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 병풍 서화 작품 299~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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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의 서화를 정리하면서 나름데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지운 김철수'도 읽어보고 또 지운 선생을 소재로 한 학위논문 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분히 소설처럼 쓰인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그나마 나름 사실에 부합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김경민 전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가 2010년 7월 28일자 부안독립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선생이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활동한 상황을 정리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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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다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 김경민(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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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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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실망과 좌절을 안고 1923년 7월 조선으로 들어왔다.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할 계획으로 국내에 잠입한 지운 선생은 최택 경부에게 검거되어 1년 간 거주제한조치를 당한다. 지운 선생은 집에 와있는 중에도 전북민중운동동맹 사건으로 군산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한다. 그리고 1년 반 여를 비밀리에 상해파 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면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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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운 선생이 상해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할 때 당시 경기고보를 갓 졸업한 박헌영이 상해에 건너와 만주 총국 휘하의 일크스크파 공산청년회에 들어갔다. 이때 조봉암, 김단야 등도 이 멤버였는데 박헌영은 얼마 안 가 조봉암에 이어 공산청년회 서기가 될 만큼 열성적인 활동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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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박헌영은 조선으로 들어와 화요회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다양한 경향의 민족운동세력들이 국내는 물론 국경이 인접한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산발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제1차 세계대전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주창에 고무되어 민족주의자들 중심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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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1운동에 희망을 걸었던 국내의 민중들은 민족주의자들의 무기력함에 실망을 하게된다. 이러한 조선민중에게 국경이 인접한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소식은 사회주의가 단지 막연한 유토피아가 아닌 피압박민족으로서의 해방과 계급모순을 타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라,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확산 되어갔다. 이와함께 1920년대 초부터 지식인, 청년, 학생, 선진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여러 단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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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 형성 시기를 보면 21년부터 23년까지는 지운 선생의 상해파(사회혁명당이후 고려공산당국내지부) 활동이 왕성했고 23년, 24년에는 김사국 이영의 서울청년회, 이에 대립하여 김재봉, 유진희, 박헌영이 주도하는 화요회, 홍명희, 김찬의 신사상연구회, 김약수의 북풍회, 노동당 등이 각 계파별로 활동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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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사회주의 단체 동맹이 화요회 중심의 200여단체로 결성되였고 한편으로는 이에 대립하여 상해파와 서울청년회 역시 200여 단체를 모아 민중운동자 동맹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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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17일 박헌영의 화요회는 4개 단체 연합(화요회, 북풍회, 노동당, 신사상연구회)으로 경성의 중국식당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립한다. 