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5_李喆珪技手

['충북 충주 노은면'의 '금방산' 지명 탄생의 사연]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2. 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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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를 통해본 증조부(曾祖父) 이철규 (李喆珪)선생의 흔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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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철규 선생은 부친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하자, 아마도 평안북도(平安北道) 희천군(熙川郡) 동면(東面) 면장을 사직하고 돌아와 농상공부(農商工部) 금광국(金鑛局) 기수(技手)를 하며 익힌 금광기술을 사용하여 1916년 9월 21일 이철규 선생은 용인(龍仁)사는 이석영(李奭永) 선생과 함께 충청북도(忠清北道) 충주군(忠州郡) 노은면(老隱面) 문성리(文城里)의 금방산(禽傍山)일대 21만3천150평에 금광업 면허를 받아 문성금광(文城金鑛)을 운영했다. 금광업면허를 취득하기위해서는 토지나 산야를 소유해야 한다는 금광면허업법에 근거하여 소유내지 공동소유하셨을 것으로 사료되고 1919년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참살 당할때까지 금광운영을 하셨다.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와 가신리(佳新里)의 금방산(현재명 국망산國望山)은 '금을 채굴하는 금광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라고 향토사학자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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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과 일본내각에 분기별로 보고한 조선 금광의 일본 반출통계에 의하면, 이철규 선생의 문성금광에서 1917년 총일본 반출량의 24%, 1918년 31%, 1919년 36%로 증가했다. 1918년 일본내각은 훈령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에게는 금광허가를 내주지 말고 내주더라도 금맥이 적은 곳위주로 내주도록 하라고 한다. 이부분이 1919년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참살한 이철규 선생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그리고 금방산이라고 불리던 지명이 국망산으로 바뀌어 조선인의 기억 속에서 금방산의 지명을 지워갔다. 아직도 충북 충주시 노은면이 고향인 사람 중에는 국망산을 금이 많이 나온다 하여 "금방산"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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