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05. 토마스 만 (Thomas Mann) 마의 산 (Mountain Magic)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2. 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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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S9IjEKKTLg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권의 그 다섯번째 책, 토마스 만(Thomas Mann)의 魔의 山(Der Zauberberg; The Magic Mountain)을 시작합니다. 토마스 만은 20세기 독일 문학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급진적 작가 하인리히 만의 동생입니다. 1924년에 ’사회적 휴머니즘’이라는 토마스 만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교양소설 장편소설 魔의 山을 발표했습니다. 토마스 만 스스로 이 교양소설 魔의 山을 ‘독일적인, 전형적인 독일적인(deutsch, typisch-deutsch)’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교양소설 魔의 山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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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1875년 6월 6일, 독일, 뤼베크 - 1955년 8월 12일, 스위스)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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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토마스 만이 1912년부터 1924년까지 12년간 집필한 생명의 위험이 예보(豫報)된 사람들의 사회는 반대로 생에 염증을 느낀 세계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입니다. 그들의 세계는 남이 하는 짓을 흉내내고 심령술(心靈術), 우표수집 등의 놀이가 무질서하게 유행됩니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미래만을 희구하는 이상주의자, 광신적으로 신(神)의 나라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유대인은 이상주의자인 휴머니즘의 허위성을 반박하여 결투장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러시아 여인은 이 남자 저남자와 애정행각을 하며 카스톨프의 구애를 무시하고 산을 내려가나 동물적인 정력을 과시하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끌려 되돌아옵니다. '마의 산'에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코자 하산합니다. 2022년의 병든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착각이 들게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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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 (Magic Mountain, 1924년)의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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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스위스 고산 지대인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 '베르크호프'입니다.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전공하고 이제 막 조선 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곳에 도착합니다. 환자로 입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입원해 있는 사촌을 문병하기 위해 3주 예정으로 온 것입니다. 사촌 요하임 침센은 사관후보생이었으나 폐병이 들어 다보스 요양원에서 요양 중입니다. 이곳에 도착한 카스토르프는 자기도 폐결핵의 징후가 있어 침센과 같이 요양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점차 고원 지대에 있는 요양원의 마적(魔的)인 분위기에 휩쓸려 죽음과 병에 대한 어떤 친근감을 갖게 되고, 그곳에 요양중인 러시아 출신의 클라브디아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7년간 요양원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을 고향 다게스탄에 남겨 두고 유럽 각지의 요양원과 온천장을 전전하는 방종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지만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 입원해 있었던 이탈리아 출신 인민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카스토르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저 아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쇼샤 부인에게 빠져 있는 카스토르프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7개월 후 사육제 날 저녁에 카스토르프는 쇼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날밤 그녀에게 연필을 돌려주러 가서 사랑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산을 내려가 버립니다. 그러다가 카스토르프는 유대인 나프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예리한 정치 이론을 펼치며 독재를 찬양하고 테러를 긍정하며, 반개인적인 전제 정치를 옹호하고 공산주의적 이상향의 도래를 확신하는 예수회 회원입니다. 그래서 개성을 존중하는 진보주의자 세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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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임 침세는 호전되지 않는 병세에 지친 나머지 하산하여 군무에 종사합니다. 사촌을 떠나 보내고 혼자 요양원에 남은 카스토르프는 스키를 배웁니다. 어느 날 그는 스키를 타고 산으로 갔다가 눈보라 때문에 오두막에 갇혀 꿈을 꾸는 중에, 지금까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착하고 올라르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감에서 벗어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후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 부인이 은퇴한 커피 왕 페퍼코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납니다. 카스토르프는 이 현세적인 생의 거인에게서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개념적이 아니고 감각적이며 현실적인 삶을 중시하는, 힘을 부르짖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도 생애 패하여 자살을 하고, 쇼샤는 다시 하산합니다. 쇼샤가 떠난 후 카스토르프는 허탈 상태에 빠집니다. 요양원에는 히스테리 환자가 속출합니다. 세템브리나와 자유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파렴치하다'고 모욕을 당한 나프타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장에서 세템브리나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자 나프타는 비겁자라고 흥분하며 자기 머리를 권총으로 쏘아 버립니다. 이와 같이 카스토르프는 7년 동안 산지에서 온갖 체험을 하며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카스토르프는 마의 산을 내려와 전쟁에 참가해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 노래를 중얼거리며 혼란 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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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 (Magic Mountain, 1924년)의 교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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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정치 및 사회 의식의 대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에, 토마스 만이 작가로서 그의 정신적 삶의 궤적을 기록한 '교양 소설'이자 '입문 소설'이며 '성년식 소설'이다. 성배를 찾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의식화를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이 이념의 각축장을 벌이는 이 작품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주인공 카스토르프와 그의 교육자인 세템브리나이다. 이 소설의 중심 모타프는 삶과 죽음, 정신과 감성의 문제이다. 즉 평범한 한 청년이 죽음에 애착을 느꼈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정신적인 변화를 그린 것이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하노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아센바흐가 그랬듯이 죽음에 친근감을 느꼈던 토마스 만의 주인공이 여기서는 그것을 탈피하고 삶의 세계로 발을 내디게 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죽음의 애착에서 조화로운 삶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교양 소설이다. 카스토르프는 인간은 형식, 논리, 건강, 시간 등으로 대표되는 생에만 몰두해서는 안되고, 자유, 위험, 병원 등으로 대표되는 죽음에 빠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마스 만의 죽음에 대한 애착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이고, 죽음의 극복은 니체에 대한 긍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유럽 문명 세계의 정신이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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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 (Magic Mountain, 1924년)의 문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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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20세기 최고의 고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토마스 만의 문제작입니다. 