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6.25 피난민 1호 이승만]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3. 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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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피난민 1호 이승만이 전라도로 토낀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대구 거처 부산 가는 게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고 무장게릴라에 잡힐 수 있을지 모르니 사람들이 순박한 전라도로 피난 여정을 잡아 이리 거처 목포로 가서 배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창경원 식물원 주임 겸 경무대 온실장을 하던 내 부친 방원선생도 귀한 식물들과 이승만이 좋아하는 품종들을 그 피난 기차 뒤편에 싣고서 대구갔다가 대전갔다가 수원으로 왔다가 다시 대전까지 따라 갔다가 각자 알아서 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전주에다가 피난 식물원을 꾸렸다. 월급도 끈겨서 전북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며 피난 식물원을 지켰다. 그래서 내 부친 방원선생은 전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참전하여 온몸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구사일생 기적처럼 살아나 전쟁 영웅이 되셨다.

 

 

 

 

창경원 식물원 주임 겸 경무대 온실장 방원 이성찬 선생

 

1950년 6월 27일 저녁 7시 30분 기차 4량을 달고 아끼는 화분도 가지고 대구까지 갔다가 대구에 빨갱이가 무섭다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충남도지사관사에서 대전방송국 설비를 이용하여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며 자신은 서울에 있는 양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했다. 7월 1일 새벽 3시 승용차를 타고 이리역으로 가서 8시간을 기다려 3등객차 2칸을 단 기관차를 구해 목포로 도망갔다. 오후 2시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또다시 배를 구할 수 없어 2시간 기다리다 겨우 작은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5백톤급의 작은 소해정 제514함에 올라 19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32시간동안 국정공백으로 미군조차 이승만의 행적을 파악할수 없었다.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갈팡질팡이었고 부산에서는 일본에 망명을 타진하기까지 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리에서 목포가는 3등기차 피난 도중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6.25 '1호 피난민' 이승만, 서울시민엔 "가만히 있으라"하고는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참고: 이승만 일본 망명?… "도망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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