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판사시보에게 받은 모욕]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9. 5.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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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1분도 못 되는 순간에 받은 모멸감은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판사'라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 저 밑에서 기어 올라온다. 어린 시절 살던 청파동에는 쌀가게 하던 ㅎ씨 형제들이 살았다. 내 큰형이 서울대 의대를 갔듯 그 집 맏이도 서울대 의대를 갔다. 그런데 군의관을 가서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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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관은 보통 전방 근무 1년 후 후방에 배치가 되는데 ㅎ씨 맏이는 빽(?)이 부족해 전방에만 계속 근무했는데 그걸 못 견뎌 하고 돌아버렸다고 동네에 소문이 쫙 났다. 내 둘째 형은 서울대를 낙방하고 다들 전기 서울대에 떨어지면 후기 한양대를 가듯 한양대를 갔다. 하지만 ㅎ씨 둘째는 서울대 공대를 갔다. 나는 전북대 농대를 갔지만 ㅎ씨 셋째는 서울대 법대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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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를 간 ㅎ씨 둘째는 내 큰형 친구였고 서울대 법대를 간 ㅎ씨 셋째는 내 작은형 친구였다. 내가 대학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에는 ㅎ씨 셋째가 사법고시에 붙어 연수원을 마치고 전주법원 판사시보로 있을 때였다. 하루는 기숙사로 ㅎ씨 셋째가 전화를 해서 주말 점심때 점심을 사주겠다고 어느 근사한 식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동네 형이자 작은형 친구가 사주겠다는 점심을 얻어먹기 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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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ㅎ씨 셋째는 나오지 않았다. 좀 늦는가 보다 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가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바빠서 못 나가고 이 이야기 해주려고 보자 했는데 전화로 하겠다며 "이제는 너와 나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사는 세상이 다르다. 앞으로 아는 체도 하지 말고 어디 가서 안다고도 하지 마라."였다.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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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월이 흘러 미국 유학을 마처가면서 보스턴 아래 로드아일랜드 콴셋포인트 해군기지에서 해군을 소개시키고 그곳에서 1년간 니노베이션을 위한 오염측정을 하고 있었을 때다. 그때 ㅎ씨 셋째는 판사로 있으면서 하버드법대에 한국 법관들을 위해 만든 법학 석사과정에 1년간 놀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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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법대는 대학원 과정으로 학위는 JD, 법학박사를 주는데 한국 법관들이 자꾸 연수를 오니까 1년 동안 오게 하고 주는 게 정규학위 과정이 아닌 법학석사증을 하나씩 주는데 연수 온 법관들은 1년 내내 골프치러다닌다. 그래서 그 법학석사는 골프 석사라는 농담도 있다) 어찌 알았는지 전화를 했다. "미국 왔으니 얼굴 보면서 식사 한번 해야지?" 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 000 레스토랑에서 이번 토요일 점심때 보자"고 했다. 그리곤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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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 한 시간에서 한 20분 정도 지났나 전화가 왔다. "지금 오는 중이니?" 그래서 되돌려 줬다. "아 바빠서 못 가는데 이제 신분이 다르니까 서로 사는 세상이 달라. 그니까 앞으로 아는 체도 하지 말고 어디 가서 안다고도 하지 마"라고 해주었다. ㅎ씨 셋째가 대법관이 되었다거나 대법원장이 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본적이 없다. 또 김앤장에도 그 이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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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서민들이 사는 청파동 바닥에서 서울대를 가서 법관이 되고 의사가 되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개천에서 용 난 것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뀐신분을 걸치고 주위에 백안시와 모멸감만 남긴 체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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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국에서 국민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한국을 병들게 만든 판검사를 비롯한 고시 출신 법조인의 정신 개조, 인간개조가 이루어져야 국민의 화합과 통합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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