흔히 시대 소설, 교양 소설, 철학 소설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딱히 어느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마의 산』을 시대 소설로 파악하여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토마스 만이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회를 비판하고 특히 세템브리니를 통해 계몽주의를 주창한다고 합니다. 『마의 산』을 교양 소설로 보는 연구자들은 1950년, 60년대에 행해진 탈정치적인 형식 분석을 근거로 작품의 시도 동기, 서술 태도, 인용의 해석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마의 산』을 철학 소설로 보는 사람들은 시대 소설이나 교양 소설과는 무관한 쇼펜하우어적인 철학 소설로 보고 작품의 구조가 하강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주인공이 결국 시민 사회에 편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온갖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합니다. 처음에는 시민적 정체성이 존재하지만 마지막에는 전쟁에서 정체의 지양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의 산』 연구자인 크리스티안젠은 이 소설을 탈교양 소설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신봉하게 되『마의 산』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포기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추천하는 서술자의 모호함이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일반적으로 시대 소설이란 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여,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르는 소설로 간주됩니다. 『마의 산』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회의 정신적 근거로 볼 수 있는 점들은 충분히 존재하며, 토마스 만의 자기 해석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카스토르프가 애연가인 것은 북독일에 애연가가 많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애연가인 사실은 함부르크 시민의 특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시도동기적 구조에서 볼 때 비시민적 충동성, 성애, 무형식이나 죽음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흡연은 바닷가에 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탈개인적인 시공 상실의 체험이고, 쇼펜하우어적인 정지된 현재이며, 의지로서의 세계 편에 서서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서문에서 그랫듯이 시도동기적인 암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을 두 번 읽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소설의 줄거리보다 시도동기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암시를 내포합니다. 그럴 적에 사실적인 외부 묘사는 가상으로 드러나고 그 배후에 제2의 차원이 드러납니다. 심층 세계에는 알레고리 구조가 자리 잡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줄거리가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점이 토마스 만의 뛰어난 작품 기법입니다. 작품에서 카스토르프가 7년 동안 머무르는 요양원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암시, 은유, 비유, 지시, 인용을 통하여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에 걸린 산이 되기도 합니다. 또 고대 신화세계의 저승인 하데스가 되기도 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 산이 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시간을 상실하고 의무를 잊어바린 반시민적인 세계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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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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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6 6 ~ 1955 8 12)은 독일 북부의 뉘른베르크(Nürnberg) 교외 별장에서 곡물수집회사를 하는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Thomas Johann Heinrich Mann)와 독일계 브라질리안인 어머니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Júlia da Silva Bruhns) 사이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1875 6 6일 태어났습니다. 1871년생인 토마스 만의 형은 후일 급진적인 작가로 유명한 하인리히 만입니다.
1877년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는 뉘른베르크시의 평의원으로 피선되어 시의 건설위원회와 간접세 부문위원으로 일하였습니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었습니다
토마스 만이 문학 활동을 시작할 시기는 자연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비합리적 물결이 쇄도하는 세기 전환기이며, 따라서 ‘세기말의 종말 감정’과 ‘몰락감’이 당시의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데카당스’라는 말로 집약되는 토마스 만 초기의 예술적 경향에는 예외 없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토마스 만이 여섯 살되던 1881년에 아버지는 베커그루베의 땅을 구입하여 웅장한 집을 새로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세기말의 암울한 데카당스적 분위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토마스 만은 1882년에는 초등학교와 예비학교에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학창 시절에 대한 토마스 만의 추억은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14살되던 1889년에 카타리노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그는 권위적인 학교 운영자의 매너리즘을 비판했으며, 그들의 정신과 훈육, 수업 방법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토마스 만이 열여섯 살되던 1891 10 13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곡물수집회사는 청산되었습니다.
토마스 만이 열일곱 살되던 1892 마흔도 채 넘지 않은 나이였지만, 어머니는 재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돌보기로 마음먹고 당시 바이에른 주의 주도인 뮌헨으로 이사하고 토마스 만은 고교과정을 마치기 위해 혼자 뉘른베르크에 남았습니다.
17세의 토마스 만은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극성을 보여서 여러 과목 중에서 음악과 문학을 특히 좋아했고, 시대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만에게 학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마지못해 끝까지 앉아 있었지만, 저녁 시간의 대부분은 오페라 극장에서 보냈습니다. 고향도시 뉘른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에서 알게 된 리하르트 바그너 예술과의 만남은 토마스 만 인생에서 예술적 주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절에 [봄의 폭풍]이라는 교지를 창간하여 시와 비평문을 기고했습니다. 당시 그의 문학적 우상은 하인리히 하이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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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을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 ①단계로 1893년부터 1914년까지로: 예술성과 시민성의 갈등의 시기로 이시기의 대표작은 1901년에 발표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901]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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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은 19세가 되던 1894 3 그의 학창 시절은 끝납니다. 토마스 만은 카타리노임 김나지움 고등학교 때려치우고 가족이 있는 예술의 도시 뮌헨의 람베르거슈트라세의 널찍한 저택으로 이주하여 ‘죽음’의 세계라고 표현한 바 있는 ‘문학’의 세계에 마침내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그 후 형 하인리히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1년간을 제외하면 1933년까지 형 하인리히와 함께 40년 가까이 뮌헨에서 살았습니다.
토마스 만은 1901 2 13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학은 죽음’이라고 표현한 바 있고 작품 [토니오 크뢰거]에도 ‘문학은 결코 천직(天職)이 아니라 저주다’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해에 1894년에 썼던 최초의 단편 [타락] [사회]()에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해에 남독일화제보험회사의 견습사원이 되었습니다. 20세가 되던 1895,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 보험회사마저도 퇴직을 합니다.
토마스 만은 1895 7월 토마스 만은 당시 형 하인리히 만이 체류하던 이탈리아로 최초의 외국여행을 시도했고 10월에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 1895년에서 1896년까지 뮌헨 공과대학에서 미학, 예술, 문학, 경제 및 역사 강의를 청강하면서 언론인이 될 준비를 했습니다.
