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원나라 간섭기에 부친 가정 이곡 선생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토곤 테무르 의 총애를 받았던 목은 이색 선생이 명나라의 등장으로 대국 명나라와 원나라 사이에서 권력투쟁에 골몰한 고려의 사림과 무림 속에서 양다리 외교술을 펼쳐 고려를 지켜내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자신도 모진 고초를 치르면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장남과 차남의 참살함 지켜보기만 했지만 고려든 조선이든 대국의 속국은 만들지 않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이 행장을 통해서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외부의 적보다 사리사욕에 젖은 내부의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가장 큰 위험임을 역사는 언제나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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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조의 36세까지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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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조의 37세이후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한산이씨 7 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6 대손인 한산부원군 ( 韓山府院君 ) 문정공 ( 文靖公 ) 목은 ( 牧隱 ) 이색 ( 李穡 , 1328 년 음력 5 월 20 일 ~1396 년 5 월 20 일 ) 목은 1 세 ( 牧隱 1 世 ) 선조; 부원군 ( 府院君 ) 은 고려 충렬왕 이후 조선 시대까지 사용한 작호 ( 爵號 ) 입니다 . 왕 의 장인인 국구 ( 國舅 ) 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던 작위로 작위 수여자인 이색 선생의 본관을 따서 한산부원군 ( 韓山府院君 ) 이라 칭
직계표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7세 선조이자 중시조이신 목은 이색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 한산이씨 중시조 목은 이색 선조는 한산군 문효공(文孝公) 이곡 선조의 외아드님으로 한산이씨 권지호장공계 7세로 호장공 이윤경 시조의 6대손입니다. 목은 이색 선조는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색은 인재공 이종학의 아버지이고 박상충의 손윗처남이며 박은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입니다. . 14세에 고려 성균시에 합격한 후, 부친인 이곡 선조가 원나라 고위관직에 있어 그 자제의 자격으로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다가 부친 이곡 선조의 상(喪)을 입자 귀국했습니다. 귀국 직후 원나라에서 입수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의했는데, 이때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하륜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목은 ( 牧隱 ) 이색 ( 李穡 , 1328~1396 ) 선조님 의 연보 ( 年報 )
목은 이색 선조는 고려에서는 충숙왕 15년이고 원나라에서는 천력(天曆) 원년인 무지년인 1328년 음력 5월20일에 복주사록참군사(福州司錄參軍事)로 원주 목사를 보좌하고 각 고을을 순찰 감독하며 원나라 회시에 낙방하여 재도전을 위해 용맹정진 중이던 가정 이곡 슬하의 외동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 외가 생가터 사진입니다.
•1333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복위 2년, 원나라 원통(元統) 원년, 목은 이색 선생이 5세되던해이자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36세 되던해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두번째에 도전한 원나라 회시(會試)에 급제하고 연이어 전시(殿試)에서 차석으로 뽑혀 진사출신(進士出身)을 수여받았습니다. 이어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원나라에서 승사랑 ( 承事郞 ) 한림국사원 검열관 ( 翰林國史院檢閱官 ) 에 제수되어 부친없이 모친과 조모의 돌봄 속에 고려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4)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가정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습니다. 38세인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원나라에서 시 전의부령 직보문각(試典儀副令直寶文閣)에 임명되었습니다.
•1336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복위 5년, 원나라 지원(至元) 2년, 목은 이색 선생이 8세이자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39세 되던해에 •원나라 유림랑(儒林郞)이자 경정원관구(敬政院管勾) 겸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라는 3가지 관직을 동시에 제수되어 원나라 인종 황제를 자문하고 업무를 보좌하며 인종 황제에게 고려의 공녀를 공출해가는 동녀구색(童女求索)을 중지하도록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인종황제는 감복하여 고려 공녀제도의 폐지를 명하여 이듬해 1337년 공녀제도 폐지됩니다.
