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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백산고 교사) | 2009.03.23
80년대 초 12월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저녁때에 몸집이 작은 한 노인이 부안 읍내 구시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최가축 병원 앞에서 2시간여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중절모에 정갈한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그가 가진 모든 것처럼 보였다. 다른 갈만한 곳도 마땅치 않은지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처음처럼 앉아 있었다. 한 시간여를 더 기다리자, 그 때야 출장에서 돌아온 최원장이 노인을 모시고 병원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추운데 이렇게 밖에서 떨면서 계시면 어떻하신다요, 다른 집에라도 들어가시지…” 걱정하는 말이 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백두산 호랑이처럼
추운 곳에서 떨고 있었던 구순의 노인은 독립운동가 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 1893-1986)였다. 그의 추모비에는
당신은 일제강점기 한, 일, 중, 소 넘나들며 민족해방에 온몸을 바쳤습니다. (중략)
생사 넘나드는 옥고 14년에 맞은 해방의 감격 속에서 민족의 단합된 통일조국을 이루려 헌신하였으나 국내외 정세에 환멸을 느껴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했습니다. 겨울 칼바람과 같은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외딴 한 칸 토담집에서 통일의 봄꽃이 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의연하게 이겨냈습니다.
그는 백두산 호랑이처럼 표호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한국과 일본, 중국과 소련을 넘나들며 싸우던 전사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과 싸웠다. 모진 감옥살이도 조국에 대한 그의 간절한 사랑을 끊지 못했다. 일본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치 않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감옥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독립운동을 위해 택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조국해방을 위한 도구였을 뿐인데, 현실은 이데올로기라는 유령의 집으로 김철수를 몰아넣고 단죄했다. 그가 몸 받쳐 일본과 치열한 싸움에 나선 것은 오로지 조국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해방된 정국이 좌우익 싸움으로 변질 되면서, 조국해방을 방해하던 친일파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애국주의자인양 행동하는 볼썽사나운 일도 벌어졌다.
외로운 터
백산면 대수리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 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외딴집은 김철수가 손수 지은 것이다. 이 집에 살면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자신의 토담집을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 지었다.
이안실을 찾는 사람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토담집으로 스며들었다. 늙고 병들어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은 외로움에 갇히고, 이데올로기의 단죄에 갇히고, 친일파들의 황당한 매도에 분노하며 유폐된 방에서 어둡고 긴 침묵과 함께 살았다.
김철수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고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었음에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 하나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공안당국의 감시를 평생 받았다. 또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길따라 작은 기념관을
국가보훈처는 광복 60돌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철수에게 추서했다. 세상을 떠난지 10여년만의 일이다. 살아생전 감시를 일삼던 조국이 죽어서야 그의 항일 독립운동을 인정한 것이다. 그에 대한 서훈은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배워온 우리들에게 비로소 반대쪽의 독립운동사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 23주기를 맞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모습을 지켜봤던 지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면서 그의 이름도 ‘망각의 늪’속에 갇히게 되었다. 김철수를 끌어내어 ‘기억의 역사’로 다듬고 알릴 방법은 없을까. 이생에서 춥고 초라하고 외롭고,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살다 가신 독립운동가를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은 역사의 훼손이며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김철수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계획하면 어떨까. 자료도 모으고 기억할 수 있는 행사도 개최하여 그를 이제 밝은 기억의 광장으로 나오게 할 때이다. 부안만 해도 대수리에서 평교까지의 길, 하서의 큰 다리에서 딸이 살던 돈지까지 그가 걷던 길에 ‘지운길’이라는 자그마한 팻말이라도 붙였으면 좋겠다.
생전에 그가 할 수 있던 일은 주변사람들에게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 다양한 글귀를 써주는 일이었다. 작은 기념관에서 그의 조국사랑과 그가 써서 사람들 손에 쥐어준 묵향(墨香)의 그윽함을 만날 수 있다면, 그를 평생 옥죄었던 감시와 외로움을 벗고 망각의 늪에 유폐된 그를 역사의 진실로 끌어내는 작은 출발이요 예의가 아닐까.
정재철 (백산고 교사)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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