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친일파는 일제에 저항한 민족지사의 흔적을 집요하게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1907년 부친인 성우 이명직 대감이 고종과 함께 축출당할때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에 입소하여 금광국 기수로 관직에 들어 1915년 부친이 독살 당하기 1년전인 1914년 저 멀리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으로 위배아닌 위배를 당했다. 1915년 부친이 독살당한 후 1916년에는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의 금방산일대에 금광면허를 받고 문성금광을 운영했다. 1919년 고종 승하에 독살의문을 제기하다 일본헌병들에게 참살당했다. 31살의 짧지만 굵었던 이철규 선생의 삶 앞에 증손자로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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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철규 선생은 부친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하자, 아마도 평안북도(平安北道) 희천군(熙川郡) 동면(東面) 면장을 사직하고 돌아와 농상공부(農商工部) 금광국(金鑛局) 기수(技手)를 하며 익힌 금광기술을 사용하여 1916년 9월 21일 이철규 선생은 용인(龍仁)사는 이석영(李奭永) 선생과 함께 충청북도(忠清北道) 충주군(忠州郡) 노은면(老隱面) 문성리(文城里)의 금방산(禽傍山)일대 21만3천150평에 금광업 면허를 받아 문성금광(文城金鑛)을 운영했다. 금광업면허를 취득하기위해서는 토지나 산야를 소유해야 한다는 금광면허업법에 근거하여 소유내지 공동소유하셨을 것으로 사료되고 1919년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참살 당할때까지 금광운영을 하셨다.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와 가신리(佳新里)의 금방산(현재명 국망산國望山)은 '금을 채굴하는 금광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라고 향토사학자는 전하고 있다.
12-[7] (26世) 25代孫(목은20세,牧隱19代孫) 이철규(李喆珪, 丁亥1887년11월22일~己未1919년10월6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는 성우공 이명직 대감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농상공부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수업하고 대한제국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農商工部 金鑛局 技手)로서 해외 열강의 조선 잠식이 시작되던 그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등을 관리 하던 중책을 맡고 노심초사 했고 1914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을 지냈다. 1916년 충청북도 청주군 노은면 문성금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부친 이명직 대감과 4년 사이로 참살당한 애국지사였다. 부인 영일 정씨(迎日 鄭氏) 사이에서는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을 지낸 장남 이성구 와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는 유한양행에 근무하던 이용구 2남을 두었다.
참고:
1.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
2. 오촌당숙 영찬 숙부님
3. 고종황제 죽음의 비밀과 나의 증조부 이철규(李喆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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