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0_直系譜

한산이씨(韓山李氏) 13세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1.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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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13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12대손이자 중시조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 음력 5월20일~1396년 5월20일) 선생의 목은6대손, 묵은7세(牧隱7世)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1479~1534-7-23) 선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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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홍(李彦洪) 선조님은 광목공(光牧公) 이숙야(李叔野) 선조님의 고손자이고 망월암공(望越庵公) 이축(李蓄) 선조님의 증손자이고 안소공(安昭公) 이훈(李塤) 선조님의 손자이고 공편공(恭編公) 이유청(李惟淸) 선조님의 4남3녀 중 차남으로 한산이씨 권지호장공계 13세로 호장공 이윤경 시조님의 12대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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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의 부인은 충주목사를 지낸 권자후의 따님인 안동권씨입니다. 두분 슬하에 충좌위 호군을 지낸 이계와 무주현감을 지낸 이소 두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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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李洎) 어른, 좌승지 이회 (李澮) 어른, 그리고 좌승지 겸 1등공신 이덕기 어른이 아들.손자.증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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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수와 예천군수를 지내신 집의공 이언홍 어른은 사후에 증손자인 목천현감(木川縣監) 이덕기(李德沂) 어른이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이 되시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신 공으로 인하여 사헌부 집의 봉훈대부에 추증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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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성군수 이충연 (李沖淵) 어른을 비롯하여, 18 열녀 경주최씨의 부군인 이창직 (李昌稷) 어른, 19 병마절도사 이수해 (李秀楷) 어른, 20 상주영장 이사목 (李思牧) 어른, 21 연산군수 이규첨 (李奎瞻) 어른, 22 절충장군 이원재 (李原載) 어른, 23 첨정 이원효 어른, 24 혜민원 주사 이승태 어른, 25 궁내부 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 26 평안북도 동면 면장 이철규 어른, 27 만주국 미곡검사관 이성구 어른, 28 제 부친인 창경궁 식물원장 방원 이성찬 선생등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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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인 공편공 이유청 선조님이 만20세되던 해인 1479년, 조선(朝鮮) 성종(成宗) 10년이자 명나라 성화(成化) 15년에 목사를 지낸 이령의 딸 경주이씨 사이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이언홍 선조님이 출생합니다. 2살 위로 후일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이언호 어른이 형님이고, 세자익 위사 좌익위를 지낸 이언식 어른과 이언만 어른이 동생분들입니다. 누이분들은 한성부 판윤을 지낸 허흡 어른과 호조판서를 지낸 공무공 장언량 어른들과 혼인을 하셨습니다. 또한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은 세조를 보위에 올렸던 의정부 영의정 충성공 압구정 한명회의 외동아들 양호공 한보의 처조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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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은 만 15세때 부터 만 27세때까지 총 12년을 부친 공편공(恭編公) 이유청(李惟淸) 선조님이 연산군의 집권기간 내내 탄압을 받아 삭탈관직에 귀양살이에 관노의 신분에 까지 이르게 되어 입신양면 할 기회를 가질수 없었습니다. 부친 공편공(恭編公) 이유청(李惟淸) 선조님이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오르신 이후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은 만 28세가 되어서야 안정된 삶을 영위 하실수 있었습니다. 하여 1516년, 조선(朝鮮) 중종(中宗) 11년, 명 정덕(正徳) 11년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이 만 37세 될때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는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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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학문에 매진하여 1517년, 조선(朝鮮) 중종(中宗) 12년, 명 정덕(正徳) 12년 만 38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을 하셨습니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목은 이색의 후손들에게 허락하여 대대로 관직의 길을 열어주는 음보의 혜택으로 관직에 출사하여 내직으로는 사헌부 감찰(정6품)과 의금부 도사(종6품), 종묘서령(宗廟署令) 그리고 충훈부 경력(종4품)을 지내셨습니다. 이후 외직으로는 청도군수와 예천군수를 역임하시며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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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은 만 67세의 나이로 작고 하시니 이때가 1546년, 조선(朝鮮) 명종(明宗) 1년, 명 가정(嘉靖) 25년이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은 증손자인 목천현감(木川縣監) 이덕기(李德沂) 어른이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이 되시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신 공으로 인하여 사헌부 집의 봉훈대부에 추증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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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의 묘소는 고양시 도내동 인재공파 광목공 한산이씨 선영에 증조부 이축 이하 후손 어른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부친 공편공 이유청 선조의 묘소 바로 아래쪽에 조성되어있습니다.

이곳 선영은 인재공파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관리하고 있어서 그 어떤 가문의 선영 못지 않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의 묘소는 능선에 단을 쌓고 그 위에 부인 안동권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고 봉분 가운데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넉넉한 인상을 가진 문인석이 두 쌍 세워져 있습니다. 봉분 앞쪽에 세워진 묘표는 이수문양의 머릿돌을 지니고 있으며 앞면에는 통훈대부충훈위경력이공지묘(通訓大夫忠勳衛經歷李公之墓) 라고 되어 있어 충훈위 경력을 지낸 이언홍 선조의 묘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묘표 뒷면에는 가계와 행적에 대한 음기가 새겨져 있으나 오랜세월 마모로 여러자가 마모되어 선명하게 알아 보기는 힘들지만 그 내용은 거의 다 파악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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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어른 묘소의 묘비에 적힌 내용을 알아보겠니다.

