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첸쉐싼(錢學森전학삼)[중국근현대인물]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2. 29. 15:57
반응형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첸쉐싼(錢學森전학삼)[중국근현대인물]
1. 첸쉐싼에 영향 준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
 
첸쥔푸와 첸쉐썬 부자. 중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군사 과학자 첸쉐썬의 인생 중 첫 번째 모습이기도하다. 1913년 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문혁이 한창이던 1970년 4월 중국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쏴 올렸다. 발사 하루 전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해산 무렵 첸쉐싼(錢學森·전학삼)을 불렀다. 부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제발 과로하지 마라.”
2009년 10월 31일 첸쉐싼이 세상을 떠났다.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미사일과 로켓의 왕(王)이 눈을 감았다”며 중국 천지가 발칵 뒤집혔다. 한 신문이 첸쉐싼이 자주 하던 말을 소개했다. “일생을 통해 두 분에게 많은 영향과 도움을 받았다. 개국총리 저우언라이와 장인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의 보살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 관한 얘기는 남들이 대신 해줬다. “첸쉐싼의 첫 번째 스승은 부친이었다. 박학다재하고 겸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애국자였다. 자손들에게는 집안 전통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루쉰(魯迅·노신)도 첸쥔푸 앞에서는 말을 가렸다.”
첸쥔푸는 항저우(杭州)의 몰락한 비단장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생존시에는 집안이 살 만했다. 그 덕에 유년시절 좋은 교육을 받았다. 저장(浙江)대학의 전신인 명문 구시서원(求是書院) 시절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했다. 거상(巨商) 장(章)씨가 딸 란젠(蘭娟·난연)의 남편감으로 눈독을 들였다. 첸쥔푸도 장씨를 잘 따랐다
어머니 영향 받아 지식욕 남달라]장란젠은 매사에 열정이 넘쳤다. 계산능력과 기억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상상력도 풍부했다. 첸쉐싼의 회상을 소개한다. “엄마 유전자 물려받았다는 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엄마는 감정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순박하고 선량했다. 내 손 잡고 베이징 거리 나갈 때마다 걸인들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학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림도 잘 그렸다
장란젠은 아들의 유년교육을 전담했다. 요구가 추상 같았다. “동틀 무렵,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신체를 단련해라. 조반 후, 당시(唐詩)를 큰소리로 암송해라. 피곤하면 동화책을 읽어도 좋다.” 오후에는 그림과 붓글씨 교육을 거르지 않았다. 해를 거듭 할수록 첸쉐싼의 지식욕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동화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에 더 흥미를 느꼈다. 두툼한 책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가 물어보곤 
첸쥔푸도 첸쉐싼에게 고전과 역사공부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다. ”중국 고전을 섭렵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민족의 특성과 인생관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조국의 역사를 제대로 정독하지 않은 사람에게 애국을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장바이리는 바오딩(保定)군관학교 교장과 육군대학 총장 대리(총장은 장제스)를 역임하며 수많은 지휘관을 양성했다. 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바이리. [사진 김명호 제공
[장바이리, 열세살 때 향시 1등 합격]
​첸쥔푸는 서원 동기 장바이리와 함께 일본유학을 떠났다. 장바이리의 조부는 대장서가였다. 일찍 분가했던 아버지는 장바이리가 열세살 때 세상을 떠났다. 책 외에는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숙부는 부자였다. 선생을 초빙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장바이리는 눈만 뜨면 숙부 집으로 달려가 사촌들 공부방을 귀동냥했다. 하루는 선생이 장바이리의 모친을 찾아왔다. “네 아들은 대가의 자질을 타고났다.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싶다. 학비는 필요 없다.” 장바이리는 선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열여섯 살 때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했다.
지방 관리들이 장바이리의 재능을 인정했다. 친구가 설립한 구시서원을 소개했다. “너 같은 수재를 안 것만도 영광이다. 학비 걱정 말고 계속 공부해라.” 장바이리와 첸쥔푸는 학생 중 발군이었다
관리들의 애정은 끝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장바이리는 큰일을 할 인재다. 일본유학을 보내고 싶다. 국가를 위해, 유학 경비를 우리가 출자하자.
장바이리는 “군사학을 공부하겠다”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 한 번도 1등을 내주지 않았다. 졸업식 날 생도 대표로 천황이 주는 칼을 받았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첸쥔푸도 도쿄고등사범(東京高等師範)에 무난히 합격했다
[동방 제1의 군사가 소리 들은 장바이리]당시 일본에는 3000여 명의 중국유학생이 있었다. 장바이리는 중국학생회를 이끌며 동향출신으로 구성된 저장동향회(浙江同鄕會)도 탈 없이 꾸려나갔다. 문호(文豪) 루쉰의 첫 번째 글 ‘스파르타의 혼’이 실린 종합성 잡지 저장차오((浙江潮)의 발행인도 장바이리였다.
장바이리는 일본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우리가 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은 장비 싸움이다. 명색이 장군이라는 사람들이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전쟁 준비에 소홀했다.”
장바이리는 생전에 “동방 제1의 군사가(軍事家)” 소리를 들었지만, 단순한 군사가에 그치지 않았다. 국제무대에서는 무솔리니를 설득했고, 학계에서는 『서구 문예사상사』를 저술한 서구미술 연구의 권위자로 통했다.
장바이리는 첸쥔푸만 만나면 하는 말이 있었다. “네 부인은 중국에서 가장 총명한 여인이다. 아들이 태어나면 내 딸과 결혼시키자.” 이런 장바이리였지만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딸 장잉(蔣英·장영)과 천쉐싼의 결혼은 보지 못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중앙Sunday
 
