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2세대)이지명(李知命)선조님의 발자취와 역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1. 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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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 이지명(李知命, 1127(인종 5)∼1191(명 종 21)) 자(字) 낙수(樂叟) 호(號) 문평(⽂平)

 

글 쓴 이 : 호장공26세손 이승규(李升珪) 

 

한산이씨(韓⼭李⽒) 모든 한 가족이며, 한산이씨(韓⼭李⽒)의 역사이다. 몇년을 연구하고 공부하여 얻어낸 결과물이고 현재 저의 시조인 호장공계(⼾⾧公系)(1세대)이윤경(李允卿)조상님으로 등록 되어있고, 후의 자 (2세대)인간(仁幹)조상님으로 현제 등록돼있으나, 옛 구 집안에서 내려저오는 족보를 참조하였고, 1979년도 대종종에서 발행한 제 3권에서도 참조를 하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권지공계(權知公系)(1세대)이윤우(李允佑)조상님, 이윤좌(李允佐)조상님, 호장공계(⼾⾧公系)(1세대)이윤경(李允卿)조상님 세 형제로 나누어 전해 들었으나, 고려시대에서부터 내려져오는 목판으로 만든 족보를 판독한결과 우리가 알고있는 권지공계(權知公系)(1세대)이윤우(李允佑)조상님.이윤좌(李允佐)조상님, 호장공계호장공계(⼾⾧公系)(1세대)이윤경(李允卿)조상님과 한분의 인물로 사료된다. 이 한분을 선조들께서 삼형제 나누어 종파계립으로 두 종파를 새로이 만들었을거라 조심스래 비추어보며, 셋 조상님들을 한분으로 합하여 고려권지호장공(⾼麗權知⼾⾧公)이라 불려야 정상이라 할것이다. 후 자 (2세대)이지명(李知命)조상님과 (2세대)인간(仁幹)조상님 또 한 동일인물로 확인된다. 또 한 집에 전해내려오는 족보상에 현제 시조인 권지공계(權知公系)(1세대)이윤우(李允佑)조상님께서 호장공계(⼾⾧公系)(1세대)이윤경(李允卿)조상님으로 존함이 개명 되었고. 또 한 그 밑으로 전해저 내려오는 한산이씨 선조님들의 존함이 1글자 혹은 2글자로 개명되었다는 근거도 확인돼었다. 어느 시대에서부터 권지공계(權知公系)(1세대)이윤우(李允佑)조상님과 이윤좌(李允佐)조상님, 호장공계(⼾⾧公系)(1세대)이윤경(李允卿)조상님께서 삼형제로 나누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진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는 현실이다. 후손으로 써 앞으로 더욱더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여 옭바르게 잡아야할 몫은 앞으로 살아나가야햘 후손으로써 취해야할 자세로 사료된다.

 

글 쓴 이 : 호장공26세손 이승규(李升珪) 이지명(李知命) 성명(姓名) 이지명(李知命) 본관(本貫) 한산(韓⼭) 시대(時代) 1127(인종 5)∼1191(명 종 21) 자(字) 낙수(樂叟) 호(號) 문평(⽂平)

 

이지명(李知命) 1127(인종 5)∼1191(명종 21).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한산(韓⼭). 자는 낙수(樂叟). 1144년(인종 22)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황주서기(⿈州書記)·충주판관(忠州判官)을 거치는 동안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히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170년(의종 24)무신란이 일어나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문신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지방관리 때의 혜정 (惠政)으로 말미암아 무사할 수 있었다. 무신란 직후 상서우승에 발탁되었고, 1181년(명종 11)우간의대부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1184년에는 한림학사(翰林學⼠)와 승지(承指)를 겸하였으며 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외직으로 나가 서해도안 찰사와 서북면병마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그뒤 정당문학(政堂⽂學)에 오르고 1190년에는 태자소부(太⼦少傅)를 겸하였다. 그는 많은 서적들을 널리 읽고 시부(詞賦)를 잘 지었으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隷書) 팔분체(⼋分體)에 능하였다. 1182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1190년에는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조충(趙#충01)·한광연 (韓光衍)·이규보(李奎報)·유승단(兪升旦)·유충기(劉과基) 등이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시호는 문평(⽂平)이 다.

참고문헌 ⾼麗史, ⾼麗史節要. 〈李益柱〉 충주시(역사 인물)

 

이지명(李知命) 본관은 한산 (1127(인종 5) ∼ 1191(명종 21))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신이며 재상으로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낙수이다. 1144년(인종 22) 과거에 급제하였 으며 황주서기(⿈州書記)· 충주판관(忠州判官)을 거치는 동안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히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 문신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지방관리 때의 혜정으로 말미암아 무사할 수 있었다. 무신란 직후 상서우승에 발탁되었고 1181년(명종 11) 우간의대부를 거쳐 우산기상시로 임명되 었다. 1184년에는 한림학사(翰林學⼠)와 승지(承指)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외직으로 나가 서해도안찰사와 서북면 병마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그 뒤 정당문학에 오르고 1190년에는 태자소부를 겸하였다. 그는 많은 서적들을 널리 읽고 사부를 잘 지었으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1182년 동지공거로서 1190년에는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 하였는데 조충·한광연·이규보·유승단 유충기 등이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65세로 졸하였고 시호는 문평(⽂平)이다. <서천군지> 第8編 성씨인물(姓⽒⼈物) 第2章 인물(⼈物) 第6節 문학(⽂學)

 

