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장, 그리고 기나긴 14년 감옥살이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5>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12. 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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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전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 2010.08.04


▲ 지운 김철수의 붓글씨


ML(맑스 레닌)파의 횡포

여기에서 ML파(맑스 레닌)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운이 상해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할 때 고려공산당 만주 총국 산하에 공산당 청년회가 조직돼 있었다. 조봉암, 김단야, 박헌영 등이 참여하여 제1차 청년회 서기에 조봉암, 2차 권오설, 3차가 박헌영이었다. 일크스크파 공산청년회 서기로 있다가 국내로 들어온 박헌영은 화요회를 조직한다. 그래서 화요회의 주축이 공산청년회 출신들이었다. 공산청년회 대표는 공산당 간부회의에 당연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 산하 에서도 만주총국은 서울 상해파와 화요회, ML파가 파당을 이루고 있었다. 만주 총국 내에 비밀스럽게 만들었던 ML파는 조선본토에 들어와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조선공산당 내에서 ML파를 만든 것은 공산청년회 대표 고광수였다. 고광수는 원래 시베리아 공산당 청년회 출신으로 러시아 공산대학을 나왔고 박헌영계 화요회의 주요 간부였다.

조선공산당을 수습해야할 지운으로서는 당시 국제공산당 서울 파견 연락원과의 소통과 내밀한 조직 활동에 고광수가 필요했다. 숨어 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개인 일은 친동생 광수 씨에게 그리고 당 일은 전부 고광수에게 연락을 맡길 정도였다.

고광수는 이러한 지운의 신임을 이용하여 지운 모르게 조선공산당 내에 화요파를 중심으로 ML파를 확장해나갔다. 고광수가 ML파의 비밀지령을 받고 모스크바에 먼저 나가있는 사이에 지운은 고광수의 ML파 조직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지운은 어렵게 성사시킨 제2차 조선공산당 대회를 승인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주로 화요파들에게 ML파 실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와 있던 ML파 고광수를 국내로 쫓아내는 한편 공산당 내 유태계와 ML파의 모함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27년 5월 우여곡절 끝에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련공산당 간부를 만나 조선독립을 위한 사관양성소 설치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근해 어업권을 받아내고 국내로 들어온다.

그해 27년 10월 간도에서는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만주총국 책임자 최원택 등 주요간부들이 일경에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지운이 국내에 다시 돌아왔을 때 조선공산당은 완전히 ML파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ML파로 돌아섰던 책임비서 안광천은 살해당하고 선전부장 김준연마저 쫓겨난 상태였다. 당을 장악한 ML파는 당을 살려내기 위한 지운의 진정과 호소를 무시하고 오히려 지운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다시 지운의 구술자료를 보자.

“나는 빨리 내지로 돌아와서 어쨋든 당중앙을 승인받아왔으니 앞으로만 깨끗이 진행해 달라고 했다. 오랫동안 파쟁에 지친 우리 당이고 모처럼 승인을 받아왔으니 피차에 반성, 회개하여 신정신으로 화기있게만 나가 줄터이면 나는 추천해 나가겠다. 내가 다 운동해놓고 왔으니 (사관학교와 자금지출) 나는 당간부 자리도 실타. 다음 원동에 있어서 그 사업을 추진하겠으니 일로부터서만 정신 일신해서 서로 붓들고 나가자고 도리어 사정하듯이 간절히 요청했던 것이다”

1928년 3월 ML파를 중심으로 제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최초의 노동자 출신인 책임비서 차금봉, 공산청년회 서기 고광수 등을 선임하고 조직 확대를 꾀했으나 그해 7월 당 간부들이 거의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조선공산당 재건설위원회, 위원장이 되다

지운은 괴로웠다. 자신의 사람 구별 못하는 어리석음과 못남을 자책하였지만 이미 ML파에게 밀려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일경을 피해 최남선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진에서 배밑에 숨어 러시아에 도착, 모스크바에 가서 자신이 만든 당을 해체시켜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928년 12월, 당은 해체되고 재건설 하라는 결정을 받는다. 이 결정을 받은 공산당 계열은 화요파는 화요파대로 따로 재건설 준비를 하고 지운의 상해파와 서울청년회는 블라디보스톡에 일단 집결, 그곳에서 960리를 걸어서 북간도 돈화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 지운이 위원장에 추대된다. 지운은 돈화에서 국내 조직과 내밀히 연락한다. 그 와중에 연락원이었던 아우 창수(훗날 국회의원이 됨) 씨가 본토에서 체포돼 징역을 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연락원들도 계속 체포되자 지운이 직접 국내에 들어올 것을 결심한다.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해 잠입, 체포
기나긴 14년 감옥살이

지운은 공산당은 해외보다 조선 내지에 결성해야한다는 신념으로 1929년 말경에 내지 조직 건설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다. 청진, 함흥, 원산을 거쳐 서울에서 동지들과 조직 회합을 하고 전북, 부산, 제주를 거쳐 다시 부산에 돌아온다. 부산에서 예전 열지동맹 친구인 양산 김철수를 만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호송된다. 그는 일본 법정에서 치안유지법 최고형인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변호사 김병로, 이인은 책임비서 김재봉이 6년을 받는등 다른 정치범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형량을 받은 지운에게 항소 제의를 한다. 그러나 지운은 ‘적의 법정에 포로로 잡혀왔으니 항소는 필요없다’라고 한마디로 거절한다.

경성형무소 독방에 갇힌 지운은 고문으로 실신하기도 했고 기관지염, 위경련 등 허약해진 몸으로 중병감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는 열악한 감옥 생활 중에 어렵게 국화 한 분을 얻은적이 있었는데 그 기쁨을 공산당 동지이자 같은 독방살이 친구 김동삼에게 일광욕장 마당 흙 위에 써 보였다.