1896 10월 토마스 만은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는데, 우선 베니스에 들른 후 로마를 거쳐 나폴리를 여행했고 1897 형 하인리히 만이 머물던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 합류하면서 독일을 오가며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습니다.
22살이던 1897, 그 시절, 김나지움 시절부터 이미 그를 사로잡았던 슈토름, 헤르만 바르,  부르제, 헨리크 입센 등을 탐독하였고, 직접 짐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지를 편집했고 이때 첫 작품 호의, [행복에의 의지]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습니다. 토마스 만은 베를린의 피셔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첫 번째 단편소설인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보냈고 잡지사에서는 그 소설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보관하고 있는 다른 소설들 모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환멸], [어릿광대], [토비아스 민더니켈] 등의 작품을 보내 주었는데, 출판인 사무엘 피셔는 이 소설들에 무척 만족해했고 이제는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토마스 만에게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최초의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5세가 되던 1900 10월에는 지원병으로 바이에른 보병 친위 연대에 입대하지만, 2달만인 12월에 병역 부적격자로 병원에 입원하여, 이듬해인 1901년 초에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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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3 -  18931914: 예술성과 시민성의 갈등 2 –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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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때인 1901 5월에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여행했고. 영국여성 메리(Mary)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10월에는 ‘한 가문의 몰락’이라는 부제가 붙은 두 권짜리 첫 장편소설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 초판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고향인 뉘른베르크 사람들에게는 "불쾌함의 대명사"라는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 단편소설들을 모아 단편집토니오 크뢰거 1903년에 발표하였습니다. 소설 [위수부대] 1906년에 프리즈 오스왈드 빌제(Fritz Oswald Bilse) 소위를 통해, 뉘른베르크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피소되었는데 작가는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에서 그 계기 얻었다고 해서 토마스 만에게 불똥이 튀었습니다. 토마스 만은 "괴테는 [베르테르]를 쓴 뒤 로테와 그의 남편의 명예를 훼손시킨 인물의 진면목을 해명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투르게네프는 자신과 교분을 나눴던 러시아의 영주들에 관하여 주저 없는 거장의 손으로 사냥 비망록에 그대로 적음으로써 그들의 격분을 자아냈습니다."라고 자신과 빌제의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28세때인 1903년에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를 발표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역시 시민성과 예술성을 주제로 한 아이러니 수법이 특히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 단편 트리스탄을 내놨습니다.
29세인 1904 10 3일에 뮌헨 대학교 수학 교수인 알프레트 프링스하임의 딸인 카타리나(카챠라는 애칭으로 불림Katia Pringsheim) 프링스하임과 약혼하고 이듬해 1905 2 11일 결혼하여 그해 11월에 장녀 에리카 만이 출생하면서 모두 3 3녀로 1906년엔 둘째인 장남 클라우스, 1909년엔 차남 고트프리트, 1910년엔 차녀 모니카, 1918년엔 3 엘리자베트, 1919년엔 3 미카엘를 생산하였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만의 두 여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듯이, 아들 클라우스 만이 자살했고, 막내 미하엘 만도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의문사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다가 남편을 잃은 모니카 만은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34살때인 1909년에는 독일의 어느 소공국을 무대로 하는 중편소설 [대공전하(Royal Highness, Königliche Hoheit)]를 발표하여, 고독한 예술가적 존재를 사랑과 결혼에 의하여 삶의 세계와 손을 잡게 합니다. 내용은 황태자 클라우스 하인리히와 미국 부호의 딸 임마 스포엘민이 결혼하고, 집시의 예언과 고성의 유령이 등장하는 등 동화적 요소 있는 해피엔딩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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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4 - ②단계로 1914년부터 1925년까지로: 위기와 새로운 출발의 시기로 이시기의 대표작은 1924년에 발표한  [마의 산, 1924]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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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살인 1910년에는 누이 카를라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내용을 삶의 스케치에서 다음과 같이 자상하게 묘사했습니다. "어머니 집에서 독약을 복용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빗장을 걸어 잠근 방에서 목을 꾸르륵거리며 죽어가는 끔찍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쪽지에는 프랑스어로 '당신을 사랑한다. 단 한 번 바람을 피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폴링으로 급히 달려가 내 가슴속에 저미는 고통을 감추기 위해 어머니를 포옹했다.라고 
36살인 1911 5월 휴양지에서 존경해 오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접한 것을 경험으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 중 가장 긴 단편소설로서 여기서 토마스 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예술가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빌헬름 시대’ 독일의 군인정신 및 프로이센적 도덕주의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과,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사회의 분위기와 경직된 도덕규범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37살때인 1912 5월에는 아내 카차가 폐병 증세가 있어 스위스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하여 반 년 간 머물게 됩니다. 토마스 만은 아내가 떠난 5일 뒤에 그곳으로 문병을 갔는데 그만 열병에 걸려서 그곳의 의사가 장기 체류 권고했으나 3주 뒤 뮌헨으로 귀환합니다. 토마스 만은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 체류하는 손님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느낀 인상에도 매료되었는데, 이런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그 내용이 방대해져 12년 후인 1924년에야 완성된 것이 ()의 산입니다. 소설 [마의 산] 속의 한스 카스토르프도는 애초에 3주 체류 예정으로 다보스 갔으나 7년을 머물게 됩니다.
39살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창작을 중단하고, 1918년 발표한 평론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과 같은 정치 평론을 발표했습니다. 전쟁 초기 독일 문화와 독일 시민 계층의 와해를 걱정하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형 하인리히 만과 불화를 겪게 되지만, 1922년에 발표한 평론「독일 공화국」을 통해서는 민주주의와 시민 계급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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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5 -  19141925: 위기와 새로운 출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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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살때인 1915년 보수적 견해를 피력하는 에세이적 논설문 [프리드리히와 대동맹]을 발표했고, 이어 전쟁 지지에 관한 시사비평집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Reflections of an Unpolitical Man,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의 집필에 들어가 이 작업에 42살이 되던 1917년까지 꼬박 2년간 몰두했습니다. 600쪽이 넘는 대단한 분량의 저작은 1918 10월에 완성되었습니다.
