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진짜 '토정비결(土亭秘訣)'은 「과욕설(寡欲說)」]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 2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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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d0j5PteSJE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 선생은 한산부원군 목은 이색 선생의 6대손으로 수원판관(水原判官)을 지낸 이치(李穉, 1477년~1530년) 어른의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1) 『선조실록』에 의하면 토정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이웃이 요란하게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천하다고 여겨 과거를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그 대신 토정 선생은 세상을 유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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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섬을 돌고 조각배를 타고 제주도를 다녀오고 당진포구를 기점으로 일본과 서역을 오가며 교역도 하고 아라비아 상인들을 따라 아랍을 여행하며 해외문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행을 할때는 놋쇠 솥을 삿갓 대신 쓰고 그 솥으로 밥을 해먹으며 여행을 하였습니다. 율곡 선생과 일본을 돌아보고 임진왜란을 10년 전에 예고하신 일도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참고: 금계필담(金溪筆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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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은 학문이 깊은데다 부모 형제에 대한 효도와 우애가 알려지면서 늦은 나이에 정도전이 창안해서 시행했던 초야에 묻힌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인 유일(遺逸) 제도로 조정에 천거되어 토정 선생이 57세 되던 1573년에 포천 현감에 제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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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현감에 취임하는 날, 진수성찬으로 차린 밥상을 물리치고 잡곡밥에 우거짓국 한 그릇만 올리라고 명합니다. 밥상도 자신의 삿갓을 넣은 상자를 사용하라고 요구합니다. 더하여 포천의 지방 관리들이 취임하는 토정 선생에게 인사를 왔을 때 시래기죽을 내놓았습니다. 백성의 고혈로 호의호식하던 지방 관리들에게 거친 시래기죽은 고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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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이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올린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이포천시상소)』라는 상소문을 보면 토정 선생이 포천 백성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게 하려는 실체적 방책을 볼수가 있습니다. 토정 선생은 포천현의 상황을 조석으로 죽게 될 거지 고아와 같으니 조정에서 긴급한 대책을 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방책으로는 부유한 고을의 곡식으로 포천의 굶주린 백성을 구호할 것과 서해안의 염전을 포천현에 떼어 주어 염전의 소금을 구호물자로 활용하자는 방안이 들어있습니다. 이는 토정 선생이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보다 200년 앞서 국부론을 주창하셨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문서이기도 합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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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이 포천 현감으로 복무한 1년간 조정에 올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포천 현감을 사직하였습니다. 토정 선생이 포천을 떠나는 날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만류했다 (邑民攔道留之)’고 합니다. 토정 선생은 포천 현감에 이어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아산 현감으로 복무 한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재임 중 숨졌습니다. 아산 현감 시절에는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부랑인의 구호와 자활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걸인청(乞人廳)’은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된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입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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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은 ‘토정(土亭)’이라는 호처럼 흙집에 살며 검약하고 절제 있는 생활로 일관했습니다. 팔도를 유람하면서도 말도 빌리지 않고 걸어서 다녔고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매 맞는 일까지 자청해 시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토정선생유사」 등에는 토정 선생은 베옷 차림에 솜옷을 짊어지고 쇠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니는 기행(奇行)을 하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한 토정 선생의 기행중에 솜옷은 추위를 대비하려는 것이었고, 쇠 모자는 밥 짓기 위한 솥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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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의 좌우명은 『토정유고』에 실린 「과욕설(寡欲說)」로 ‘욕심’을 가장 경계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토정유고』에 조차도 수 많은 저술을 뒤로 하고 시 2편, 논설 3편, 상소문 2편만 올리도록 하여 후세에 받을 칭송조차 뒤로 하였습니다. 