•1341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 원나라 지정(至正) 원년 목은 선생 13세 가을에는 송당 선생(松堂先生) 삼사 우사(三司右使) 김광재(金光載)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는데, 목은 이색 선생은 그 시과(詩科)에 합격하였습니다. • •한편 원나라에서는 가정 이곡 선생이 44세 되던해로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혜종(惠宗)의 집권을 맞아 원나라를 새롭게 연다는 개원(改元)을 축하하는 정동성의 표문(表文)을 직접 제작하여 헤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341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 원나라 지정(至正) 원년, 목은 이색 선생 14세 되던해이자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44세 되던해에는 3살 어린 11세의 당대 명문대가인 안동 권씨 권중달의 딸과 혼약을 하였습니다. 13세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하자 개경의 명문가에서는 목은 이색을 사위로 삼기위해 혼약식 당일 저녁까지 다투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능력있는 사위를 얻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이겠으나 특히 고려시대에서는 더하였나 봅니다. 친족구조가 친가뿐만 아니라 처가와 외가도 중요시되고, 사위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영욕을 함께했기 때문에 똑똑한 사위는 ‘가문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혼약하면 처가에서 사는 고려의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으로 혼약한 목은 이색 선생과 부인 정신택주 권씨는 신접살림을 처가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혼인풍속인 서류부가는 사위가 처가에서 머물다 한참 지난 뒤에 시집으로 가는 처가살이 형태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혼약식을 치루고 부친이 있는 원나라의 수도 경사로 유학을 떠나 원나라 고위 조정관리 자제의 자격으로 국자감에 생원으로 입학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여기서 참고로 목은 이색 선생을 통해 고려의 혼인제도인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을 좀 더 살펴보면, 목은 이색 선생 부부는 뒤에 처가에서 분가를 하였으나 목은 이색 선생의 문집에는 처가의 제사나 혼인식, 장례식에 뻔질나게 참석하고, 동서나 매부와 빈번하게 교류했던 내용들이 많이 보입니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서류부가 혼인 풍속으로 혼인 뒤에 꼭 시집에 갈 필요가 없었고,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어 출가외인(出家外人)이라는 관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혼인 후에도 딸이 부모를 모실 수도 있어 딸도 아들 못지않게 자식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조선 건국의 핵심인물이었던 정도전은 “여자들이 친정에서 혼인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부모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며, 혼인풍속을 중국처럼 ‘시집살이’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다행하게도 1343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4년, 원(元)나라 지정(至正) 3년, 목은 이색 선생이 15세 되던해 드디어 국자감에 생원으로 입학하여 3년간 본격적으로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배우게 되어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으로 인한 처가살이를 면할수 있었습니다. •이때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46세 되던해로 원나라 정3품인 봉훈대부(奉訓大夫)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에 제수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이 18세 되던해이자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49세 되던해인 1346년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 원(元)나라 지정(至正) 6년에 고려에 새로 나온 역서를 배포하는 반삭차 고려로 귀국하는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을 따라 함께 고려로 귀국하여 약혼자인 세도가 안동 권씨 권중달의 15세 딸인 권씨와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됩니다. •부인 권씨는 후일 원나라에서는 요양현군 고려에서는 정신택주(貞愼宅主, 1331-1394, 정신택주는 정경부인에 해당하는 부인에게 주는 일종의 관직)로 봉해집니다.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그해 가을 고려에서 한산군(韓山君)에 봉직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되었으며 편년강목(編年綱目) 증수본 집필에 참여합니다.
•1348년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 원(元)나라 지정(至正) 8년, 목은 이색 선생이 20세 되던해이자 가정 이곡 선생이 51세되던해에 원나라에서 황제의 조칙(詔勅)의 입안과 기초를 맡는 중서성(中書省) 관리를 감찰하고 임명하는 감창(監倉)의 업무를 보고 있는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있는 원나라로 돌아가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재입학하여 성리학을 심도 깁게 공부할수 있었습니다.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아드님이 국자감 생원으로 안정적으로 학문에 열중할수 있는 것을 보고 그해 가을 고려로 귀국하였습니다.
•1350년 고려 충정왕(忠定王) 2년, 원(元)나라 지정(至正) 10년, 목은 이색 선생이 22세 되고 가정 이곡 선생이 53세 되던해에 원나라 혜종 황제 토콘 테무르를 따라 몽골제국의 수도이자 원나라 여름철 수도인 상도(上都) 에 가서 국자감 상도분교에서 분학(分學)하고 다시 겨울철 수도인 대도, 지금의 북경의 국자감 본교로 혜종 황제를 따라서 돌아왔습니다. 가을철에는 원황제가 제정한 급가 ( 給暇 ) 의 법에 따라 근친 ( 覲親 ) 휴가를 받아 목은 이색 선생은 고려에 돌아와 83 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조모인 흥레이씨 (1268-1350) 요양현군 삼한국대부인의 상을 치루고 , 부모님을 뵙고 , 또 그해 고려에서 출생한 장남 문양공 이종덕 (1350~1390) 을 본 후 원나라로 복귀했습니다 .
