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비록 微視(미시)에서 패배하여도 巨視(거시)에서 승리하는 길]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 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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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이 93세 되던 해이고 작고하시기 1년 전인 1985년 3월 청명절에 ‘동중서(蕫仲舒) 선생의 아래 시(詩)’를 남기셨다.

處世柔爲貴 (처세유위귀) 세상을 사는 데는 부드러움을 귀히 여기라

剛强是禍基 (강강시화기) 굳세고 강하기만 한 것이 재앙의 근원이니라

發言常欲訥 (발언상욕눌)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천천히 하려 하고

臨事當如癡 (임사당여치) 매사에 임할 때는 마땅히 어리석은 듯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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急地尙(常?)思緩 (급지상사완) 급한 지경을 당하면 항상 천천히 생각해 보고

安時不忘危 (안시불망위) 평안할 때에도 위태롭던 때를 잊지 말지어다

一生從此計 (일생종차계) 한평생 이러한 인생의 계략을 잘 실행해 나간다면

眞個好男兒 (진개호남아) 진실로 호남아라 하리라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의 삶의 비방(秘方) 중의 하나는 ‘지고 사는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지는 것’은 더 어렵다.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며 오로지 ‘이기는 것’에만 몰두해 있다. ‘이기는 것’이 이익을 가져오고, ‘지는 것’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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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누구나 좋아하고 손해는 누구나 싫어한다. 살면서 모두가 이기고자 하면 결과적으로 다 함께 손해에 직면하는 비극을 종종 보게 된다. 이 비극은 정치, 경제, 외교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우리 이웃과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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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Nash equilibrium'이라는 game theory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John Forbes Nash Jr. (1928~2015)는 각자의 이기고자 하는 노력이 모두의 패배를 가져다준다는 걸 입증하기도 했다. 좀 더 경제학적 용어로 접근해 보자면, 미시(微視)에서 패배하여, 거시(巨視)에서 승리하는 길을 찾아가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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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면 미시(微視)에서 ‘나’는 졌지만, 거시(巨視)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기원전 동중서(蕫仲舒) 선생의 말처럼 늘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급할수록 늦추는 마음의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걸 지운 선생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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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김재봉의 화요파나 안광천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로 앞줄 좌로부터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계봉우 선생,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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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董仲舒(동중서, 기원전 176년경~기원전 104년) 선생은 기원전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다. 동중서 선생은 한나라 초기에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이로써 뒷날 중국의 정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 선생의 사상에는 재이설(災異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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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섭(Kyzbma Yang) 선생님 해설: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癡

急地尙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皆好男兒

(행록 3장 49절)

處世柔爲貴 剛强是禍機 發言當欲訥 臨事每如痴

急地常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戒 眞箇好男兒

(처세에는 부드러움을 귀하게 여겨야 하나니 굳세고 완강함은 재앙의 기초로다. 말은 응당 더듬듯이 하고, 일에 임해서는 매양 바보 같아야 한다.

급박한 처지에서는 항상 느림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는 위급했을 때를 잊지 말라. 한평생 이런 경계함을 좇는다면 진실로 호남아다.

蕫仲舒先生詩

동중서 선생의 시

乙丑淸明節 九十三翁 遲耘

을축년 청명절에 93세의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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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世柔爲貴 (처세유위귀) 세상을 사는 데는 부드러움을 귀히 여기라 剛强是禍基 (강강시화기) 굳세고 강하기만 한 것이 재앙의 근원이니라 發言常欲訥 (발언상욕눌)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천천히 하려 하고 臨事當如癡 (임사당여치) 매사에 임할 때는 마땅히 어리석은 듯이 하라 . 急地尙(常?)思緩 (급지상사완) 급한 지경을 당하면 항상 천천히 생각해 보고 安時不忘危 (안시불망위) 평안할 때에도 위태롭던 때를 잊지 말지어다 一生從此計 (일생종차계) 한평생 이러한 인생의 계략을 잘 실행해 나간다면 眞個好男兒 (진개호남아) 진실로 호남아라 하리라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현정건(*1) 선생,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계봉우 선생, 이증림(*2) 선생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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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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