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5_李喆珪技手

구한말 자료와 조선총독부 관보로 살펴본 이철규 선생의 삶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2. 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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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친일파는 일제에 저항한 민족지사의 흔적을 집요하게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1907년 부친인 성우 이명직 대감이 고종과 함께 축출당할때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에 입소하여 금광국 기수로 관직에 들어 1915년 부친이 독살 당하기 1년전인 1914년 저 멀리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으로 위배아닌 위배를 당했다. 1915년 부친이 독살당한 후 1916년에는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의 금방산일대에 금광면허를 받고 문성금광을 운영했다. 1919년 고종 승하에 독살의문을 제기하다 일본헌병들에게 참살당했다. 31살의 짧지만 굵었던 이철규 선생의 삶 앞에 증손자로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수 없다.

 

 

[1907년 광상조사기수교습소 제1기 수업증서]

 
31세 때인 1919년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 진언하다 일본 헌병에 참살당한 증조부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을 지냈던 이철규 선생의 19세 때인 1907년 (광무 10년) 10월 11일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 수업증서를 내 아버지 방원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다 내 누나가 발견하였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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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서를 보면 농상공부에서 최초로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만들어 광무 10년인 1907년 10월 11일에 제1기 기수를 배출하며 40호로 40번째 인물인 19살의 이철규 기수에게 수여한 수업증서다. 이 증서를 발행한 사람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년 11월 27일 충북 영동출생, 안동권씨, 자작 아들 권태환 세습, 1934년 3월 19일 사망)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으로 군부대신을 지내며 의병을 토벌한 친일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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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상조사기수교습소의 최고책임자인 광무기감은 이학박사 거지부충승이고 교관으로는 화학담임에 공학사 산내정, 채광담임 목전우오랑, 지질광물담임 전촌영태랑, 시금술담임 중천호태랑, 측량수학제도담임 복전천심으로 모두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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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임시키고 이철규 기수의 부친을 축출시킨 때이니 광상조사기수교습소에서 기수교육을 받던 내 증조부 이철규 기수의 마음이 헤아려져 마음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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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19세이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나이이니 비분강개한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15년엔 부친이 독살당하고 12년 뒤인 1919년엔 고종이 독살되었으니 마땅히 고종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셨을 만하다. 그로 인해 1919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기마헌병의 칼날에 참살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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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본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흔적 1]
 
1895년 탁지아문 주사로 대궐에 들어 1906년 규장각직학사(종2품), 1907년 궁내부특진관(종1품)으로 근무하던 이명직 대감은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함께 궁에서 쫏겨나 수원 동탄 돌머루에 칩거하며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을 독려하며 사회계몽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한 일본헌병이 이명직 대감을 독살하기 1년전인 1914년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인 아들 이철규 선생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으로 보내 부친과 떨어뜨려 논후 1915년에 그 부친 성우 이명직 대감을 독살했다. 고종 주위에 충신들의 암살과 살해는 고종이 승하한 1919년까지 이어진다. 1919년에는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던 이명직 대감의 아들이며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를 지내고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을 지냈던 이철규 선생이 일제에 참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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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를 통해본 증조부(曾祖父) 이철규 (李喆珪)선생의 흔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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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철규 선생은 부친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하자, 아마도 평안북도(平安北道) 희천군(熙川郡) 동면(東面) 면장을 사직하고 돌아와 농상공부(農商工部) 금광국(金鑛局) 기수(技手)를 하며 익힌 금광기술을 사용하여 1916년 9월 21일 이철규 선생은 용인(龍仁)사는 이석영(李奭永) 선생과 함께 충청북도(忠清北道) 충주군(忠州郡) 노은면(老隱面) 문성리(文城里)의 금방산(禽傍山)일대 21만3천150평에 금광업 면허를 받아 문성금광(文城金鑛)을 운영했다. 금광업면허를 취득하기위해서는 토지나 산야를 소유해야 한다는 금광면허업법에 근거하여 소유내지 공동소유하셨을 것으로 사료되고 1919년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참살 당할때까지 금광운영을 하셨다.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와 가신리(佳新里)의 금방산(현재명 국망산國望山)은 '금을 채굴하는 금광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라고 향토사학자는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에 분기별로 보고한 조선 금광의 일본 반출통계에 의하면, 이철규 선생의 문성금광에서 1917년 총일본 반출량의 24%, 1918년 31%, 1919년 36%로 증가했다. 1918년 일본내각은 훈령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에게는 금광허가를 내주지 말고 내주더라도 금맥이 적은 곳위주로 내주도록 하라고 한다. 이부분이 1919년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참살한 이철규 선생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그리고 금방산이라고 불리던 지명이 국망산으로 바뀌어 조선인의 기억 속에서 금방산의 지명을 지워갔다. 아직도 충북 충주시 노은면이 고향인 사람 중에는 국망산을 금이 많이 나온다 하여 "금방산"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2-[7] (26世) 25代孫(목은20세,牧隱19代孫) 이철규(李喆珪, 丁亥1887년11월22일~己未1919년10월6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는 성우공 이명직 대감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농상공부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수업하고 대한제국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農商工部 金鑛局 技手)로서 해외 열강의 조선 잠식이 시작되던 그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등을 관리 하던 중책을 맡고 노심초사 했고 1914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을 지냈다. 1916년 충청북도 청주군 노은면 문성금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부친 이명직 대감과 4년 사이로 참살당한 애국지사였다. 부인 영일 정씨(迎日 鄭氏) 사이에서는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을 지낸 장남 이성구 와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는 유한양행에 근무하던 이용구 2남을 두었다.

 

[애국지사 이철규, 그는 누구인가?] 

 

참고: 

1.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

2.  오촌당숙 영찬 숙부님

3. 고종황제 죽음의 비밀과 나의 증조부 이철규(李喆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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