프랑스적 민주주의나 문명 개념을 독일의 문화 개념과 대립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이 방대한 저작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Reflections of an Unpolitical Man,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은 토마스 만의 사상의 한 전환점이자 작가 생활의 요약인 동시에 과거와의 작별이었습니다.
이 저작이 나오기 전까지 토마스 만은 현실의 사건들과는 동떨어진 예술가였으나, 이제는 여러 면에서 그는 유명한 정치적 저널리스트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정치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했지만. 이로써 진보적 사고를 지녔던 형과 본격적으로 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43세때인 1918 11 11 독일은 항복을 했습니다. 44세때인 1919 토마스 만의 아들 클라우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뮌헨은 "반동의 고성(高城), 반민주적 흐름과 반역의 중심지이고 베를린은 "유태인 불법자들과 볼셰비즘 선동자들의 도당에 의해 통치된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47세때인 1922년에 하우프트 만 탄생 60회 기념식 연설문 [독일공화국론(The German Republic, Von deutscher Republik)]을 발표했지만, 보수 지식인과 문인, 언론은 "개떼처럼" 맹비난을 했습니다. 형 하인리히 만이 맹장염과 복막염 걸리는 바람에 그 계기로 부인 카차가 하인리히 만의 부인을 방문하고, 토마스 만도 병원에 문병을 가서 형제가 화해를 합니다.
48세때인 1923년에 토마스 만은 독일인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50세때인 1925년에는 뮌헨시청에서 시장 주도로 토마스 만 탄생 50회 기념식을 열어 슈테판 츠바이크, 하우프트 , 호프만스탈 등과 남매 가족이 모두 참석하고 형 하인리히 만이 "아우여" 라며 축사를 하여 형제간의 화해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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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6 - ③단계로 1926년부터 1942년까지로: 인간성의 이념의 시기로 이시기의 대표작은 1943년에 발표한  [요제프와 그 형제들, 1943]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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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세때인 1929년 스웨덴 한림원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 대해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이 없었으면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55살이 된 이듬해 1930년에는 연설문 [이성에 호소하다(An Appeal to Reason)]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비판한 단편 [마리오와 마술사(Mario and the Magician)] 출간했습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어느 해수욕장에서 일어난 우발적 살인사건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1930 10 17일에는 베를린의 베토벤 홀에서 민주주의 옹호 위한 [독일 연사] 강연했고, 국가사회주의운동을 결연히 탄핵했으며, 그 탈선적 야만행위와 시장터의 조야함을 비판하자 청중들이 난동을 부려, 피신해야 했습니다.
56세가 된 1931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이후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작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57세때인 1932년 괴테 서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토마스 만은 [시민시대의 대표자로서의 괴테], [작가로서의 괴테]라는 강연을 하면서 인류애의 고귀함을 역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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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7 -  19261942: 인간성의 이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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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이 58세되던 1933 1월 바그너 서거 50주년이 되던 날,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후 2 11일 국외로 강연 여행을 떠나 그대로 망명했습니다. 네델란드와 파리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 아로자 호반에 거처를 정한 후, 당분간 정치적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다른 망명 문학가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나치 정권에 대한 토마스 만의 첫 공개적 반박은 60세되던 1935 4월 니스에서 개최된 ‘지식인연합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발표한 [유럽이여, 경계하라!]였습니다. 연이어 61세되던 이듬해 1936 6월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인문학과 휴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자유의 살해자에 대한 비판과 강건한 민주주의의 필연성’, 즉 진보에 대한 능동적 옹호가 필연적인 이유를 강도 높게 피력했습니다.
63세되던 1938 2,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습니다. 64세때인 1939년에는 [바이마르의 로테(Lotte in Weimar)] 발표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토마스 만은 히틀러 타도를 위해 영국 BBC 라디오 방송에서 제안한 [독일 청취자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4 6개월 동안 매월 한 번 정도 방송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 정권의 비민주성과 비인간성을 호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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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8 - ④단계로 1943년부터 1950년까지로: 파우스트 시대의 시기로 이시기의 대표작은 1947년에 발표한  [파우스트 박사, 1947]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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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되던 1943 토마스 만의 4부작 소설 [요제프와 그 형제들 (Joseph and His Brothers, Joseph und seine Brüder, 1943)]을 발표합니다.
69세때인 1944년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되며 루스벨트는 그해 11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70세가 된 1945년과 71세인 1946년 사이에 토마스 만은 사방에서 요청해 오는 사회적 의무와 강연으로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그는 아도르노와 토론 및 논의를 계속 진행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그는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한 부분, 즉 순수 음악적인 성격의 장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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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9 -  19431950: 파우스트 시대 2 – [파우스트 박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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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72세때인 1947년 초 [파우스트 박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작곡가의 삶을 서술함과 동시에 음악적 창조의 본질을 다뤘습니다. 토마스 만은 [파우스트 박사]를 가리켜 지난한 노력과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른 가장 험난한 책이라고 했으며, 또 그가 가장 사랑한 책이었다고 했습니다.