이지명(李知命) 고려 예종(睿宗) 1년(1469)에 태어나서 명종(明宗) 21년(1191)에 졸한 고려 명종때의 문신이다. 자는 낙수(樂叟)이고 한산출신이다.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황주서기(⿈州書記)충주판관(忠州判官)으로 있으면 서 선정을 베풀어 환영을 받았으므로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많은내외문신들이 화를 입었으나 지명은 백성의 보호를 받아 화를 면하였다. 서도(書道)에 능하고 특히 초서(草書)와 팔분체(⼋分體)에 정교하엿다. 시호는 문평공(⽂平公)이다. <서천군지> 第8編 성씨인물(姓⽒⼈物) 第2章 인물(⼈物) 第14節 과환(科宦) 문과(⽂科) <한산군 편> 이지명(李知命) (문학편 참조)

 

절에는 고려 이지명(李知命)이 지은 현오국사탑비명(玄悟國師碑銘)

비석의 제액(題額)은 [고려국 대화엄 부석사 주지 증시현오국사비명 병서(⾼麗國⼤華嚴浮⽯寺住持贈諡⽞俉國師碑銘 幷序)]이다. 비신(碑⾝)은 높이 1.88m 너비 0.97m의 점판암으로, 화강암의 부석(趺⽯)위에 세워졌으며, 이수( ⾸)는 없다. 제액(題額)의 글자는 지름 약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3.3㎝의 해서(楷書)이다. 제액 다음 행문(⾏⽂)에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를 다음과 같이 명기(明記) 하였다. 「朝散⼤夫左散騎常侍翰林學⼠寶⽂閣學⼠知 制誥兼 太⼦賓客 賜紫⾦⿂袋⾂ 李知命」 「⼊內侍郞將作少監國學直講充史館修撰官兼 太⼦中允賜紫⾦⿂袋⾂ 柳公權」 이 기록을 통해 「서봉사 현 오국사탑비」의 본문을 지은 이는 이지명(李知命)이며, 글씨를 쓴 이는 고려 때 초서(草書)로 유명한 유공권(柳公權)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말미(末尾)에 「⼤定⼆⼗五年 ⼄巳⼆⽉ ⽇⾨⼊等奉 宣銷峰寺⽴⽯ 興王寺⼤師 敏求 刻字」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정(⼤定) 25년은 명종 15년(1185) 으로서 현오국사가 입적 한지 7년 후이다. 흥왕사(興王寺)의 대사(⼤師)인 민구(敏求)가 각자(刻字) 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다. 비석의 조형은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 ⼤智國師碑), 보광사중창비(寶光寺重創碑)와 같이 윗변의 양각(兩⾓)을 귀접이한 규형(圭形)이고, 지대석(地臺⽯)도 4변을 접었다. 개석(蓋⽯)과 여러 조식(彫飾)을 생략한, 고려말 석비(⽯碑)의 새로운 조형을 형성하는 좋은 사례이다. 명문(銘⽂)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휘(諱)는 종린(宗璘), 자(字)는 중지(重之)이며, 속성(俗姓)은 왕씨(王⽒)이다. 15세에 불일사(佛⽇寺)에서 수계(受戒)하고 의종(毅宗) 원년(1147)에 수좌(⾸座)가 되었다. 명종(明宗)은 원년 (1171) 중추(仲秋)에 그에게 좌세(佐世)의 호(號)를 내리고,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가사(袈裟)한 벌을 하사하였다. 명종 8년(1178) 7월에 53세 나이, 법랍(法臘) 39세로 입 적하였다. 명종은 매우 애통해하며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國師)로 봉하고, 이통해하여 시호(諡號)를 현오(⽞悟)라 하였다. 같은 달 17일에 동림(東林) 산기슭에 다비(茶毘)하였 다. 현오국사는 대각국사(⼤覺國師)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고승(⾼僧)이다. 서봉사의 폐사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병자호란 중인 1637년 1월, 이곳 광교산에서 김준룡 장군과 청나라 군사와의 격전이 있었던 사실과 백자편, 와편 등의 자료로 보아 병자호 란으로 폐사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용문사중수비(⿓⾨寺重修碑) 시 대 : 고 려 연 대 : 1185년(명종15년) 유 형/재 질 : 비문 / 돌 문 화 재 지 정 : 비지정 크 기 : 높이 197cm, 너비 78.8cm, 글자크기 1.8cm 출 토 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소 재 지 : (한국)-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서 체 : 행서(⾏書) 찬자/서자/각자 : 이지명(李知命) / 연의(淵懿) / 곡석(斛錫) 경상북도 예천(醴泉)에 있는 용문사(⿓⾨寺)의 연혁과 중수사실을 기록한 비. 국왕의 명령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이지명(李知命 : 1127~1191)이 짓고 승려인 연의(淵懿)가 글씨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용문사는 본래 신라말에 두운(杜雲)선사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고려 중기까지 그 문도들이 계속하여 주석하였다. 1165년(의종 19)에 당시 주지이던 조응(祖應) 선사가 사찰을 중수하고자 하여 제자인 자엄(資嚴)에게 일을 담당하게 하여 1179년(명종 9)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조응은 해주 출신으로 조계종 승과에 합격한 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재를 털어 음죽현(陰⽵縣)의 흑석원(⿊⽯院)과 보주(甫州)의 두천원(頭川院)을 중수하는 등 사찰의 중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려중기 용문사의 현황 뿐 아니라 담선법회와 당시 선종계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면의 본문은 1185년(명종 15)에 새겨졌으며 뒷면의 음기에는 1188년(명종 18)에 기록한 조응선사 제자들의 명단이 있다. 현재 용문사에 비석이 남아 있는데 중간 부분이 잘리어 일부의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출처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316

 

고려 이지명(李知命) 현오국사탑비명(玄悟國師碑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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