•목은 이색 선생이 사용한 근친(覲親)이라는 원나라 휴가제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근친(覲親)은 ‘급가(給暇)의 법’에 따라 원나라 조정관리에게 주어지는 유급휴가입니다. •이 근친은 원래 북경에 출사한 관리가 고향의 직계존속이 병치례를 하거나 상을 당하거나 자식을 생산하면 사직서를 내고 귀향하여 병치례를 돌보고 상을 치루고 출생을 지켜보았는데 목은 이색 선생의 조모 상과 자식의 출생소식을 듣고 목은 이색 선생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려로 돌아가려하자 •원나라 혜종 황제가 그 사직서를 반려하고 다음과 같이 휴가를 주도록 하면서 정착이 되었습니다. •“대도에 출사한 관리는 먼저 정부(政府)에 고하여 정부에서 신문(申聞)하고 날짜를 계산하여 휴가를 주고 사직서를 올리지 말게 하되 병조에서 갑사(甲士)를 맡아 휴가를 주는 예와 같이 하라”고 명하여 유급휴가인 근친휴가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목은 이색 선생이 고려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시전의(試典儀) 부령직(副令直) 보문각(寶文閣)을 지내고 있던 부친 가정 이곡 선생과 모친도 뵙고, 83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할머니 흥례이씨의 상을 치루고, 또 태어난 장남 문양공 이종덕을 보기 위해 이 근친휴가를 사용하여 국자감 생원을 사직하지 않고 고려에 다녀오도록 원나라 혜종황제가 특별히 배려한 것으로 과거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고려를 방문할때마다 고려 조종의 시기와 질시와 모함으로 이트집 저트집을 잡아 귀향을 보내는 등 어려움에 처했을때 가정 이곡 선생을 원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고려를 방문하도록 했던 원나라 황제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1351년 고려에서는 충정왕(忠定王) 3년이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한 해이고,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1년,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3세에 근친의 휴가를 받아 조모상을 치루고, 부친 가정 이곡 선생과 모친을 뵙고, 또 장남 막 출생한 문양공 이종덕도 보고 대도인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새해 정월 1일에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작고하셨다는 부음을 받자마자 분상하여 부친상을 치루기 위해 고려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돌아가신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의 연세는 54세였습니다.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은 모친인 요양현군 삼한국대부인 흥례이씨의 3년상을 치루기 위해 묘 옆에 움막을 짖고 추위에 허술한 상복을 입은체 지내다가 추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가정 이곡 선생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문효공(文孝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가정 이곡 선생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번지에 모셨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이 타지인 북경에서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의 부음을 등고 행한 분상(奔喪)은 목은 이색 선생의 효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작고하셨다는 부음을 받자마자 분상하여 부친상을 치루기 위해 고려로 돌아오셨다는 기록에 나오는 바로 그 분상(奔喪)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분상(奔喪)은 중국 고대의 유가(儒家)의 경전인 오경(五經) 중에 하나인 『예기(禮記)』의 서른네 번째 항목에 나오는 예법으로 출타 중인 상주가 존속의 부고(訃告)를 듣고 취해야 하는 예법을 말하는 겁니다. •목은 이색 선생이 행하신 역복(易服)을 살펴보겠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부고를 접하자, 관복과 관을 벗고,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엇으며, 베를 찢어 사각건(四脚巾)을 만들어 쓰고, 흰베적삼을 입고, 새끼줄로 띠를 두르고, 삼으로 짚신처럼 삼은 신인 마구(麻屨)를 신었다고 합니다. 이어 음식을 먹지 않고 가슴을 치면서 곡을 하며 상가인 고려 개경을 향해 하루 100리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이는 예기 역복(易服)에 있는 그대로 였다고 합니다. •예기에 의하면 분상은 흉악한 짓인 흉행(兇行)이라 여겨서 하루 100리를 갈 정도로 뛰어가야 한다고 나옵니다. 하루 50리를 가는 길행(吉行)의 갑절에 해당하는 속도입니다. 이는 아무리 슬프더라도 도적 등의 해를 피하고, 밤에는 가지 않아 나쁜 일을 당하지 않으며, 번잡한 길도 피하기 위합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모상을 당하면 별을 보고 출발하고 별을 보고 숙박한다고 합니다. •대도에서는 평소 가정 이곡 선생을 흠모하던 동료 지인들이 가정 이곡 선생의 위패(位牌)인 신주(神主)를 교의(交椅)에 모시고 문상을 했다고 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분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분상은 부고를 듣고 하루라도 빨리 상가에 도착하기 위해 달려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문상의 절차는 대부분이 분상으로 채워졌습니다. 유교이념에서는 임종(臨終)을 지키지 못한 자식을 큰 불효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출타 중일 때는 임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러한 분상(奔喪)이라는 문상(聞喪)의 절차를 두었습니다. 특히 종법(宗法)을 중요시하여 사당을 짓고 신주를 모시면서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한 경우, 외지로 부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당과 신주를 쉽게 옮길 수 없으므로 당사자만 부임할 때가 많은데, 이에 대비하여 분상(奔喪)이라는 절차가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중국과 고려 그리고 조선의 사록에 분상(奔喪)하지 않고 남몰래 이장하였다는 이유로 치죄했다는 여러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유학에서는 분상(奔喪)을 효의 척도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53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2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3년,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5세 여름에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의 3년상제(喪制)를 마쳤습니다. •5월에 공민왕이 주최하고 익재(益齋先生) 이제현(李齊賢)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된 초과(初科)를 열었는데, 목은 이색 선생이 을과(乙科)에 장원급제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원나라 출사의 첫관문인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사신으로 사신일행을 감찰하고 도강할 때에 일행의 인마(人馬)·복태(卜駄)를 점검하기도 하는 행대어사(行臺御史)인 서장관(書狀官)으로 대도인 경사(京師) 북경에 가서 원나라와의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6세인 1354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3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4년 2월에 고려의 사신인 서장관의 임무를 수행하며 원나라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3월에는 전시(殿試)에서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인 차석으로 합격하여 원나라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에 고려 서장관의 임무를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서 