여기에 상해파였던 주종건, 유진희도 당의 허락 없이 참여하였다. 중앙검사위원회 주요 간부로는 제1차 책임비서 김재봉, 공산청년회 서기 박헌영을 비롯 조동우, 주종건, 유진희, 김약수, 정운해, 권오설, 조봉암, 송봉우 등 화요회가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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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의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창립 후 국제당에 승인요청 하러 국제당을 잘 아는 조봉암과 함께 조동우를 보낸다. 원래 상해파였던 지운은 공산청년회 출신의 소수파 모임인 화요회 중심의 조선공산당 창립에 반대했다. 그리고 상해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에 참가한 상해파의 주종건, 유진희를 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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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부터 일경에 의해 신의주에서부터 공산당이 검거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책임비서 김재봉, 청년회 서기 박헌영을 비롯 조선공산당 간부 수백명이 체포되고 1백 여 명이 예심 재판에 회부되는 제1차 공산당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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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투쟁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이봉수와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당 수습 활동에 나선다. 당시 구속된 박헌영은 예심 재판정에서 머리를 책상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일제에 항거했고 그 후 미친 체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된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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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해파와 이동휘는 국내에서 화요파 주도의 조선공산당 창립이 미덥지 않았지만 연합대회 이후 비밀 국제당 조직지정위원으로 모스크바의 신임이 있던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신을 받고 국제당에 승인을 요청한다. 지운 선생의 친필유고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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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말에는 해삼위서 이동휘 파견으로 박응칠이가 입국하여 주종건을 협박(상해파로서 동지간 문의도 없이 단독행위로 화요파 당연직에 참가했다고)했다. 이동휘는 나(지운 김철수 선생)에게 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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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당에서는 화요회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이동휘가 찬성하면 승인할 형세라고 해외동지들은 반대라고 내지 동지들의 의견을 물었다. 나(지운 김철수 선생)는 주종건(당시 폐결핵으로 각혈증)방에서 박응칠을 데리고 나와서 ‘나(주종건) 역시 지금까지 반대 공격해왔지만 우리는 결정 단계에 이르렀다. 다수 동지가 피검되는 차제에 제국주의와 투쟁키 위하야 공산당을 호위해야 되니 나(주종건)와 이봉수를 믿고 맛겨라. 생명을 내걸고 잘해보겠다’라고 풀어 일르고 이동휘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산당을 살려내야 했다. 공산주의자라면 파당을 초월해서 당을 지켜야겠으니 국제당에 찬성 전보치고 장내 일을 이봉수와 나(주종건)에게 마껴달라’고 했다. 이동휘는 바로 타전했다. 국제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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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3월경 조선공산당은 국제당으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주축 세력이 거의 체포, 구금된 상태에서 지운 선생은 이봉수와 함께 평중앙위원으로 공산당 이력이 한창 후배이자 주로 화요파인 책임비서 강달영, 공산청년회 서기 권오설, 조직부장 이준태, 선전부장 홍남표, 김남수, 구연흠 등과 당을 수습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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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국 사회장을 치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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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부터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은 상해파(고려공산당 국내지부), 김사국의 서울청년회, 박헌영의 화요회 간의 파당 대립이 극심했다.