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미국간첩 현앨리스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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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체코를 거쳐 북한을 오가며 박헌영에게 미국 CIA의 지령을 전달하던 이중간첩 현엘리스, 현엘리스는 미국 CIA가 200% 만족할 정도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현앨리스도 거창한 조선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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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지운 선생이 상해고려공산당에서 코민테른의 공산혁명자금을 집행하던 1921년의 상해는 공산사회주의를 배우고자 동양권의 젊은 학도들이 몰려들던 사회주의 르네상스였다. 조선의 젊은이들도 그 사회주의 르네상스에 동참했다.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온 한국학생들 사진 -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 끝 여인이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 그 왼쪽이 현앨리스이다.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는 맨앞줄 오른쪽 끝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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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현앨리스가 194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생 현피터(왼쪽), 아버지 현순 목사와 함께 앉아 있다. 현앨리스의 부친 현순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서울에서 상하이로 넘어가 ‘조선독립단’의 상하이 특별대표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현 목사는 3.1운동 소식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중국과 미국, 유럽 등지에 널리 알리고 해외 정보를 국내에 전달했다. 임시정부 수립에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1세대이다. 서울에 남아있던 부인 이마리아는 8남매를 이끌고 1920년 중반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에 있는 남편과 합류했다. 바로 이곳 상하이에서 청년 박헌영은 존경하는 현순 목사를 따르게 되고, 자연스럽게 현앨리스, 현피터 남매와 동지적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가족과 박헌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현순 가족의 피크닉에도 따라가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된 현순 목사와 현피터 부자를 뇌물을 써서 빼내줄 정도였다. 미국 정보계통과 인연은 현순 목사부터 시작되어 코민테른은 1921년부터 박헌영이 미국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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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현앨리스는 남편 정준과 결별하고 하와이로 건너와 1927년 아들 정웰링턴을 낳았다. 산욕에 시달린 듯 부은 얼굴이지만 그녀가 남긴 사진 가운데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결혼에 실패한 현엘리스는 193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 있는 헌터 칼리지 등에서 공부했다. 이어 아버지가 있는 하와이로 돌아가 동생 피터와 함께 미국 공산당원 자격으로 노동운동가들의 그룹 속에서 활동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공산당은 CIA에서 운영하고 당원들은 CIA요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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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현앨리스는 주한미군 장교로 근무하다 북한이 신뢰하도록 북한간첩혐의로 위장하여 파면된다. 미국에서 비밀 첩보교육을 이수한뒤 아들의 체코의대 입학을 빌미로 체코를 거쳐 북한을 드나들며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1948년 9월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이 체코의대로 떠나기 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한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현피터, 현안나(피터의 부인) 현데이비드, 현데이비드균(데이비드의 아들), 현앨리스, 현순, 현메리함(데이비드의 부인), 현프릴랜드탄(데이비드의 아들), 현마리아(현순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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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지운 선생이 상해고려공산당에서 코민테른의 공산혁명자금을 집행하던 1921년의 상해는 공산사회주의를 배우고자 동양권의 젊은 학도들이 몰려들던 사회주의 르네상스였다. 조선의 젊은이들도 그 사회주의 르네상스에 동참했다.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온 한국학생들 사진 -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 끝 여인이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 그 왼쪽이 현앨리스이다.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는 맨앞줄 오른쪽 끝에 앉아있다.
사진 2: 현앨리스가 194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생 현피터(왼쪽), 아버지 현순 목사와 함께 앉아 있다. 현앨리스의 부친 현순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서울에서 상하이로 넘어가 ‘조선독립단’의 상하이 특별대표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현 목사는 3.1운동 소식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중국과 미국, 유럽 등지에 널리 알리고 해외 정보를 국내에 전달했다. 임시정부 수립에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1세대이다. 서울에 남아있던 부인 이마리아는 8남매를 이끌고 1920년 중반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에 있는 남편과 합류했다. 바로 이곳 상하이에서 청년 박헌영은 존경하는 현순 목사를 따르게 되고, 자연스럽게 현앨리스, 현피터 남매와 동지적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가족과 박헌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현순 가족의 피크닉에도 따라가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된 현순 목사와 현피터 부자를 뇌물을 써서 빼내줄 정도였다. 미국 정보계통과 인연은 현순 목사부터 시작되어 코민테른은 1921년부터 박헌영이 미국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파악했다.
사진 3: 현앨리스는 남편 정준과 결별하고 하와이로 건너와 1927년 아들 정웰링턴을 낳았다. 산욕에 시달린 듯 부은 얼굴이지만 그녀가 남긴 사진 가운데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결혼에 실패한 현엘리스는 193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 있는 헌터 칼리지 등에서 공부했다. 이어 아버지가 있는 하와이로 돌아가 동생 피터와 함께 미국 공산당원 자격으로 노동운동가들의 그룹 속에서 활동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공산당은 CIA에서 운영하고 당원들은 CIA요원들이다.
사진 4: 현앨리스는 주한미군 장교로 근무하다 북한이 신뢰하도록 북한간첩혐의로 위장하여 파면된다. 미국에서 비밀 첩보교육을 이수한뒤 아들의 체코의대 입학을 빌미로 체코를 거쳐 북한을 드나들며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1948년 9월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이 체코의대로 떠나기 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한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현피터, 현안나(피터의 부인) 현데이비드, 현데이비드균(데이비드의 아들), 현앨리스, 현순, 현메리함(데이비드의 부인), 현프릴랜드탄(데이비드의 아들), 현마리아(현순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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