74세때인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 강연 청탁으로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토마스 만은 현실의 공산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사회적 평등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구동독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미국의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75세때인 1950년에 동독으로 가려던 형 하인리히 만은 그해 3 12 로스앤젤리스에서 사망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미국의 매카시즘 선풍에 염증을 느끼고 "미국은 세계를 선도 한다기보다 세계를 사들이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폭력과 사상의 염탐, 정치적 심문, 불확실해지는 공정성 등과 같은 초기 징후들이 눈에 띄게 감지되고 있으며, 그것은 위기라 칭할만한 상황으로 발전되고 있습니다.“라고 한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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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10 - ⑤단계로 1951년부터 1955년까지로: 에로틱과 예술의 사회적 의무의 시기로 이시기의 대표작은 1954년에 발표한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의 제1, 1954]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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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때인 1951 1, 토마스 만에게 공산주의를 비호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한스 카로사에게 편지에서 "나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 메마른 땅에서 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미국의 메카시 열풍에 실망을 표현합니다. 이해에 [선택된 인간,1951]을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착한 죄인’ 설화의 아이러니적 해석이자 중세에 성립된 오이디푸스 동기의 기독교적 판본의 패러디,  중세문학의 패러디입니다. 토마스 만은 “모든 의미에서 이 [선택된 인간]이 나의 후기 작품”이라고 칭했습니다. [선택된 인간] 발표 직후 그는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디베켄니스데스 혹스다프렉스 펠릭스 크롤Die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을 다시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몇 가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1910년부터 쓰기 시작한 집필 기간이 무려 50년이라는 점과 자서전적인 고백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토마스 만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토마스 만의 다른 모든 작품이 주도면밀한 가공에 따라 완결되어 출간된 데 반해, 이 작품은 세 번이나 미완의 단편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1922 [어린 시절의 책], 두 번째는 1937년 암스테르담에서 펴낸 확대판, 세 번째는 1954 [회상의 제 1]가 그것입니다.
메카시 광풍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 만은 77세때인 1952 7 10 프랑스 선박 ' 그라스호를 타고 미국을 떠나 프랑스의 르아브르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습니다.
78세때인 1953년에는 「배신자(디벧토게넨Die Betrogene, 1953)」을 출간했습니다.
81세때인 1955년 동독 및 서독에서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강연을 하고,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Nürnberg)의 명예시민이 되어 스위스로 돌아왔지만, 혈전증 진단을 받아 1955 8 11일 갑자기 졸도하여, 12 아침에 극심한 허탈 상태를 유지하다. 오후 4시 경 호흡장애를 일으켜, 2시간 뒤 오후 6시에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잠 들기 전에 의사와 프랑스어와 영어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안경을 달라고 해서 그걸 걸친 뒤 잠들어, 2시간 뒤 밤 8시에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도 토마스 만이 80 2개월의 삶을 종료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토마스 만은 취리히 근교 킬히베르크 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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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의 삶 11 -  19511955: 에로틱과 예술의 사회적 의무 2 –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의 제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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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토마스 만의 작품 세계를 그의 삶의 행적을 따라 추적해 보았습니다. 작품의 수가 워낙 많아서 나름대로 꼭 필요한 작품들만 선별했지만, 그것의 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무튼 토마스 만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삶과 정신, 생과 예술의 갈등’은 ‘삶에 대한 친근함과 휴머니즘’으로, 나아가 ‘예술의 사회적 의무’로 승화됩니다.
토마스 만은 독일 문화에 깊숙이 뿌리박은 가장 독일적인 작가이면서도 미국으로 망명했고, 전후 메카시의 빨갱이 프레임에 고통받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분단된 독일의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고 스위스에 안식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국외 망명을 두고 독일을 배반했다고 보는 시각은 커다란 잘못입니다. 괴테처럼 세계주의를 표방한 그는 실러 서거 150주년 강연에서 세계의 평화와 독일의 통일을 진심으로 염원했고, 그것이 생의 마지막 강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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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 작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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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고전주의의 괴테에 비견되는 20세기 독일문학의 대표주자인 토마스 만을 유명한 문예이론가 루카치는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았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인생에 대한 단면적인 묘사가 아닌 세계와 인생의 총체성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작품은 간결한 문장으로 끝나는 법이 좀체 없으며, 글 자체가 건조체이고 만연체인데다가 내용 또한 언제나 이중적 의미를 띱니다. 어렵다 하더라도 재미라도 있으면 많은 독자층을 보유하겠지만, 아쉽게도 그것 또한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의 글에 보이는 해박한 지식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기가 눌려 주눅이 들고 맙니다.
‘시민성’과 ‘예술성’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이원성의 원천은 부모에게 물려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안고 태어났던 것입니다.
청년 시절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토마스 만 스스로도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정신적·예술적인 교양의 기초를 자문할 때, 내가 거명하지 않을 수 없는 세 이름,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독일의 하늘에 나타난, 영원히 결합된 정신의 3연성(連星)- 단지 친밀한 독일적 사건이 아니라 유럽적 사건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인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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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토마스 만(Thomas Mann) 작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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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토마스 만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890년대 중엽에 자연주의는 이미 위기에 빠졌고, 반합리주의적 문예사조인 신낭만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문화사 및 문학사적 견지에서 볼 때, 토마스 만은 19세기의 전통적 문화 체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혁신을 지향하는 20세기 문화의 발판인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본질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생과 예술의 갈등이며 이원성의 문제입니다. 다만 삶과 정신, 자연과 정신, 관능과 지성, 개체성과 일반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원성의 갈등과 그 극복 방식이 토마스 만의 전 작품에서 상이하게 나타날 뿐입니다. 또한 토마스 만은 열세 권의 전집이 말해 주듯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추적해 그의 전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토마스 만 연구자들은 그의 창작 시기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단계:
① 초창기 작품 시기: 갈등의 고뇌(토니오 크뢰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② 조화·모색 시기: 적극적인 생의 긍정(마의 산, 마리오와 마술사)
③ 성숙의 노년기: 신화와 전설 세계로의 몰두(요제프와 그 형제들, 파우스트 박사).
또는 앞서 그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다섯 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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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데 살버백Der Zauberberg; Magic Mountain)의 등장인물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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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카스토르프(Hans Castorp) 함부르크 명문 집안 출신인 23세의 평범한 청년 조선기사입니다.
사촌 형 요하임 침센 (Joachim Ziemssen) 사관생도로 Davos(베르크호프 폐결핵 요양소)에서 요양중입니다.