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대부분의 간부가 체포된 상태였다. 이 와중에 1926년 서울청년회 대표인 김사국이 폐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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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김사국의 장례를 사회주의 단체 합동장으로 치를 것을 주장한다. 서울청년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조선공산당 주축세력인 화요회 간부들의 완강한 반대를 설득하여 사회주의 400여 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청년, 부인회 각 사상단체가 참여하여 당시 을지로 6가에 있던 훈련원 자리에서 대규모 김사국 사회장을 치른다. 모처럼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형태의 사회장으로 민족진영은 기세를 올렸고 왜경은 긴장한다. 당시의 상황을 지운 선생의 친필유고를 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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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서울청년회 수령 김사국이가 사망했다. 경찰의 압력은 날로 심하고 우리의 운동선엔 파쟁이 끈칠 줄을 모르는 차이다. 이봉수와 나(지운 김철수 선생)는 김사국이 생전에 파쟁의 원귀의 일인이지만 경찰 적과 대항의 의미에서도 우리 전선의 위세를 뵈이기 위하야서도 사회단체장을 하자고 주장했다. 화요파들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파쟁을 돕기 위해 가입한 것이 아니니 그대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필경에 사회단체장으로 4백여 단체 기치 하에서 훈련원이 꽉 차게 모아서 굉장한 기세로 우리의 역량을 시현했든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 역사적 시위장이며 단합기세를 위시한 좋은 장면이였었다. 일로하야 사회운동의 통일과 단결의 기운을 촉진하는 좋은 기회를 조성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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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3차 책임비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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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황제 안산일을 기해 민족주의자들 중심으로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 조선공산당 내에서는 권오설을 비롯한 공산청년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많은 동지들의 희생이 컸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책임비서 강달영, 청년회 서기 권오설, 조직부장 이준태, 김남수가 연이어 체포되는 제2차 공산당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홍남표, 구연흠을 비롯한 당 간부들 대다수가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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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오랜 동지인 이봉수조차 체포되자 조직부장을 거쳐 조선공산당 3차 책임비서가 된다. 당을 맡게 된 지운 선생은 조선공산당의 조직확대를 위해 동경에서 활동하던 유학파 중심의 일요회와 서울청년회는 물론 당 외 공산분자들을 대거 입당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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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회 안광천, 서울회의 김준연 등이 이때 들어와 당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원 화요파는 공산청년회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 전정관, 고광수 등 몇 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때 서울회의 주요세력인 이영과 그 일파가 입당하지 않았다. 훗날 밝혀졌지만 ML파 고광수의 이간질 때문이었다. 이때 참여하지 않았던 이영은 그 후 1927년 서울회 중심의 비정통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으나 승인받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된다. 이를 제3차 공산당사건이라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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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 지운 선생은 체포의 위험 속에서도 비밀리에 움직여 전국 대표 20여명을 서울로 집합시켜 서대문 감옥 근처 집에서 의안 통과와 조직 구성 등 조선공산당 제2차 대표회의를 하룻밤 사이에 무사히 마치고 지방 대표들을 새벽에 다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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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자금 염출은 오랜 친구인 장현식에게 신세를 졌다. 20여명의 지방 대표 중 이리 대표 임혁근에게 남몰래 베푼 지운의 따뜻한 인간성을 지운 선생의 친필 유고를 통해 잠시 엿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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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그 공포 속에서 소위 제2차 당대표회의를 열고 하룻밤 사이에 의안 통과와 조직을 맞추고 새벽에 감짝같이 다 내려보냈다. 