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지운 선생과 노구조리 그리고 울릉도 '고고고고(古枯孤高)'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4. 07:47
반응형

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다. 방원 선생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다. 젊은시절부터 오랜세월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 선생과 동갑으로 오랜세월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다. 그런데 가족들이 새 알러지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다. 새 알러지로 눈비비고 따끔거리면서 모이를 주고 물도 주고 냄새나는 똥도 치워주면서 ...

.

1972년 어느날, 부안 백산에서 지운 선생이 종다리 여러쌍을 들고 오셨다. 지운 선생 말씀이 몇년전 신문에 보니 울릉도에 종다리와 진달래가 없어서 종달새와 진달래를 울릉도에 이식하시겠다고 들고 오신거였다. 그 몇년간 보리밭에서 종달새알을 구해다가 부화시킬려고 품고 자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종달새는 어미가 우는법을 가르켜 주어야 운다며 거의 종달새 전문가연 하셨다. 카나리아와 함께 종달새도 키우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집에서 키우는것은 성공하질 못했지만 (종달이는 참새 마냥 성질이 급해서 집에서 키우기는 불가함을 내가 그때 경험했다) 지운 선생은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어가며 종다리를 모아 계속 가져오셨다.

.

울릉도에 가져갈 종다리를 우리집 새우리에서 적응시키셨는데 그 종다리에게 먹이주고 물주고 똥치워주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한 두마리 죽으면 야단도 맞아가면서 말이다. 서화보따리 속에 그 종다리를 가져오실때마다 미리 연통으로 보낸 서찰들이 있다. 그리고 종다리는 먹이를 무얼 먹이고 어찌 길러야 하는지 내용도 적혀있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종다리를 '노고조리'라고 하는데 제목이 '노구조리 키는 법'이다. 어린시절엔 종다리를 키우는게 냄새나고 원망스러운 일이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 역시 추억으로 남는다. 지운 선생을 기억하며 여기저기 기고하는 분들은 지운 선생의 재미있는 일화로 우려먹지만 사실 나에겐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

아무튼 오랜동안 준비해서 결국 울릉도에 가셔서 종달새 3쌍과 진달래를 이식하고 오셨다. 돌아오셔서는 붓을 들어 서화를 여러편 남기셨다. 또 자주 울릉도 초등학교 교정에 심어놓으신 진달래의 안부와 종달새의 안부를 확인하셨다. 진달래는 모르겠지만 종달새의 소식은 감감 무소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

사족: 어린시절 지운 할아버지덕에 종달새를 카나리아와 함께 키워보면서 느낀점을 감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참새 비슷한 초라한 모습에서 "지지배배 까르르르" 하며 나오는 종달이의 노래소리는 카나리아에 버금간다. 그런데 종달이는 보리밭에서 수직으로 수십미터를 차고 올라가 보리밭 상공에서 노래를 한다. 아마도 보리밭에 만든 종달새집과 알 종달새 아기를 보호하려는 습성이리라. 그런데 작은 새장에서 차고 오르면 새장천장에 머리를 부딛쳐 죽는다. 차고오르지 말라고 날개를 찝어 놓는데 자꾸 퍼득거리다 풀린다. 아예 날개 근육을 끊어 놓기도 하는데 어린 내눈에는 종달이가 불쌍해 보였다. 물론 울릉도에 이식하겠다는 지운 할아버지의 뜻은 갸륵했지만 말이다.

.

+++

지운 선생이 울릉도에 가져갈 종다리를 키워 놓으라고 '노구조리 키는법'을 적어 남기셨다.
'노구조리 키는법' 뒷장
처음 종다리 한쌍을 들고 오실때 보내신 연통
종달새 가져오실때의 연통 또 하나.
에구 빌어먹을 종달이 하하하 종달새 성질이 급해 다 죽었다.
종달새 두쌍을 가져오시기도 했다.
카나리아 대신 종달새 키우는게 주 임무가 될 정도로 종달새를 모아 오셨다.
카나리아 대신 종달새 키우는게 주 임무가 될 정도로 종달새를 모아 오셨다.
울릉도 절벽에 2,500년 된 늙은 향나무 등걸이 있다
일찍이 울릉도를 유람하며 2500년 된 향나무 등걸을 보고 우러러 본받으며 말하기를 고고고고 (오랜 세월 말라 죽어서도 홀로 기상 드높아라) 경신년 설날 아침에 88세의 늙은이 느림보 쟁기질꾼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 선생과 동갑으로 오랜세월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다. 그런데 가족들이 새 알러지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다. 새 알러지로 눈비비고 따끔거리면서 모이를 주고 물도 주고 냄새나는 똥도 치워주면서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