2. “조직·지휘력 탁월” 힌덴부르크 칭찬 받은 장바이리
1 장바이리는 독일과 인연이 많았다. 1936년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미국에 있는 첸쉐썬을 만나러 가던 도중, 베를린에서 갓 태어난 호랑이 4마리를 안고 흔적을 남겼다. 오른쪽 첫번째가 셋째 딸 장잉(蔣英). 10년 후 첸쉐썬과 결혼했다
한동안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는 국민당 육군 상장,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설계자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장인,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김용)의 외삼촌 등으로 통했다.
 
장바이리는 타고난 군사가였다. 한 유명 언론인의 평가를 소개한다
 
“장바이리는 중국 역사에 남을 병학가(兵學家)였다. 전쟁을 지휘한 적은 없지만, 문하에서 수많은 장군들을 배출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군이었다. 군사학에 관한 저작은 많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 한마디가 경전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타고난 문인이기도 했다.
 
“병법의 대가 손자(孫子)이래, 중국의 저명한 군인들은 문인 기질이 넘쳤다. 장바이리는 어릴 때부터 고전을 끼고 살았다. 커가며 외국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법, 문학, 미술, 외교에 관한 식견이 당대의 고수였다. 군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바이리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 생도시절, 군국 민주주의(軍國民主主義)를 제창한 적이 있었다.
 
“전 국민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상무정신으로 가득한 신식 군대를 만들어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대항하기를 희망한다.”
 
동기생 차이어(蔡鍔·채악)는 장바이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스승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가 일본에 오자 장바이리를 소개했다. 장바이리도 량치차오를 스승으로 모셨다. 온갖 예의를 다했다. 정치적 견해는 달랐다.
 
 
량치차오가 “중국이 부진한 것은 국민의 공공도덕과 지혜의 결핍 때문”이라고 하자 대놓고 비판했다. 차이어가 말려도 “사사로운 정은 사적인 일”이라며 발끈했다.
 
“중국은 망했다. 그 죄는 지도자의 무지와 무능이 빚어낸 어설픈 독단과, 그것을 알면서도 못 본체 한 정부 탓이다. 국민은 이들을 질책 못한 죄밖에 없다. 누구의 죄가 더 큰지 생각해 봐라.”
 
 
장바이리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무렵,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 군부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중국 유학생이 수석으로 졸업하자 난감했다. 4기부터 중국생도 반을 따로 만들었다. 장바이리는 3기였다.
 