많은 동지들이 구속된 끝에 한 방에 수십명의 지방대표들과 함끼 모아 앉으니 참 감개무량했다. 나(지운 김철수 선생)는 특히 전북 이리 대표 임혁근 동지를 대할 시에 눈물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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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어느 치운날 밤에 비밀히(그때 미행이 딸른 때라) 군산서 서울 가는 길인데 이리역에서 환승하려고 섰으니 풍설이 대작이다만 이 극빈한 임혁근이가 늙은 아버지 모시고 단간방에서 얼마나 굶주리고 떨겠냐 하고 담요를 둘러쓰고 달려가 보았다. 담집 마루도 없는 토방에서 캄캄한 밤에 불렀다. 물론 임은 외박이다. 부인이 젊은 몸에 홋옷을 걸치고 맨발로 나왔다. 나(지운 김철수 선생)를 몰라본다. 가만히(이름도 일르치 않고) 돈을 주었다. (도라올 차비니 얼마 될 것인가) 않 받는다. 괜찬한 아는 사람이니 받아쓰라고 하고 얼는 쥐여주고 뛰여나왔다. 아아 그 정경은 지금도 설업다. 이 바쁜 틈에 임이 그 말을 낸다. ‘풍설흑야에 김동지가 돈 주고 갔제’라고. 나(지운 김철수 선생)는 손만 잡고, ‘내(지운 김철수 선생) 아우 잘 지도해주어’를 부탁했다. 당시 전북에선 나(지운 김철수 선생)의 제일 신애하는 임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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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선공산당 당대표회를 무사히 마친 지운 선생은 안광천을 책임비서, 김준연을 선전부장에 임명하고 자신은 당 승인 요청을 위해 당대표로 모스크바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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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김경민 전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의 기고문이고 지운 선생이 당대표로 모스크바에 나가 스탈린을 만나고, 조선공산당을 추인 받고, 40만 마르크에 이르는 거금의 공산혁명 자금을 받은 내용은 내가 이곳저곳에서 야사식으로 이야기 한바가 있다. 여러사람들의 명예가 걸린 내용이기도 하여 차후에 있는 그대로 또 아는 바대로 정리해 두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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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임혁근(林赫根, 1899~1934)
(조공 전북도책)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1월 이리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24년 1월 사상단체 갑자연구회(甲子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여 소작 ․ 노동문제를 연구했고 『민중운동』을 발간했다. 5월 이리노농청년회 제4차 총회에서 회계보고를 했다. 민중운동자동맹에서 회무위원(會務委員)을 맡았고,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했다. 같은 해 ‘민중운동자동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1925년 4월 전주지법 군산지청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해 전북청년연맹 서무부 담당위원이 되었다. 1926년 4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8월 전북노동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을 맡았다. 사상단체 하트당에 참가했고 11월 이리청년회 정기월례회의에서 위원으로 보선(補選)되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전북 대표로 참석했고 1927년 전북노동연맹 제1차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을 맡았다. 6월 신간회 익산지회 설립에 앞서 격문을 작성, 배포하다가 검거되어 8월 전주지법 군산지청에서 제령(制令) 7호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8년 2월 출옥했고 이후 조공 검사위원, 조공 전북도책으로 선임되었다. 4월 『중외일보』 이리지국장으로서 전북기자단 정기대회 개최와 관련해 검거되었다가 5월에 풀려났다. 7월 다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1934년 옥사했다. 1990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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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 6-5 | 4-3 | 2-1 |
4 양금섭 교수님 해설: . 作意東君 又復情 羣生俾得 邀善鳴 仁鳳猶及 痴聾痼 鼓舞相通 聲外聲 *東君 : 종다리를 지칭 종달새를 노래하려는데 정 또한 깊어서 뭇생명을 좇아 좋은 울음소리를 맞아 얻었네. 착한 봉새 소리가 오히려 귀머거리에게 미치니 북장단과 춤사위가 소리 밖의 소리로 서로 통하네. “己酉(1975)春O 和遲耘仁兄 雲雀詩 毅弟” 詩與書掛於壁右 而時吟時味 如對逝友之淸儀 丁巳(1977)春 八十五翁 芝雲 “을유년 봄O 지운 인형의 종달새시에 화운하다. 의재 아우”. 시와 글씨를 벽 위에 걸어 놓고서 때때로 음미하면 벗과 이별하는 청아한 정면을 마주 대하는 듯하다. 1977 봄 85세 늙은이 지운 . +++ |