別居何事多送迎 迎菊當夕又迎月 月白花白我心白 白莫相逆將奈別
멀리 동쪽에 달이 떠다니니 꽃달 마음도 희다는 뜻이다.

김동삼도 다음날에 화답시를 써보인다.
繞床諦視默連頭 繞床淸儀若不流 遠隔東籬如有感 消然相對也相求
국화는 동쪽의 달빛에 비춰야 하거늘 독립운동을 해야하는 우리가 왜 감옥에 있는가? 라는 뜻의 7언절귀 시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훗날 고향에 내려와 지운당을 짓고 마당에 꽃과 나무를 벗삼아 세월을 보냈던 지운이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지운은 국화 한 분과 친구 김동삼, 유리조각이나 못으로 변기용 종이와 마룻바닥에 글을 쓰는 재미, 그리고 몰래 갖다 주는 국내외 공산당 소식을 들어가면서 기나긴 징역생활을 견딘다.

1935년 지운의 감옥생활중에 그가 존경했던 이동휘가 간도 신안촌에서 사망한다. 경성형무소에서 정치범 4명을 고문치사하는 사건으로 지운을 비롯한 정치범들이 합세해 투쟁했다. 이 사건으로 일경은 지운을 대전형무소로 이감시킨다. 지운의 진술에는 그곳에서 간도사건주범 배동근, 김근, 박헌영 등 소위 정치범 동지들을 만나 비교적 비밀스런 소통의 자유도 맛보면서 지냈다고 한다.

1938년 10월 말 기나긴 9년 여 간의 형기를 마치고 대전형무소를 출소한 지운은 마중 나온 친구, 아우들과 유성온천장에 들렀다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감옥생활로 병약해진 육신을 추스른 지운은 다음해 여름 금강산에 오르는 등 조국산천과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1940년 여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경은 조선의 정치범들을 단속하기 위해 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한다. 지운이 사상보국연맹(친일단체) 가입을 거절하자 일경은 이를 계기로 다시 지운을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한다. 지운은 서대문 형무소, 함흥 등 8개 형무소를 거쳐 공주 형무소에이르기까지 다시 5년간 징역살이 하다가 당시 주목받았던 정치범 42명과 함께 공주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는다. 지운은 서대문 형무소 생활을 시작으로 해방되기까지 일제하에서 무려 14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그것도 거의 전 기간을 독방에서 지낸 것이다.

지운이 감옥살이 할 때 이미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대다수가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남은 민족주의자들도 독립운동을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일제 말기에는 김성수, 장덕수, 이광수, 조봉암까지도 학병독려 연설을 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박헌영계 공산주의자들은 지하에 숨어 공산당 재건과 항일투쟁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그래서 감옥에 오는 사람들도 민족주의자나 서울 상해파들은 거의 없고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이점이 훗날 해방 정국에서 박헌영계 세력이 항일투쟁에 있어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지운은 감옥을 나서면 공산당 이력이 훨씬 후배지만 박헌영을 내세워 공산당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에 다짐한다.

조선의 레닌이라 불린 박헌영을 말한다

이쯤에서 지운과 공산당운동의 오랜 동지이자 대립과 협력을 해온 박헌영에 대해 애기해 본다. 박헌영은 지운보다 7살 아래로 1900년 충남 예산에서 소지주로 정미업을 하는 부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몇몇 학자는 태생이 서자인 점이 박헌영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주장하지만 어쨌든 그는 향리의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심훈, 한설야 등을 만나게 되고 YMCA청년부 활동으로 미국 유학을 꿈꾸기도 했다.

경성고보 졸업반 때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상해로 망명, 1921년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일크스크파 공산청년회에 입당,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다음해 책임비서가 되기도 한다.

1922년, 모스크바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김단야 등과 함께 참석하는 계기로 공산주의 신념을 굳힌 그는 공산당 조직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려다 중국 안동현에서 신의주경찰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1년10개월을 복역한다.

1924년 출옥한 그는 신흥청년 동맹에 참여하였고 고려 공청회 중앙총국 책임비서에 선임된다. 동아, 조선일보 기자로 있다 공산당 활동으로 해직당하고 1925년4월, 조선 공산당 창립과 함께 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된다.

그러나 25년 11월, 상해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발각되어 다른 간부들과 함께 다시 구속된다. 재판과정에서 정신병자 행세를 한 결과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28년 연해주로 탈출, 모스크바에 가서 김단야의 추천으로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고 소련당원이 된다. 이때 베트남 호치민과 교우하게 되고 자신의 호를 써래와 농작물을 끌어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친 모양의 “이정”이라고 짓는다.

지운이 감옥에 있던 1932년 코민테른의 비밀지령을 받고 상해로 돌아온 그는 그 다음해 윤봉길의사 거사사건으로 조선 독립운동가 일제 검거에 나선 일경에 또다시 체포된다.

그는 6년형을 받고 지운이 있는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9년에 가석방 된다. 박헌영이 출옥하자 김삼룡, 이관술등이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조직해놓고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한다. 1941년 경성콤그룹이 발각돼 김삼룡, 이관술, 이현상 등이 체포되자 박헌영은 이후 5년여 동안 전국을 도망다니면서도 경성콤그룹의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해방이 되자 광주에서 벽돌공장 직공생활을 하던 그는 전주에서 출옥한 김삼룡을 데리고 해방 이틀 후 경성에 도착한다.

김경민(전 본보 대표이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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