉하고 후한 성품으로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극한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도 유교적 선비정신과 함께 항상 합리적이고 따뜻한 인간적인 품성을 지녔다.
김경민(본보 전 대표이사) ibuan@ibuan.com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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