묘비는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충훈부 경력 이공묘갈명 병서’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교서관판교 박충원(朴忠元)이 글을 지었다’고 작가가 누구인지가 이어집니다.

글의 내용을 해설해 보면

‘공은 한산(韓山)의 대성(大姓)으로서 6세조(世祖) 색(穡)은 문장과 덕으로 고려 말기에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왕조에 들어와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으니 호는 목은(牧隱)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덕을 기르고 복록을 쌓아 대대로 이어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공에게 증조부가 된다. 훈(塤)은 의정부 참찬을 지내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는데, 곧 좌의정을 지내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진 유청(惟淸)의 아버지이며, 공은 한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한원 부인(韓原夫人) 이씨(李氏)는 광주목사 녕(聆)의 따님으로 동본(同本)은 아니며 현숙하고 후덕한 품성을 함양하여 성화(成化) 기해년 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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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언홍(彦洪)이고, 자는 추천(椎川)이다. 어려서 가정의 훈도를 받아 호협(豪俠)한 습성을 버리고 학문에 몸을 의탁하여 정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一字缺~) 구하기에는 불리하였다. 여러 차례 과장(科場)에 나아가 그 재능을 행하였으나 유사(有司)가 답이 없었다. 이에 다른 방도로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보직되었다가 금오랑(金吾郞)으로 옮겼으며 얼마 후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가 되고 또 사헌부에 들어가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종묘서 영(宗廟署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에 제수되었다.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중선(重選)을 거듭하였다. 경력(經歷)이 된 것은 세 번인데 곧 충훈부(忠勳府), 의빈부(儀賓府), 도총부(都摠府)이며 첨정(僉正)이 된 것은 두 번이니 사복시(司僕寺), 사섬시(司贍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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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에 모친상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자 사의(司議)를 제수하였다. 외직으로 청도 (淸道), 예천(禮泉)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명성과 공적이 높았으니 백성들은 공이 떠난 후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관아에서 일에 임하여서는 청렴하고 정직하여 요란하지 않았으니 그 천성이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문 또한(~1자결~) 그러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들 ?능히 그 업을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정 25년 7월 23일 병으로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 69세이다. 이해 9월에 고양군(高陽郡) 남쪽 궐산(蕨山)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언덕 선영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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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자라나면서 가업을 이어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겸손하게 뜻을 세우고 몸가짐을 공손하고 검소하게 하였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고 (~4자결~) 집안을 다스렸다. 지금 세상에서는 많이 얻을 수가 없었으니 정과(正科) 출신이 아니면 비록 (~1자결~) 사람이라도 만족스런 지위에 오를 수 없었으니 어찌 (~1자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신의 영리를 추구하지 않았으니 그 후손이 반드시 숭상 받게 될 것이다. 공은 충주목사(忠州牧使) 권자후▨▨(權▨▨)의 여섯째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장남 계(洎)는 봉정대부(奉正大夫)이며 차남 소(沼)는 선교랑(宣敎郞)이다. 봉정 계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회(澮), 주(湊), 도(濤)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선교 소는 1남을 낳았는데 역시 어리다. 하늘이 공을 도왔으나 오히려 (~1자결~) 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4자결~) 깨끗하나 (~7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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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嘉靖) 무신년 ▨월 17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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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忠勳府經歷李公墓碣銘幷序 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校書官判校朴忠元撰公韓山大姓六世祖有諱曰穡以文章著德嗚麗李入我朝終韓山伯號牧隱諡文靖毓德委祉世有聞人曰諱▨觀察黃海於公實曾王父曰諱塤爲政府參賛封韓城君即左議政韓原君惟淸之皇考公韓原君第二子也韓原夫人李氏光州牧使諱聆之女非韓之李配德娠賢生公於成化己亥公諱彥洪字椎川幼承庭訓刮去豪習委已於學中丁卯司馬擧▨不利於求屢就場屋售其能有司不答去由他岐補歸厚署別提移金吾郞尋遷司饔院主簿入司憲府爲監察進宗廟署爲令轉掌隷院司議決訟重選也爲經歷者三曰忠勳府曰儀賓府曰都摠府爲僉正者二曰司僕寺司瞻寺辛卯丁內憂卒喪▨授司議出歷淸道禮泉兩郡守皆著聲績民有去後思凡居官莅事淸謹不撓非但天性其家▨然也人皆曰能世其業嘉靖二十五年七月廿三日以疾卒于家享年六十九是年九月葬于高陽郡南蕨山壬坐丙向之原從先兆也公生長業族不喜侈靡立志謙遜持身恭儉事親孝誠治家▨▨▨▨今世不可多得第國▨非出正科雖其▨人位不滿其▨惜哉不贏其躬必尙其後公娶忠州牧使權公▨▨六女生二男長曰洎奉正大夫次曰沼宣敎郞奉正生四男一女曰澮曰湊曰濤餘幼宣敎生一男亦幼天之報公 尙未▨也銘曰 ▨▨▨▨淸不▨ ▨▨▨ ▨▨▨ 嘉靖戊申▨月十七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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