관리 등용의 차례를 기다려서, 그해 11월에 고려의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제수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7세인 1355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4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5년 •정월에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서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書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되었고 •5월에는 봉상대부(奉常大夫)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전임되어 •재차 고려의 사신인 서장관의 임무를 수행하여 대도인 경사(京師) 북경에 갔습니다. •8월에는 원나라 황실과 원나라의 실록 및 문화·예술을 전승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했던 기관인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고, •겨울에는 원나라의 권경력(權經歷)이 되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부친인 가정 이곡 선생이 원나라 회시 전시에 급제했을때완 다르게 고려와 원나라에서 서로 앞다투어 관직의 승차로 목은 이색 선생을 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8세인 1356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5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6년 •정월에 모친인 함창군부인이 연로하여 옆에서 돌보아야 부친때처럼 분상(奔喪)의 불효를 범하지 않을것이라 원나라 조정에 읍소하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아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공민왕과 그 추종자들의 반원정책으로 정동행성의 이문소(理問所)가 혁파되고 곧이어 정동행성이 폐지되어 원나라에 있다가는 고려와의 연결고리가 끊길것을 우려하여 모친의 연로함을 구실로 고려로 귀국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7월에는 관제(官制)가 바뀌어 정4품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승진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겸(兼) 사관편수관(史館編修官) 지제교(知製敎) 겸(兼) 병부낭중(兵部郞中)이 되었습니다. •이 기록의 병부낭중(兵部郞中)이라는 벼슬로 보아 목은 이색 선생은 문관의 벼슬 뿐만 아니라 무관의 벼슬도 겸직하기 시작하여 고려 조종의 전반적인 업무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29세인 1357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6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7년 •2월에 종3품 하계의 품계인 중대부(中大夫) 시국자좨주(試國子祭酒)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겸(兼) 사관편수관(史館編修官) 지제교(知製敎) 지각문사(知閣門事)에 제수되었습니다. •7월에는 종3품 상계의 품계인 대중대부(大中大夫)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겸(兼) 사관편수관(史館編修官) 지제교(知製敎)에 전임되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려에서 목은 이색 선생은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관직 승차에 차별을 받던것에 비해 큰 시셈이나 차별없이 관직의 승차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0세인 1358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7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18년 •2월에 정3품 하계의 품계인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 지제교(知製敎) 지공부사(知工部事)에 승차되어 당상관의 목전에 이르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2세인 1360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9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0년 •3월에 정3품 상계의 품계인 정의대부(正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좌부승선(左副承宣) 지예부사(知禮部事)에 승진되어 •드디어 당상관의 반열에 진입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3세인 1361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0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1년에는 둘째 아들인 인재공 이종학이 출생합니다. •그해 11월 홍건적(紅巾賊)이 난을 이르켜 송경(松京)을 함락함으로써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에 목은 이색 선생이 공민왕의 어가(御駕)를 안전하게 수행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가 내려졌습니다. 더하여 아직은 원나라의 보호가 필요하다 간하여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게 됩니다. •12월에는 정3품 상계 정의대부(正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충춘추관(充春秋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교(知製敎) 지병부사(知兵部事)에 전임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4세인 1362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1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2년 •그해 12월에는 정3품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우대언(右代言)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 지제교(知製敎) 충춘추관(充春秋館) 수찬관(修撰官) 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로 전임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5세인 1363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2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3년에 2년전 복치한 정동행성의 학교·제사·교양·전량(錢粮)·저술 등의 일을 관장하는 원나라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천거되어 제수되었습니다. 이때 문익점이 원으로부터 목화를 드려왔습니다. •그해 12월에는 종2품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6세인 1364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3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4년 •정월에 종2품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제점서운관사(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이해에 목은 이색 선생의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의 문집 20권을 목은 이색 선생이 편집하여 가정 이곡 선생의 사위 박상충이 초판 20권을 출간했습니다. •또 이해에는 공민왕에 대한 원나라 기황후의 원한으로 원황제가 공민왕을 폐위하자 최영 이성계가 원나라 1만군대와 전쟁을 치뤄서 원나라 황제의 공민왕의 복위허가를 받아내고 목은 이색 선생이 감사문을 작성하여 원나라에 보냅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7세인 1365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4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5년 •3월에 종2품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전임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6월에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고, 역시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이어 문관시험을 주관하는 제조전선사(提調詮選事)가 되고, •10월에는 과거의 시제를 내고 면접을 보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습니다. 