3 양금섭 교수님 해설: . 年來雲雀 養多情 隨處隨時 耳內鳴 世人莫笑 耳聾漢 臨境能聽 聲外聲 *雲雀: 구름참새, 즉 종다리의 이명(異名). 이 해 들어 종달새 기르느라 너무 몰두했더니 시시때때로 이명[=幻聽]이 들리네. 세상 사람들아 귀머거리라고 웃지를 마소 필요할 때에는 소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오. 己酉春日 過三相橋邊 見雲雀之翔 眞偶得此一絶 而視之于毅齋畵伯 笑有和韻傑作 書之于此幅(?)耳 八十五翁 芝雲 기유 봄날 삼상교 가를 지나다가 종달새가 나는 것을 보고 문득 이 절구시를 얻어서 이걸 의재 화백에게 보였더니, 웃으며 걸작으로 화운하여 이 (종이?) 폭에 써 주셨다. 85세 늙은이 지운 . +++ |
2 양금섭 교수님 해설: 別居何事 多送迎 迎菊當夕 又迎月 月白菊白 我心白 白莫相逆 將奈別 별거함에 웬 일로 보내고 맞을 일도 많아 국화 맞은 저녁에는 또 달을 맞누나. 달 희고 국화 흰 데 내 마음도 희네. 희어 서로 거스르지 않으니 어찌 이별하리오. *轉句는 김삿갓 고사 중의 <月白雪白 天地白>의 parody. 右四十二歲時 在於京城監獄避病舍 病已危篤待死而已矣 時强請菊一盆卽作詩自慰之 重(?)病監金東三翁和之 <遠隔東籬如有感(意) 悄然相對也相求> 此可謂唱和之樂也哉 오른 편은 마흔 두 살 때, (그때는) 경성 감옥의 환자 격리소에서 병이 이미 위독하여 죽음을 기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국화 한 분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곧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중병감 김동삼옹께서 이에 화답했다. 동쪽 울타리는 막혀서 멀지만 느낌은 한가지라 (도연명의 東籬採菊 암유) 초연하게 서로 대하며 또한 서로를 추구하네. 이는 시로 화답하는 즐거움이라고 이를 만하지 않겠는가? 蛇足 : 고통의 절정에서 서로 추구하던[相求] 두 志士의 염원이 <강철로 된 무지개>로 상황을 압도하는 듯. |
1 양금섭 교수님 해설: . 平生我自樂 友有數三知 苟許一心契 何關千里離 寂時每會見 難處好相隨 有斯眞O趣 時賦活歌詩 평생 나 홀로 즐기니 마음 통하는 벗은 셋 남짓 구차히 일심계에 들기를 허락했으니 어찌 천리가 O함을 상관하리. 적적할 때마다 만나 보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주네. 좋은 일에는 진정으로 함께 즐기고 때때로 생계를 돕고 시를 화창한다네. 檀紀四二六七年 在於京城監獄時 因惡刑 一時失神 醒起而作此友人頌 八十五歲 芝雲 단기 4267년(1934) 경성 감옥에 있을 때 심한 고문으로 잠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일어나 이 <친구예찬시>를 지었다. 85세 지운. . +++ |
8 양금섭 교수님께서 "서예로 박사학위를 가진 전주의 臨池堂 이은혁 교수님의 자문"을 받아 해설을 해주셨다. 두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자. 同庚同志 起同時 風雨當年 意氣兒 對立第三 難擧類 長征萬里 亦其誰 羨君至死 憂天下 愧我如今 守四肢 再造中原 可安息 億千弟子 接縱隨 동갑내기 동지로 동시에 일어나서 풍우 당년에는 의기의 남아였었지. 이합집산하는 지사들 셀 수도 없었지만, 장정만리를 행한 사람은 또 그 누구였나? 그대 죽을 때까지 천하를 근심한 걸 부러워하며, 나는 여태 사지 멀쩡한 것이 부끄러워라. 중원을 재편하여 편히 쉴 수 있게 했으니, 수억 제자들이 그대를 붙좇았지. 丙辰 九月九日 聞毛澤東同志永眠 而回顧五十六年前 辛酉有中國日本及我國 同志等來往會集于上海 各其奔走於自國之事 慷慨無量而作此輓詞一首 以表哀悼之情 甲子晩春 九十二翁 遲耘 병진(1976)년 9월 9일 모택동 동지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56년 전을 회고한다. 신유(1921)년에 한 중 일 동지들이 상해에서 회의를 가졌는데, 모두는 자기 나라의 일들로 분주했었다. 강개가 무량하여 이 만사를 지어 애도의 정을 표한다. 갑자(1984)년 늦봄 92세의 늙은이 지운 |
7 양금섭 교수님 해설: 纔渡東江 淚自衿 只存碑閣 老松深 子規何事 啼留客 最憶(?)端王 曉月心 동강을 건너자마자 눈물 흘러 저절로 옷깃 적시는데 다만 노송 숲 깊은 곳에 비각만 있구나. 두견새는 무슨 일로 울어 나그네를 붙드나 가장 슬픈 건 단종의 새벽달 마음이네. 丙辰五月二十日 獨訪寧越古跡 而宿於淸泠浦津頭賣店 初夜一巡深林 卽翌夜未明更渡東江 飽聞杜宇之聲 卽切憶幼王之悲哀史 1976년 5월 20일 홀로 영월 고적을 찾아가 청령포 나루의 매점에 유숙했다. 첫날 밤 깊은 숲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음날 밤 어두울 때 다시 동강을 건너 실컷 두견새 소리를 들고 보니 곧 어린 임금의 슬픈 역사가 (떠올라) 매우 우울하게 했다. |
6 양금섭 교수님 해설: 靜對庭花 如有覺 落花情不 遜開花 元來開落 是花事 可笑人間 語自多 고요히 뜰안의 꽃을 보니 느낌이 있는 듯 낙화의 마음은 개화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걸. 본디 꽃 피고 지는 것은 꽃의 일이건만 가소롭게 사람은 쓸데없이 말이 많구나. 己卯晩秋 獨步荒庭 見落花滿地 偶得此一絶 而消得當時某種憂鬱之情懷者也 丁巳春 八十五翁 芝雲 을묘(1975)년 늦가을에 홀로 시들어 가는 뜰을 거닐다가 떨어진 꽃이 마당에 가득한 것을 보고 문득 이 한 구절을 얻어, 당시에 일었던 어떤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정사(1977)년 봄 85세의 늙은이 지운 |
5 양금섭 교수님 해설: 大雨初收 萬壑淸 奇花晩發 四隣明 羨子光山 今日在 稱來無等 不虛名 큰비 처음 그치니 만 골짜기 말끔하고 기이한 꽃 늦게 피니 사방이 훤하네. 그대의 광주에 오늘이 있게 된 것 부러우니 전해오던 무등산 허명이 아니었네. *無等 : 견줄 바 없음 右甲寅秋 往訪無等山春雪軒 關以博士學位受否問題議論紛紛然 許百鍊博士學位狀已O? 全南大學事勢難處 故余亦力勸受而祝賀之 芝雲 오른쪽(詩)은 갑인(1974)년 가을에 무등산 <춘설헌>을 방문했는데 (그 때) 박사학위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논의가 어지러웠다. 허백련박사학위장도 이미 발부(?)한 전남대학교는 업무처리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나 역시 학위를 받아라고 강권하고 축하해 주었다. |
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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