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 선생의 서화 작품 해설이 돌팔이가 왈가왈부 할 사안이 아니다. 주변에 한문 공부 좀 했다는 일본 중국 대만 친구들 조차 돌팔이 내 한문실력(?)에 감탄 할 정도로 한국이 한문실력의 종주국이긴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한문에 한소식 하신 분들의 댓글 재능기부에 맞기고자 한다. 난 내 기억과 지운 선생이 사사로이 내 부친에게 보냈던 서찰 내용 중에 한국정신문화원 간 '지운 김철수' 증언집에 거론된 내용을 중심으로 비사형태로 남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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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군자금의 행방과 지운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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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집에는 코민테른에서 받은 군자금의 내용(200만루브르, 100만루브르 금괘)도 나름 나온다. 지운 선생은 그 엄청난 공로조차 증언집에서는 자신과 함께 움직였던 동지들에게 돌린다. 사회혁명당과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박진순을 지도위원으로 하여 코민테른의 형제당으로 동북아시아 지도당으로 상해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1차 코민테른의 레닌혁명자금을 집행하여 중국공산당과 일본효민공산당의 창당을 지도한 이후, 일추크파 고려공산당과 극동유대인들의 모략으로 상해고려공산당이 해체되고 레닌도 사망한 1924년이후, 원래 코민테른의 스탈린의 군자금을 요청한 아이디어는 만주 길림에서 자금과 안전가옥을 제공받던 미곡검사관 이성구 선생의 조언에서 시작된다. 이성구 선생은 지운 선생에게 혁명도 독립운동도 자금이 없으면 성공 못하니 코민테른에 자금을 요청해 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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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이 안건을 독립운동 단체에 알리고 의견을 구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찬반의견이 있었다. 반대는 친미파인 도산 안창호만이 반대를 하고 이동휘 김구 등등은 반색을 하였다. 이미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으로 레닌과 공산혁명을 함께한 조선이기에 코민테른에서는 1국1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에게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목적으로 군자금 지급을 검토해 보겠다는 연통이 있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임시정부 요원들은 자신들이 군자금을 지급받을 대표라 하고 제반 사회주의 단체들은 또 자신들이 대표라 분란이 일어 코민테른의 군자금 획득은 요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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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지운 선생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러시아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러시아 비행장교로 스탈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봉섭 선생을 이봉섭 선생의 친형으로 임실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던 동학접주 보굉 이봉욱 선생의 소개를 받아 1926~7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1대1 대면을 하여 특별군자금 단판을 지었다. 실제 1920년 동양 3국중 가장 먼저 지운 선생이 창당한 '사회혁명당'이 조선공산당의 시작이고 자신이 그 2차 당비서라 통역없이 영어로 설명했다. 그에 감복한 스탈린은 코민테른에 금괴 100만 루브르를 혁명자금으로 지급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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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루브르의 금괴를 중국이나 조선으로 수송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금괴를 러시아 은행에 넣어두고 40만 루브르를 현찰로 바꾸어 제반 독립운동 단체에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자금 중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로 보낼 미국교민들의 군자금을 횡령하고 그에 항의하는 미국 독립단체 조직원을 살해하려하여 김구 선생으로부터 이승만 살해명령이 떨어진것을 이승만의 횡령액을 대납하여 살해명령을 풀도록 한데 사용된 돈도 있다. 지운 선생은 이승만을 아까운 인재로 여겼고 또 국제정세가 미국중심으로 흘르고 있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국과 연을 맺은 조선인 인재가 아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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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하여 김구 선생은 코민테른 군자금도 임시정부에 다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시아의 공산혁명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코민테른의 군자금을 다 내어놓으라는 요구가 어불성설이었지만 지운 선생은 40만 루브르 중 대부분을 임시정부에 넘기고 정작 조선공산당을 위해서는 4만여 루브르만 사용하다 일제에 검거되었다. 그 와중에 나머지 4만여 루브르 조차 임시정부에 내 놓으라며 군자금을 횡령했다며 김구 선생이 지운 선생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조직원들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려 실제 김립 등 지운 선생이 아끼는 많은 조직원들이 김구 선생에 의해 살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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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임시정부 내에 일본 첩자들이 많아서 임정에서 나눈 이야기는 다음날 날이 밝기전에 일경들이 소상히 알았다고 했다. 아무튼 해방 후에도 아끼는 조직원들을 김구 선생에게 잃어버린 아픔 때문에 김구 선생과는 공석이나 사석에서 조차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에 이승만은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몰살시킬때 조차 지운 선생에게 받은 목숨의 빛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운 선생은 일간지에 정치에 손을 떼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짖는다는 조건으로 이승만 에게 유일하게 목숨을 보존받아 남한땅에서 천수를 누린 유일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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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nFZ-fLbg3U?si=OzZU5vB9nV2W21wl
https://youtu.be/E7WRPguTV9E?si=LQxFBjQS2dsn1Y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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