이때 목은 이색 선생은 과장에 서적반입을 금지하고 답안지 바꿔치기를 금지하는 과거부정행위방지법을 시행하셨습니다. •이해에는 땡중 신돈이 등장하여 고려의 국정을 농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39세인 1367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6년이자,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7년 •11월에 종2품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12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제점서운관사(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고, 역시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이해에는 절친 익제 이제현 선생이 작고했고 후일 목은 이색 선생을 귀양보내 죽이고 장남 이종덕과 차남 이종학을 참살한 이성계 5남 이방원이 출생했습니다. 또 신돈의 전행으로 무고한 관료들이 해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0세인 1368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7년이고, 원(元)나라에서는 지정(至正) 28년이자, 명나라 홍무 원년에는 3남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출생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원나라 정동행성의 일을 보는 원나라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에 천거되어 제수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원장의 명나라가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공격하는 등 명의 위세가 커지고 고려에서 친명파가 득세하여 원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그해 4월에는 관학인 국자감이 부실하여 최충의 사학인 구재(九齋)학당에 공민왕이 직접 방문하여 ‘왕안석이 그의 아들과 제자에게 시경.상서.주례 등에 대해 뭇선비들의 해설이 소용없다며 새롭게 주석을 달았다’는 삼경신의인 경의(經義)를 시험하면서 목은 이색 선생에게 시험문제인 시권(試卷)을 읽게 하여 이첨(李詹) 등 7명의 급제자를 뽑았습니다. •8월에는 종2품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승진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이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이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1세인 1369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8년이자, 명나라 홍무(洪武) 2년 4월에는 고려가 명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고 원나라 년호사용을 중단하고 명나라 년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고려에서는 친명파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무리한 조공요구를 견제하기 위해 명과 북원에 대한 양다리 외교를 전개합니다. •아무튼 그해 6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정2품 하계의 품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진현관대학사(進賢館大學士)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제점사(提點司)천감사(天監事)로 고쳐 임명되었습니다. •이해 8월에는 재차 과거를 주관하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장남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種德)이 사마시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남 문양공 이종덕의 첫아들인 장손주 사윤공(司尹公) 이맹유(李孟㽥)가 출생합니다. •11월에는 원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원나라가 지배했던 동녕부를 공격하여 탈환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2세인 1370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19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3년 •명나라가 처음으로 과거소를 내려 고려 선비에게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자 목은 이색 선생은 고시관이 되어 명나라 과거에 보낼 공사를 뽑게 되었습니다. •공사 선발을 위해 초장 2장 3장 등 3번의 시험을 거치는 삼장 통고법을 실시했습니다. •명나라 과거에 임할 공사로 이숭인 박실 권근(18세) 김조 유백유 박의중 등을 선발하였습니다. •이때 공사합격자 중 권근은 나이가 18세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권근이 바로 목은 이색 선생의 제자중에 한명으로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배원친명을 주장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도 함께한 양촌(陽村) 안동 권씨 권근(權近)입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3세인 1371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20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4년 •봄에는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잠 김약항 유관 등 33인을 선발하였습니다. •4월에는 명나라가 내외체제를 정비하고 북원을 압박하자 고려는 명나라와 북원사이에서 혼란이 가중되어가고 있었습니다. •7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공신(功臣)의 호인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에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가 더해진 정2품 하계의 품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습니다. •그해 9월에는 모친(母親)이신 요양현군(遼陽縣君) 함창군부인김씨(咸昌郡夫人金氏)께서 작고하셨습니다. •12월에는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에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가 더해졌습니다. •장자 문양공 이종덕의 둘째아들인 목은 이색 선생의 두번째 손주 문혜공(文惠公) 이맹균(李孟畇)이 출생하였습니다. •신돈 공민왕 시해음모 발각, 수원유배 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성계파는 우왕이 신돈과 원래 신돈의 첩인 궁인 한씨의 아들인 신씨라 폐위했다고 하고 목은 이색파는 궁인 한씨와 공민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씨의 후손이라 주장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4세인 1372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21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5년 명나라는 나하추의 우가장 침공을 구실로 고려의 요동출입을 금지하는 요동폐쇄 명령을 내립니다. •그해 6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정2품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兼)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제점서운관사(提點書雲觀事)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3년상 중임을 이유로 사양하였습니다. 