유학으로 개국한 조선이 잡학을 경시하는 바람에 토정선생이 연구하고 집필한 천문, 지리, 기문, 둔갑 등에 관한 서적들은 유실되었고 간간이 부분적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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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너나 할것없이 뽑아보는 『토정비결(土亭秘訣)』도 민초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후세사람들 조차 토정 선생이 저자인지 긴가 민가하게 자신을 내세우질 않았습니다. 원래 『토정비결』은 『주역』에 능한 토정 선생이 생년월일 생시와 주역의 괘를 이용해 평생 운수를 보는 것이었지만 생시를 빼서 재미로 1년 운수를 뽑아보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대신 토정 선생은 삶의 지침이 되는 중요한 진짜 비결을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바로 ‘과욕(寡慾)’입니다. 돈만 아는 사람들에게 “욕심은 본능이며, 추구할수록 커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토정 선생은 욕심이 인간의 본성일지라도 부단히 줄여간다면 없앨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욕심을 적게 하는 '과욕(寡慾)'을 실천하다 보면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욕심을 줄여라!" 500년전 토정 이지함 어른이 후손들에게 남긴 진짜 '토정비결'은 바로 ‘과욕(寡慾)’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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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를 사셨던 토정 선생의 세계로 열린 그 넓은 개혁의 정신과 욕심을 줄이는 과욕(寡慾)의 정신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2022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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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마음을 수양하는데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욕심을 없게 하는 시작입니다. 욕심을 줄이고 또 줄이다 보면 적은 것조차 없게 됩니다. 이런 경지가 되면 마음이 비고 신령스러워집니다. (孟子曰 養心 莫善於寡欲 寡者無之始 寡而又寡 至於無寡 則心虛而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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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함(李之菡, 1517~1578), 『토정유고(土亭遺稿)』,「토정선생유사[土亭先生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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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嘗爲抱川縣監, 以布衣草鞋布笠上官. 官人進饌, 熟視而不下箸曰, 無所食. 吏人跪于庭曰, 邑無土産, 盤無異味, 請改之. 俄而盛陳嘉羞而進. 又熟視之曰, 無所食. 吏人震恐請罪. 先生曰, 我國之民生困苦,皆坐食飮之無節, 吾惡夫食者之用盤. 命下吏雜五穀, 炊飯一器, 黑菜羹一器, 盛之笠帽匣進之. 翌日, 邑中品官來謁, 爲作乾菜粥勸之. 品官低冠擧匙, 乍食乍吐, 先生食之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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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선생이 포천 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베옷과 짚신, 포립(布笠) 차림으로 관청에 출근하였다. 관아의 아전이 음식상을 올리자 선생은 한참을 살피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게 없구나.” 아전이 뜰에 무릎을 꿇고 “고을에 특산품이 없어 밥상에 별미가 없습니다.”라며 다시 상을 차리겠다고 하였다. 얼마 뒤 진수성찬이 올라왔다. 선생은 다시 한참을 들여다본 뒤 말하였다. “먹을 게 없구나.” 그러자 아전이 두려워 떨며 죄를 청하였다.
선생은 “나라 백성들은 생계가 곤궁한데, 모두들 앉아 먹고 마시며 절제가 없다. 나는 밥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아전에게 잡곡밥 한 그릇과 우거짓국 한 그릇만을 삿갓 상자에 담아 올리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읍 중의 관리들이 와서 인사를 할 때, 시래기죽을 쑤어 권하였다. 관리들은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는데, 먹자마자 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죽을 다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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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 목은1대손: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 > 목은2대손: 문열공(文烈公) 존양재(存養齋) 이계전(李季甸) > 목은3대손: 이우(李堣) > 목은4대손: 이장윤(李長潤) > 목은5대손: 이치(李穉) > 목은6대손: 토정(土亭)이지함(李之菡)
  2.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인 『국부론』 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때 쓴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이포천시상소)』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國富論)입니다.  “포천현의 상황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抱川之爲縣者。如無母寒乞兒。五臟病而一身瘁。膏血盡而皮膚枯。其爲死也。非早卽夕。)”
  3.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설립한 빈민구호시설 ‘걸인청(乞人廳)’은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된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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