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선생에 대한 오해와 그 진실]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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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5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의 조선 사회혁명당과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의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연합하여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동양권 지도당으로서 공산혁명 자금을 집행하게 되었다. 자금 집행 중앙위원으로서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은 1. 중국공산당 창당 지원, 2. 일본효민공산당 창당 지원, 3. 민족주의단체 포함 항일단체 자금지원, 4. 언론매체 창간지원, 5. 조선과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가 구미 유학 지원 등을 거침없이 집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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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려공산당의 대표 이동휘 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1949년 6월 26일) 선생은 열악한 임시정부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 코민테른의 혁명자금이 당연하게 임정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려공산당 자금 집행 중앙위원인 지운 김철수 선생과 김립 선생은 실제 독립운동행위를 하는 사안에 대하여 그 단체에 자금지원을 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1958년) 선생의 의열단(義烈團)에 무장경비와 훈련경비 등을 임시정부를 거치지 않은 체 직접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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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불만을 품은 백범 김구 선생은 이동휘 선생에게 코민테른 혁명자금을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동휘 선생은 “공산혁명 자금은 코민테른의 국제당인 상해 고려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다. 코민테른 규정에 따라 자금 집행 중앙위원인 지운 김철수 선생과 김립 선생이 회계장부에 일일이 기재하고 집행한다. 집행 뒤에는 결산보고를 코민테른에 해야 한다. 고려공산당의 대표인 나도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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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백범 김구 선생은 “이동휘 당신도 임정 국무총리이고 김립도 임정 국무총리 비서장이니 당연히 코민테른 자금은 임정이 차지하여 집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에 이동휘 선생은 “코민테른 자금이 탐이 나면 임시정부를 모스크바에 설치하고 코민테른에 참여하여 승인을 받아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골고루 지급되어야 하는 코민테른 자금을 김립이 개인적으로 사용하여 축첩하고 집을 사고 횡령을 했다고 소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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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자신의 부하인 오면직과 노종균에게 김립 선생을 사살하고 코민테른 자금을 뺏어오라고 명령을 내린다. 1922년 2월 6일 지운 선생, 유진희(兪鎭熙, 1893년 2월 11일~1949년 8월 31일) 선생, 김하구(金河球, 1880~?) 선생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상해의 자베이구 거리를 걸어가던 김립 선생을 총격을 가해 쓰러뜨리고 김립 선생이 소지했던 코민테른의 자금 통장과 인감을 강탈해 갔다. 김립 선생은 상해 불란서 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지운 선생은 아세아동맹단 중국 동지의 도움으로 은행에 지급정지를 시켜 백범 김구 선생의 자금강탈은 실패하고 만다. 백범 김구 선생은 코민테른 자금이 일본효민공산당 창당에도 지원되는 것을 알고는 고려공산당은 친일파라 비난하며 효민공산당에 참여한 일본인 명단을 일경에 넘겨 일망타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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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은 그에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가 양성을 위한 구미 유학생 자금지원을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어 흥청망청 쓴다고 극렬하게 비난하고 만나는 사회주의 인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결과 설산 장덕수 선생이 구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장학금을 지급받은 걸 두고 "조선으로 들여올 선전비 자금을 장덕수가 횡령했다"라고 소문을 냈다. 이것이 김사국이 문제 삼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이다. 사실 백범 김구 선생이 언급한 선전비 자금은 최팔용(崔八鏞) 선생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지급받아 조선에 들여가 '신생활' 잡지 창간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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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인 사회주의 혁명가를 꿈꾸며 이런저런 사회주의 단체를 만들던 서울파 김사국(金思國, 1892년~1926년) 등은 경성으로 돌아온 장덕수 선생을 거액의 돈을 착복하여 개인적으로 남용했다며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 총회에서 제명했다. 그런 김사국은 폐병으로 죽었지만, 장덕수 선생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코민테른 구미 유학생 장학금은 이미 유학할 오리건 주립대학 등에 코민테른을 통해 지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덕수 선생은 1923년 4월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동경을 경유한 장덕수 선생은 치요다구(千代田区) 간다(神田)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다. 이를 장덕수 구타 사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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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장덕수 선생은 이런 오해가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이 코민테른 자금에 욕심을 부려 발생한 사건인 줄 모른 체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단체와 철저하게 단절하고 미국파가 되어 이승만 지지자로 변신을 하게 되었다. 설산 장덕수 선생은 오리건 주립대 신문학 학사를 시작으로 193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興業俱樂部事件)에 연루되어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사직서를 내고 물러났다. 그 이후 장덕수 선생은 친일활동을 하고 1940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친일의 흔적을 굵게 남겼지만 1943년 총독부 관리와 보성전문 교수들 간의 부민관 만찬에서는 총독부 경무국장이 도망갈 정도로 일제의 잘못을 준엄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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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선생이 해방을 맞아 미 군정하에서 이승만을 도와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자 백범 김구 선생이 배후로 보이는 한독당원 박광옥, 배희범(裵熙範)에게 1947년 12월 2일 제기동 자택에서 총격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암살 배후로 미 대통령이 트루먼이 발행한 법원 소환장까지 받았으나 이승만이 김구 선생을 감싸고 돌아 설산 장덕수 선생 암살의 배후 규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코민테른 자금을 갈취하려던 백범 김구 선생은 결국 설산 장덕수 선생을 무고하여 동지들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 정적 이승만에 협조하는 설산 장덕수 선생을 제거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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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좋은게 없다. 뜻이 서지 않고서도 성공한 사람은 아직 있지 않았다.

-갑자 한여름 92세 늙은이 지운- (양금섭 선생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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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선생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좋은게 없다. 뜻이 서지 않고서도 성공한 사람은 아직 있지 않았다.
-갑자 한여름 92세 늙은이 지운- (양금섭 선생님 해설)

김립 (가명 양춘산) 선생 암살사건을 보도한 1922년 2월 22일자 상하이독립신문과 영국 불란서 독일 공동 조계 경찰국이 작성한 김립 (가명 양춘산) 선생 암살사건 1922년 2월 16자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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