베렌스(Hofrat Behrens) 요양원장으로 그림에 조예가 깊습니다.
클라브디아 쇼샤(Clavdia Chauchat) 병을 앓는 여자에 대한 미묘한 관계에서 생기는 흥분, 긴장, 만족, 실망.”이 작용하는 러시아계 부인입니다. 이국적이고 개성적으로 청년에게 연구욕을 불러일으키는 얼굴.” “두드러지게 높은 광대뼈”, “입술이 어느 정도 뒤집혀진 듯한 풍만한 모양이며, 먼 산맥의 잿빛을 띤 푸른 빛, 또는 푸른빛을 띤 잿빛을 하고 무엇을 보는 것도 아니며 곁눈질할 때, 가끔 녹는 듯이 희미한 검은 빛으로 완전히 흐려지는 눈을 가졌습니다. 7개월쯤에서 친숙해진 카스토르프는 이렇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 사랑이란……육체, 사랑, 죽음 이 셋은 원래 하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병과 쾌락이며, 육체야말로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죠(중략)……, 멋진 유기미, 화구나 돌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부패성의 살아 있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생명과 부패의 열성의 비밀에 찬 유기미, 인체라는 건축의 멋진 균형을 보시지요. 양쪽 어깨와 허리, 가슴 좌우의 꽃과 같은 젖꼭지, 그리고 두 개씩 나란히 있는 늑골, 부드러운 복부의 중앙에 있는 배꼽과 다리 사이에 검은 보고 등의 비단과 같은 피부 밑에서 견압골이 움직이는 모양, 등골이 싱싱하고 풍만한 두 궁둥이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 모양, 맥관과 신경이 굵은 가지가 몸 기둥에서 겨드랑이를 통해 사지로 달리고 있는 모양, 두 팔의 구성이 두 다리의 구성에 대응하고 있는 모양을 보시지요. , 팔꿈치와 무릎 관절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과 살의 쿠션에 쌓인 그 부분의 많은 유기적 비밀! 인체의 이 감미로운 부분을 애무하는 것은 얼마만한 제전이겠어요. 죽어도 한이 없는 환희! , 정교한 관절 주머니가 지방을 분비하고 있는 당신의 무릎의 피부 냄새를 나에게 맡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넓적다리의 전면에서 율동하고, 훨씬 아래에서 경골(脛骨)의 두 개의 동맥에 갈라져 있는 대퇴부 동맥에 나의 입술을 경건하게 닿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털구멍의 발산물을 냄새 맡고 당신의 부드러운 털을 애무하게 해주십시오. 물과 단백질로 이루어지고 묘형의 분해를 경험하는 운명을 가진 인간상이여,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댄 채로 나를 영원히 죽게 해주십시오!" 쇼샤는 느닷없이 떠나서 바쿠, 독일 온천장, 스페인 등지를 돌다가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페페르코른이란 남자와 함께 불쑥 나타났으나, 그는 자살하고 쇼샤는 다시 떠나고 맙니다. 병이 쾌유되지도 않은 채 카스트로프도 1차 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자원한다.
세템브리니(Lodovico Settembrini, a student of Giosuè Carducci) 이태리인입니다.
나프타(Leo Naphta) 유태계 폴랜드인으로 허무주의적 반 자본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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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데 살버백Der Zauberberg; Magic Mountain)의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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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山은 전체적으로 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권까지가 1부이며 제6권과 제7권이 2부를 구성합니다.
1부는 비시민적 세계를 대표하는 쇼샤부인과 인문주의자 세렘브리니의 대립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쇼샤부인은 잠시 요양원을 떠납니다.
2부의 전반부에서는 새로이 등장한 예수회원 나프타와 세렘브리니의 대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부의 중반부에서는 나프타와 세렘브리니의 결론 없는 논쟁과 제1부 마지막에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부인과 함께 새로이 등장한 페페르코른이라는 인물이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토마스 만은 등장인물의 비밀을 바로 말하지 않고 외모를 자세히 묘사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합니다.
한 인물을 묘사할 때 그 인물과 대립되는 또 다른 인물, 세템브리나와 나프타, 쇼샤부인과 페페르코튼, 세템브리나와 쇼샤부인을 등장시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를 교양화 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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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Der Zauberberg; Magic Mountain)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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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은1912년에 아내가 가벼운 폐렴 증상으로 스위스의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하자 그녀를 찾아가 3주 가량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요양원 의사가 그에게도 폐렴 증세가 있으니 그곳에 입원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카스토르프와 달리 하산하여, 1912년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대응하는 작품으로 명랑하고 아이러니컬한 비극 다음에 등장하는 익살스러운 극인 사티로스극을 계획하여 단편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방대해져서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토마스 만 문학의 절정을 이루는 바로 이마의 산입니다. 마의 산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일년 전인 1913 7월에 처음 시작되어 1915 8월에 집필이 중단되었습니다. 그사이 토마스 만은 전쟁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인 견해를 담은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에 이미 쓴 것까지 고쳐서 1921 5월에 절반가량을 썼습니다. 1923년 초에 유명한 '눈의 장()'을 썼으며 1923년 말에 '페퍼코른' 장을 쓰고 1924 9 27일에야 집필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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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줄거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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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스위스 고산 지대인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 '베르크호프'입니다.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전공하고 이제 막 조선 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곳에 도착합니다. 환자로 입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입원해 있는 사촌을 문병하기 위해 3주 예정으로 온 것입니다. 사촌 요하임 침센은 사관후보생이었으나 폐병이 들어 다보스 요양원에서 요양 중입니다. 이곳에 도착한 카스토르프는 자기도 폐결핵의 징후가 있어 침센과 같이 요양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점차 고원 지대에 있는 요양원의 마적(魔的)인 분위기에 휩쓸려 죽음과 병에 대한 어떤 친근감을 갖게 되고, 그곳에 요양중인 러시아 출신의 클라브디아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7년간 요양원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을 고향 다게스탄에 남겨 두고 유럽 각지의 요양원과 온천장을 전전하는 방종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지만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 입원해 있었던 이탈리아 출신 인민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카스토르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저 아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쇼샤 부인에게 빠져 있는 카스토르프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7개월 후 사육제 날 저녁에 카스토르프는 쇼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날밤 그녀에게 연필을 돌려주러 가서 사랑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산을 내려가 버립니다. 