공신의 호는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을 유지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5세인 1373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22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6년엔 명나라의 패악질이 극에 달하기 시작하여 요동으로 향하는 육로조차 막아버렸습니다. •공민왕은 그해 11월에는 모친의 3년상을 마친 목은 이색 선생을 종1품 대광(大匡)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임명하였습니다. •공신의 호는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을 유지했습니다. •이해에 장자 문양공 이종덕의 3번째 아들인 목은 이색 선생의 3번째 손주 정언공(正言公) 이맹준(李孟畯)이 출생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6세인 1374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 23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7년엔 명나라가 요동의 육로를 패쇄하여 명나라 조공은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명은 무리하게 제주마 2천필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인해 제주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최영장군이 평정했지만, 친명파와 친원파의 갈등이 깊어갔습니다. •9월하순에는 공민왕 시해사건이 벌어져 우왕이 집권합니다. 또 11월에는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무튼 이런 홀란한 시국에도 그해 12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종1품 하계인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에 진봉(進封)되고,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지서연사(知書筵事)에 임명되었습니다. •공신의 호는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을 유지했습니다. •차남인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 합격하였습니다. 인재공 이종학은 간재(簡齋) 신용희(申用羲) 문하생이었습니다. •장자 문양공 이종덕의 4째아들인 목은 이색 선생의 4번째 손주 판춘추공(判中樞公) 이맹진(李孟畛)이 출생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7세인 1375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원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8년에 이인임 일파가 우왕을 옹립하고 정도전 등 친명파들을 유배보내고 명과 원에 대한 양다리 외교를 전개합니다. 그 와중에 가정 이곡 선생의 사위이자 목은 이색 선생의 처남인 문정공(文正公) 박남박씨 박상충(朴尙衷)이 친명책을 주장하다 44세로 귀양길에서 작고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인임 일파는 원나라를 달래는 목적으로 8월에 원나라 고위관직을 지냈던 목은 이색 선생을 우왕으로 하여금 종1품 상계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에 진봉하게 하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신의 호도 추가하여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을 내려졌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8세인 1376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2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9년에는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16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되고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남 인재공 이종학은 양성이씨 삼중대광 문하시중 이춘부(李春富)의 딸인 군부인(郡夫人) 앙성이씨(陽城李氏)와 혼인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49세인 1377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3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0년에는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17세 나이로 한림직학사와 춘추관편수관 겸 지제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남 인재공 이종학의 장남이자 목은 이색 선생의 5번째 손자인 광목공(光牧公) 이숙야(李叔野)가 출생하였습니다. 그해 12월에는 명나라가 구금했던 요동의 고려인 350명을 풀어주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1세인 1379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5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2년 •10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종1품 하계 중대광(重大匡) 정당문학(政堂文學)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상호군(上護軍)으로 4년전보다 한단계 깍겨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목은 이색 선생의 입김으로 1377년 우왕 3년 2월에 북원이 한림승지 패자적을 파견하여 우왕의 책봉을 허가하자 반짝 북원의 연호 선광(宣光)을 사용한뒤 한해뒤인 1378년 우왕 4년 9월에는 다시 친명으로 돌아서서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다시 사용하면서 목은 이색 선생의 이용가치 없자 목은 이색 선생의 품계를 깍아버렸습니다. 이인임의 실리외교의 단면을 목은 이색 선생의 풍계의 높낮이로 살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함에도 목은 이색 선생은 세공을 깍아달라는 진정표(陳情表)를 작성하여 명나라에 보내 조공을 많이 깍았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차남 인재공 이종학의 둘째아들이자 여섯번째 손자인 진목공(晋牧公) 이숙휴(李叔畦)가 출생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3세인 1381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7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4년 명나라가 그동안 밀린 조공을 납부하라는 명목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다시 북원을 이용하여 보고자 •그해 9월에 목은 이색 선생을 다시 종1품 상계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한산군(韓山君)에 재임명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차남 인재공 이종학의 3째아들이자 7번째 손자인 총제공(晋牧公) 이숙당(李叔畦)이 출생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4세인 1382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8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5년 명나라가 정식으로 5년간 밀린 조공을 납부하라는 명목으로 금 5백 근·은 5만 냥·포 5만 필·말 5천 필 요구를 해오자 다시 북원을 이용하여 보고자 •그해 11월에 목은 이색 선생을 또다시 종1품 상계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재차 임명하였으나 병을 칭하여 사양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은 이색 선생에게 명나라의 무리한 조공요구에 대한 뚜렸한 해법이 없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설치하여 조공 납부엄무를 전담시켰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이해에 3남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15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합격하고 장남 문양공 이종덕의 장남인 장손주 사윤공(司尹公) 이맹유(李孟㽥)가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5세인 1383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9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6년 명나라의 조공 납부를 성공적으로 마치라는 명을 받아 •그해 3월에 목은 이색 선생을 또다시 종1품 상계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봉해지고 •11월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재차 임명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장자 문양공 이종덕의 둘째아들인 목은 이색 선생의 두번째 손주 문혜공(文惠公) 이맹균(李孟畇)이 13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후일 부윤 이점의 부인이 되는 인재공 이종학의 첫 따님인 목은 이색 선생의 첫 손녀가 태어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6세인 1384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0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7년에 명나라의 조공 납부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해 7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재차 종1품 상계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봉해지고 그해 윤10월에는 드디어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에서 마련한 금 5백 근·은 5만 냥·포 5만 필·말 5천 필중 금 5 백 근 중 96 근 14 냥 과 모자라 는 것은 말 1 백 四 필로 등으로 대납하는 것으로 하여, 인주이씨(仁州李氏) 연산군(連山君) 이원굉(李元紘)을 명에 보내 명에서 5년치로 요구한 조공의 전량의 납부를 완료했습니다. 차남 인재공 이종학은 24세의 나이로 종3품 중정대부(中正大夫)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제수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7세인 1385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1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8년에 명나라에 조공 납부가 완료됨에 따라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류중이던 김유 등이 풀려났고 우왕의 책봉을 허락했으며 전왕의 시호를 공민(恭愍)으로 허가받았습니다. •그 공으로 그해 12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드디어 정1품 상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임명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25세 나이로 정3품 하계 봉순대부(奉順大夫) 판내부시사 겸 지전법사사 삼사우윤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고 이어 정3품 상계 정순대부(正順大夫)에 임명되어 당상관에 오릅니다. •장자 문양공 이종덕의 둘째아들인 목은 이색 선생의 두번째 손주인 문혜공(文惠公) 이맹균(李孟畇)이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8세인 1386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2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19년에 명나라는 조공 납부가 완료되자 요동통행을 허락하고 7월에는 조공이 “3년 1조(三年一朝), 공마 54필(貢馬五十匹)”로 잠시 현실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4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5번째로 조종에 인재를 뽑기 위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맹사성 길재 조연 정곤 등 33명의 인재를 선발했습니다. •명나라 조공이 “3년 1조(三年一朝), 공마 54필(貢馬五十匹)”로 현실화 된 공으로 그해 7월에 목은 이색 선생은 재차 정1품 상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공신의 호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이 유지되었습니다.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26세 나이로 정3품 상계 정순대부(正順大夫) 성균관대사성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보문각제학에 임명되었고, 차남 이종학의 4째아들이자 목은 이색 선생의 8번째 손자인 양도공(良度公) 이숙묘(李叔畝)가 출생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59세인 1387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3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0년에 종2품 봉익대부 지밀직사사인 장남 문양공 이종덕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보내 철령 이북 공험령(公嶮嶺)에 이르는 땅은 모두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요동의 통행금지를 풀고 치수(徵收)하려는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0세인 1388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4년이자,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1년 •정월에 이성계의 협력을 받은 최영이 이인임과 임견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혼란을 막아달아며 목은 이색 선생을 정1품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 상호군(上護軍)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임명시켰습니다. •명나라가 3월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철령이북을 점령하자 고려조정에는 이성계에게 명을 공격하여 철령이북을 회복하라고 했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5월에는 장남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種德)이 이성계 일파에 39세를 일기로 살해되엇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중에서는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몰년을 부인 진선군정경부인 진주유씨가 자결했을 것으로 우추 1390년으로 잡았습니다. •이성계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6월에 목은 이색 선생을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다시 봉합니다. 부원군은 임금의 장인급으로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는 국가불천위의 지위도 함께 부여됩니다. •이어 다시 8월, 목은 이색 선생에게 고려 조정의 국정을 맏아달라며 다시 정1품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영효사관서연예문춘추관사(領孝思館書筵藝文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신의 호도 격을 높여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功臣)을 내렸습니다. 28세인 차남 인재공 이종학도 종2품 봉익대부로 승차시킵니다. •10월에는 명(明)나라에 이성계의 정권찬탈을 늦추기 위해 이방원을 달고 명년하정사(明年賀正使)로 입조하여 철령 이북 공험령(公嶮嶺)에 이르는 땅은 모두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이곳을 치수(徵收)하려는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1세인 1389년 고려에서는 우왕(禑王) 15년이자 창왕(昌王) 원년이자 공양왕(恭讓王) 원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2년 •목은 이색 선생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있는 사이인 봄에는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29살의 나이로 동지공거가 되어 김여지 황희 등 인재 33인을 선발했습니다. •6월 9일 정권을 잡은 이성계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며 폐위하고 9살의 창왕을 즉위시키면서 민심이 흉융하자 •7월에 다시 목은 이색 선생을 정1품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문하부상서시사(判門下府尙瑞寺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영서연춘추관사(領書筵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임명시키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다시 봉합니다. 