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1980년대의 한국과 2019년의 한국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9. 4.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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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부지는 6·25 때 6사단에서 중공군을 막아내다 연대가 전멸하고 수류탄 파편이 허파에 박힌 체 등을 대각선으로 절개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이유로 평생 돈벌이를 해본 적이 없다. 내 초등학교 시절에는 누런 봉투에 월사금 육성회비를 못 내면 선생님에게 거짓말쟁이라는 욕을 들으며 마대 자루로 맞았다. 그게 싫어 새벽 읍내장에 애호박을 리어카에 싣고 나가 팔았다. 박카스 빈 통에 숨겨두고, 월사금이며 육성회비를 냈다. 간혹 내 아부지는 경인선 화통 기차를 타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놀러 간다고 말도 없이 내 박카스 통을 털어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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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고 내 살던 소사읍은 부천시로 바뀌었다. 농장이라고 있던 땅은 이리저리 길이 나고 집은 헐리고 온실은 망가졌다. 설상가상으로 땅은 내 아부지 잡기 놀이에 다 잡아먹히었다. 서울형들이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으로 갔지만 두발 피고 잘 곳이 없었다. 친구 집을 전전하고 버스비가 없어 서울서 20리 길을 걸어 등하교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는 본고사 준비 과외 다니라고 오전만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학생들을 다 과외 판으로 몰았다. 과외는커녕 단과반도 다닐 처지가 아니었고 대학 학비는 꿈도 꾸질 못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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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내 아부지가 이승만과 함께 피난 가서 전주에 피난 창경원 식물원 차리고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친 덕분에 전북대 원예과 이병기 박사와 농공과 이기춘 박사가 친구분들이었다. 나 전북대 농대 갈 테니 학교에서 장학금과 기숙사비 좀 대주세요. 과외나 학원도 다니지 않았지만, 전북대 농대는 본고사 시험이 쉬웠다. 동경대 문제나 뺏겨내던 골치 아픈 서울대 본고사 문제완 판이 달랐다. 집안 먼 진척되는 전주 제지 부사장 하던 분은 한번 서울서 전주까지 태워다주면서 공장 다니며 네 큰형 뒷바라지나 하지 공부는 얼어 죽을 공부냐고 훈계했다. 전북대 그것도 학교라고 쯔쯔쯔를 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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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5.17 예비검속에 잡혀가 그렇지 않아도 삼류 인생은 더 망가졌다. 고문 뒤 풀려나서도 방학 때면 공사판 막노동을 해야 했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군대 가서는 녹화사업으로 무릎이 결딴나 엉덩이만큼 부어 대구병원에 후송되었는데 내 작은형은 군대가 힘들다고 꾀병 부려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해서 농땡이 피운다고 소문을 쫙 냈다. 그렇게 가족 아무도 면회나 병문안 한번 안 온 꽉 채운 3년 군 생활을 마쳤다. 그렇다고 변한 건 없었다. 영어 좀 하는 실력 하나로 국제회의 많은 잡지협회 잡지연구원으로 취직했다. 보안대 사무관이란 자와 일본 형사나 쓰는 도리우찌를 쓴 종로서 정보과 형사가 직장까지 찾아와 직장 동료와 윗사람들이 날 피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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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국 환경 저널에는 Non-point source pollution이 큰 화제였다. 읽어보고 내 생각을 논문을 발표한 교수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정확히 11곳 11명의 교수님이 연구조교로 함께 일해볼 생각 없냐는 답장을 보내왔다. 스타이펀드라고 월급이 다른 곳은 800불에서 1000불 정도인데 한곳에서는 1,200불을 주겠다고 했다. 바로 조승희가 총질해서 교수 학생을 무더기로 죽인 버지니아텍. 그때는 Virginia Polytechnic and State University라는 버지니아텍을 처음 들어보았고 또 내 직장 월급이 75만 원(삼성이 이보다 적게 주던 때다)인가 해서 내 월급보다 많은 스타이펀드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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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이야기하니 혹시라도 부모님이 있지도 않지만 한 푼이라도 보태줄까 봐 날카로운 눈초리들로 쳐다보았고 큰형수는 장안에 유명한 점쟁이 박 선생에게 점을 보았는데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박사를 못 마칠 거라고 했다고 열을 올렸다. 나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월 1,200불씩 받는 연구조교로 취업해서 가는거요라고 한마디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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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 점수와 TOEFL 점수 대학성적표 그리고 추천서를 보내 달라고 해서 미친놈 널뛰듯 죽어라 공부해서 GRE, TOEFL 점수도 만들어 보내고 교수님이 원하는 서류들을 보냈다. 88년 9월 학기에 입학하라고 했는데 문공부에서 잡지사들이 열악하니 88올림픽에 잡지협회에서 잡지 기자들을 모아 풀 기자단을 꾸리라고 했다. 국제업무는 내가 하던 거라 풀 기자단을 꾸리고 취재 협조 등 영어통역이 필요한 곳에 뛰어다니느라고 한 학기를 늦추고 서울올림픽과 패럴림픽 잡지풀기자단 총무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업무를 완수했고 서울올림픽 공로 기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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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88년 12월 지도교수님이 보내준 델타항공 비행기표를 들고 김포공항을 떠나 오리건 포틀랜드를 거처 신시내티 그리고 버지니아 로아녹에 도착해서 셔틀을 타고 버지니아텍이 있는 블랙스버그에 도착해서 공부와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노스이스턴 공대 대학원을 거처 브라운대학 지질학과 지구물리학 대학원을 거처 미국 환경청 불포화대 리칭모댈을 개발하며 로드아일랜드 주립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미국연방 공무원으로 발탁되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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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쩌다가 한국이 금수저 흙수저 타령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부모가 자식 살아가는 앞길 막아서는 훼방꾼만 아니어도 고마워하지 않았던가? 제대로 영어 준비도 안 한 체 유학 나가 필답을 해가며 눈치코치 다 동원하며 동냥 구걸 공부한 사람으로서 조국 딸내미를 통하여 본 한국의 모습이 정말 이해하기 힘들기만 하다. 미국 유학 중에 서울대 출신끼리 선후배가 서로 끌어주고 올드노트 올드시험지를 전해주던 모습이 정말 부러워 지도교수님에게 이야기하니 그건 치팅이라고 너는 절대 올드노트나 올드시험지 받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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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서울대 출신들이 선후배 간에 올드노트 올드시험지 물려 주는게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내가 살던 1980년대의 한국과 2019년의 한국이 이처럼 변했단 말인가? 애 어른 할 것 없이 아사리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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