그러다가 카스토르프는 유대인 나프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예리한 정치 이론을 펼치며 독재를 찬양하고 테러를 긍정하며, 반개인적인 전제 정치를 옹호하고 공산주의적 이상향의 도래를 확신하는 예수회 회원입니다. 그래서 개성을 존중하는 진보주의자 세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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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 줄거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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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임 침세는 호전되지 않는 병세에 지친 나머지 하산하여 군무에 종사합니다. 사촌을 떠나 보내고 혼자 요양원에 남은 카스토르프는 스키를 배웁니다. 어느 날 그는 스키를 타고 산으로 갔다가 눈보라 때문에 오두막에 갇혀 꿈을 꾸는 중에, 지금까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착하고 올라르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감에서 벗어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후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 부인이 은퇴한 커피 왕 페퍼코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납니다. 카스토르프는 이 현세적인 생의 거인에게서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개념적이 아니고 감각적이며 현실적인 삶을 중시하는, 힘을 부르짖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도 생애 패하여 자살을 하고, 쇼샤는 다시 하산합니다. 쇼샤가 떠난 후 카스토르프는 허탈 상태에 빠집니다. 요양원에는 히스테리 환자가 속출합니다. 세템브리나와 자유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파렴치하다'고 모욕을 당한 나프타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장에서 세템브리나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자 나프타는 비겁자라고 흥분하며 자기 머리를 권총으로 쏘아 버립니다. 이와 같이 카스토르프는 7년 동안 산지에서 온갖 체험을 하며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카스토르프는 마의 산을 내려와 전쟁에 참가해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 노래를 중얼거리며 혼란 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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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 교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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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정치 및 사회 의식의 대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에, 토마스 만이 작가로서 그의 정신적 삶의 궤적을 기록한 '교양 소설'이자 '입문 소설'이며 '성년식 소설'이다. 성배를 찾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의식화를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이 이념의 각축장을 벌이는 이 작품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주인공 카스토르프와 그의 교육자인 세템브리나이다.

이 소설의 중심 모타프는 삶과 죽음, 정신과 감성의 문제이다. 즉 평범한 한 청년이 죽음에 애착을 느꼈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정신적인 변화를 그린 것이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하노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아센바흐가 그랬듯이 죽음에 친근감을 느꼈던 토마스 만의 주인공이 여기서는 그것을 탈피하고 삶의 세계로 발을 내디게 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죽음의 애착에서 조화로운 삶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교양 소설이다. 카스토르프는 인간은 형식, 논리, 건강, 시간 등으로 대표되는 생에만 몰두해서는 안되고, 자유, 위험, 병원 등으로 대표되는 죽음에 빠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마스 만의 죽음에 대한 애착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이고, 죽음의 극복은 니체에 대한 긍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유럽 문명 세계의 정신이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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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문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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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20세기 최고의 고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토마스 만의 문제작입니다. 마의 산은 흔히 시대 소설, 교양 소설, 철학 소설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딱히 어느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마의 산을 시대 소설로 파악하여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토마스 만이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회를 비판하고 특히 세템브리니를 통해 계몽주의를 주창한다고 합니다.
마의 산을 교양 소설로 보는 연구자들은 1950, 60년대에 행해진 탈정치적인 형식 분석을 근거로 작품의 시도 동기, 서술 태도, 인용의 해석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마의 산을 철학 소설로 보는 사람들은 시대 소설이나 교양 소설과는 무관한 쇼펜하우어적인 철학 소설로 보고 작품의 구조가 하강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주인공이 결국 시민 사회에 편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온갖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합니다. 처음에는 시민적 정체성이 존재하지만 마지막에는 전쟁에서 정체의 지양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의 산 연구자인 크리스티안젠은 이 소설을 탈교양 소설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신봉하게 되마의 산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포기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추천하는 서술자의 모호함이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일반적으로 시대 소설이란 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여,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르는 소설로 간주됩니다. 마의 산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회의 정신적 근거로 볼 수 있는 점들은 충분히 존재하며, 토마스 만의 자기 해석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카스토르프가 애연가인 것은 북독일에 애연가가 많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애연가인 사실은 함부르크 시민의 특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시도동기적 구조에서 볼 때 비시민적 충동성, 성애, 무형식이나 죽음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흡연은 바닷가에 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탈개인적인 시공 상실의 체험이고, 쇼펜하우어적인 정지된 현재이며, 의지로서의 세계 편에 서서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서문에서 그랫듯이 시도동기적인 암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을 두 번 읽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소설의 줄거리보다 시도동기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암시를 내포합니다. 그럴 적에 사실적인 외부 묘사는 가상으로 드러나고 그 배후에 제2의 차원이 드러납니다. 심층 세계에는 알레고리 구조가 자리 잡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줄거리가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점이 토마스 만의 뛰어난 작품 기법입니다.