부원군은 임금의 장인급으로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는 국가불천위의 지위도 함께 부여합니다. 공신의 호도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功臣)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가 9살로 즉위한 창왕이 우왕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죽이려 했다며 창왕을 11월에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그곳에서 이성계의 수하 유구가 창왕을 시해하고 강릉에 서인으로 귀양보낸 우왕은 서균형을 보내 죽인뒤 11월 15일 사돈벌 공양왕을 즉위시켰습니다. 12월에는 이에 항의하는 목은 이색 선생의 벼슬을 박탈하고 지금의 파주인 장단(長湍)으로 유배를 보냈고 차남 인재공은 순천으로 귀양을 보냈고 3남 양경공은 탄액하여 관직을 박탈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2세인 1390년 고려에서는 공양왕(恭讓王) 2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3년 •4월에 오사충이 목은 이색 선생이 페위되었던 우왕을 만났던걸 구실로 극형에 처할것을 상소하여 왕이 오사충과 전시에게 장단으로 가서 국문하게 하였습니다. 모진고문에도 죄없음을 일관하니 왕은 이색을 함창(咸昌)으로 귀양보냈습니다. •5월에는 명나랑 사신으로 갔던 왕방과 조반이 돌아와 목은 이색 일파인 윤이롸 이초가 명나라 황제에게 이성계파를 무고했다고 하는 바람에 목은 이색, 인재공 이종학, 이숭인, 권근, 우인보, 이림, 우인열, 이인민, 정지, 이귀생 10명을 청주옥에 가두고 국문토록 하였습니다. 국문하던중에 청주(淸州)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국문하던 문사관이 떠내려가고 인재공이 목은 선생을 부축하여 은행나무에 오르니 이 소식을 들은 왕이 모두 풀어주라 명해서 목은 선생은 지금의 파주인 장단(長湍)으로 돌아갔습니다 •8월에도 이성계 일파의 모함을 받아 재차 함창으로 귀양을 떠났습니다. •11월에는 김종연(金宗衍)의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이색의 동조세력을 숙청할 때 장남 문양공 이종덕(李種德)을 따르던 문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12월에는 모든것에 대한 용서를 받고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와중에도 30살인 차남 인재공 이종학은 5남이자 목은 이색 선생 9번째 손자인 순절공(順節公) 이숙치(李叔畤)를 출생시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3세인 1391년 고려에서는 공양왕(恭讓王) 3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4년 •1월에 정몽주의 주청으로 역사편찬을 하기 위해 공양왕은 목은 이색 선생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다시 봉할것을 추진했으나 이성계파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4월에는 차남 인재공 이종학이 31살의 나이로 오대산등 관동을 유람하며 관동록을 작성하여 시 20수를 남겼습니다. •6월에는 정도전이 우왕건을 재론하며 목은 이색 선생을 극형에 처할것을 주청하여 왕이 이색을 또 함창(咸昌)으로 귀양보냈습니다. •7월에는 정도전의 주도로 인재공을 진천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귀양길 장사현에서 손흥정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었습니다. •10월에는 목은 이색 선생은 죄사함을 받고 부인과 함께 한산으로 귀향했습니다. •12월에는 나라에 소환(召還)되어 벽상(壁上) 삼한(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다시 봉해지고, 공신의 호도 복원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차남 인재공 이종학은 차녀이자 목은 이색 선생 두번째 손녀가 유복녀로 출생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4세인 1392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1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5년 •4월에는 강(江) 밖으로 나가라는 분부가 있어 금주(衿州) 갔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기었습니다 •7월에는 이성계가 역성혁명(革命)을 일으켜 장흥부(長興府)로 폄척되었습니다. •10월에는 태조 이성계가 사면시켜주어 한주(韓州)인 한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후손들이 제사를 위해 살해되고 늦게 알려진 차남 인재공 이종학의 살해년으로 1392년을 쓰고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6세인 1394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3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7년 •8월에 권중달의 여식으로 부인인 정신택주 안동권씨가 63세를 일기로 작고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67세인 1395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4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8년 •5월에 여강(驪江)에서 더위를 식히었습니다.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살았습니다. •11월에는 태조 이성계가 사자(使者)를 보내서 목은 이색 선생을 불러 맞이하여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이 정중하게 사양하였지만 •그러한 연고로 조선조에서 임금이 아닌 분으로는 유일하게 4대문안인 종로 한복판 숙명여고 옛 터 옆(조계사 뒤)에 목은 이색 영당이 있는 이유입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나이 만으로 68세이고 우리나이로 69세인 1396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5년, 명나라에서는 홍무(洪武) 29년 •5월에 물러가기를 요청하고 5월 7일에 여주로 가서 더위를 식히려 가다가 여강(驪江 연자탄)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작고하였습니다. 사인(死因)에 대한 다른 설로는 정도전이 보낸 부하 자객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있습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태조 이성계가 매우 애도하여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정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서 교서(敎書)를 받들어 치제(致祭)하고 부증(賻贈)하게 하였으며,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도와주게 하고,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내렸습니다. •10월에 자손(子孫)들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韓州) 한산으로 돌아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습니다.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번지에 있는 묘소의 사진입니다.
•도난문화재도 있습니다. 바로 서천 문헌서원 목판「가정 · 목은선생문집판」입니다. •이 목판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입니다. •도난일자는 1991년 5월 14일에서 15일경입니다. •도난수량은 975판 중 139판을 도난당했습니다. 원래 총 180판을 도난당해서 그 중에 41점을 2007년 8월 9일에 회수했습니다. •도난장소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312 문헌서원입니다. •시대는 1298년에 태어나 1351년에 졸하신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 선생과 1328년 태어나 1396년에 졸하신 그의 아들 목은 이색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규격은 가로 76cm이고 세로 22cm입니다.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있으며,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목판은 한국 문화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산이씨 8세 목은2세 인재공 이종학 선조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