작품에서 카스토르프가 7년 동안 머무르는 요양원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암시, 은유, 비유, 지시, 인용을 통하여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에 걸린 산이 되기도 합니다. 또 고대 신화세계의 저승인 하데스가 되기도 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 산이 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시간을 상실하고 의무를 잊어바린 반시민적인 세계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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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상징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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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호프 요양원이라는 무대는 지리적으로 고산 지대일 뿐만 아니라 밀폐되고 외부와 차단된 세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무미건조하고 사회적인 평지와 반대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양원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에 나오는 지옥 같은 천국인 비너스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은 육욕과 방종한 생활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시간은 세상 시간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방문자는 그곳에서 단 몇 시간밖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7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도 원래 베르크호프 요양원에 3주간 머무려고 했다가 결국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요양원의 주민들은 삶에서 이탈한 신비한 분위기에서 살아갑니다. 특히 동화와 전설에 대한 인용이 두드러집니다. 베렌스 고문관이 염라대왕인 라다만토스로 군림하는 진료실과 특히 뢴트겐실은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로 비유되는 반면, 카스토르프는 처음에 오디세우스라는 임시 방문객으로 격하됩니다. 베렌스 고문관은 두 사촌을 제우스 쌍동이 아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에 비유하고, 세템브리니는 자신을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합니다. 또한 아둔한 슈퇴어 부인은 시시포스와 탄탈로스 이야기를 꺼내며 이를 요양원 생활에 비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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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상징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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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푸짐한 식사는 '티슈라인-데크-디히(Tischlein-deck-dich)'로 주문을 외우면 음식이 차려진다는 그림 동화의 마술 식탁에 비유됩니다. 엥겔하르트 양이 쇼샤 부인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여러성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행운아 한스와 마찬가지로 카스토르프는 7년간 쌓은 다양한 교양에도 아무 보람 없이 전쟁에 나가 무의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기독교도의 박해 때 동굴에 갇혀 200년 동안 잠자다가 깨어난 일곱 순교자의 모티브도 들어 있습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수간호사한테 온도계를 사는 장면은 입문 의식이 되어, 그는 어엿한 베르크호프 주민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아드리아티카  밀렌동크라는 수간호사 이름에도 중세적인 분위기가 납니다.

게다가 신화적인 숫자 7이 일관된 흐름으로 소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선 마의 산은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체온계를 입에 무는 시간도 7분이며, 카스토르프는 일곱 개의 식탁에 일년 꼴로 앉아 보며 7년간 머무릅니다. 요양원에 온 지 3주째가 되어서야 마리아 만치니의 맛이 제대로 나기 시작하고, 제 맛이 나기까지는 65일에서 70일이 걸립니다. 그리고 밀폐된 양철통에서 만치니는 7일 만에 죽으며, 브레멘에서 가져오게 한 만치니의 수도 700개입니다. 7개월이 지나 소설의 정점인 「발푸르기스의 밤」장면이 나오고 소설의 절반인 (상권)이 끝납니다. 두 사촌의 이름도 일곱 개의 알파벳으로 되어 있고, 카스토르프 방 번호도 3호실입니다. 세템브리니라는 이름은 7이라는 수를 의미하며, 페퍼코른이 자살을 생각할 때 일곱 명이 함께합니다. 이처럼 마의 산에서는 완성을 의미하는 7이라는 숫자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상징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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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토르프는 다보스 요양원에서 세템브리니, 나프타, 페퍼코른, 이 세 명의 교육자를 만납니다. 세템브리니는 문명 문사를, 나프타는 무신론적 혁명주의자를, 페퍼코른은 힘에 대한 의지를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세템브리니는 처음부터 카스토르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그의 방에 들어오면서 전등을 켜는 행위로 계몽주의를 설파합니다. 그는 요양원의 의사들을 미노스와 라다만토스로 지칭함으로써 요양원은 하데스가 되고 의사들은 저승의 심판관이 됩니다. 그리하여 카스토르프는 저승 세계에 온 오디세우스가 되어, 결국 발푸르기스의 밤에 환자들은 눈을 가리고 돼지 그림을 그리며 꿀꿀 거립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일과 자본주의 세계를 옹호하는 세템브리니의 견해들은 처음부터 신용을 잃고 말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도 우스꽝스럽게 묘사됩니다. 생각과 사상이 육체적으로 희화화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은 환멸만 안겨 줍니다. 소설 상권의 마지막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이후부터는 쇼사 부인이 소설의 무대를 지배합니다. 세템브리니가 지적하는 신화적 알레고리에 의해 카스토르프는 파우스트가 되고, 쇼샤는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트가 되며, 세템브리니는 계몽주의자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습니다.

魔의  (Magic Mountain, 1924)의 상징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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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타는 시도동기적 구조에서 볼 때 세템브리니의 반대편에 위치합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인 그는 무위와 정관을 옹호함으로써 아시아적 영역과 연결되고, 스페인의 로욜라가 창시한 예수회회원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과잉 형식의 나라인 스페인과 연결됩니다. 헝가리 출신의 문예평론가 죄르지 루카치의 외모를 닮은 그에게는 보수적인 혁명의 여러 모순들이 형성화되어 있고, 그 속에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견해도 들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시민적 자본주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테러와 규율 그리고 철저한 복종을 뜻하는 공산주의가 혼재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그는 예수회 교단의 지원으로 비단 카펫이 깔린 방에서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의 견해는 존재에 의해 굳건히 떠받쳐지지 않고, 그는 이론으로만 실천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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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코른은 달변가가 아니고 말을 더듬습니다. 하지만 페퍼코른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인상을 줄 뿐입니다. 소설에서 그는 두 교육자를 왜소하게 만들고, 쇼샤의 방종한 위험성을 중화시키며, 카스토르프의 독자성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자살함으로써 그의 주장은 우스꽝스럽게 됩니다. 그의 성격과 사고의 정신사적 배경은 생의 철학입니다. 그는 생, 축제, 도취, 신화 같은 원초적 자연을 사랑하며 자신을 독수리와 같다고 여깁니다. 니체처럼 자신을 디오니소스 및 그리스도와 비교하는 그는 열두 명의 요양원 손님들과 마지막 만찬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생과 고통의 알레고리이며, 확신이 있는 주지주의에 반대하는 복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삶의 철학 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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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여섯번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심판(Der Prozess, The Trial, 1925)편에서 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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