귀국한 장바이리에게 동북의 지배자 ‘성경(盛京·지금의 선양)장군’이 손을 내밀었다. 신군(新軍) 훈련을 맡기며 청 황실에 동의를 구했다. “찾아보기 힘든 인재 입니다. 크게 쓸 만 합니다.” 1906년 봄, 장바이리 25세 때였다.
 
 
동북은 신군과 구군(舊軍)의 충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장바이리도 속수무책이었다. 보다 못한 성경장군이 장바이리를 불러 뭉칫돈을 쥐어줬다. “독일에 가라. 군사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며 실컷 놀아라.”
 
4년에 걸친 장바이리의 독일 생활은 다채로웠다. 독일어로 된 서구의 역사와 문학, 예술 관련 저작물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느끼는 바가 많았다.
 
 
친구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게 “국가의 부흥에 문예(文藝)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너나 나나, 자식이 태어나면 문학과 예술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춤도 열심히 배웠다. 베를린에서 열린 무도대회에서 멋진 율동을 선보였다. 왈츠 부분 1등상을 받았다.
 
독일군 연합훈련에도 참가했다. 훗날 독일 대통령이 된, 힌덴부르크 원수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조직과 지휘력이 탁월하다. 예전에 나폴레옹은 장차 동방에 위대한 장군 재목이 출현할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어깨가 무겁다.” 독일 생활을 마친 장바이리는 다시 동북신군 훈련에 전념했다. 일본과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국방기지 건설에 밤잠을 설쳤다.
 
 
 
2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첸쉐썬. 1921년 겨울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1911년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장바이리는 동북 독립을 책동했다. 성경장군은 안절부절, 구군을 이끌고 입성한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신군을 감시해도 관망만 했다. 장바이리는 동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고향으로 향하던 중 첸쥔푸가 득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가 태어났다”며 즐거워했다.
 
베이징의 교육부에 근무하던 루쉰(魯迅·노신)이 항저우의 중학 교장 첸쥔푸를 상급자에게 추천했다. 아버지 따라 베이징에 온 첸쉐썬은 여자 사범대학 부속 소학교에 입학했다.
 
 
첸쉐썬은 무슨 과목이건 1등만 했다. 교사 한 명이 “이 애는 공부의 신”이라며 ‘학신(學神)’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별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첸쉐썬은 무슨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첸쥔푸는 뒤로 빠졌다. “내게는 제일 마지막에 와라. 모두의 의견부터 들어봐라.” 수학 선생은 수학과를 권했다. “너는 수학의 천재다.” 국어 교사는 중문과를 가라고 했다. “네 문장을 읽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장차 작가가 되라.” 예술을 택하라는 교사도 있었다.
 
 
“너는 예술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회화나 음악을 전공해라. 화가나 작곡가가 네 체질에 맞다.” 모친도 의견을 내놨다. “아버지처럼 교육학을 해라. 난세에는 학교 선생이 제일이다.”
 
 
 
첸쉐썬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끝으로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다. 첸쥔푸는 엉뚱한 충고를 했다. “장바이리 장군을 찾아가라. 너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중앙Sunday
 
 
 
 
 
3. 군관학교 교장 된 장바이리 “임기응변 능력 키워라”
1 장바이리 덕에 첸쉐썬(앞줄 왼쪽 첫번째)은 어릴때 부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대학시절에는 밴드부 활동을 열심히했다. 1929년 가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 시절의 천쉐썬.
원래는 중국 군사과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얘기를 쓰려고 했다. 하다 보니 장바이리(蔣百理·장백리)를 빼놓을 수 없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1901년 말, 북양대신(北洋大臣)과 직례총독(直隷總督)을 겸하던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세상을 떠났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뒤를 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손으로 훈련시킨 북양신군을 이끌고 바오딩(保定)에 터를 잡았다.
 
 
이듬해 5월, 조정에 군사학당 설립을 건의했다. 육군속성학당(바오딩 육군 군관학교 전신)이 문을 열었다. 혁명을 하겠다며 가출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속성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학당에는 외국인 교관이 많았다. 에피소드 한편을 소개한다. 하루는 세균학을 전공한 일본인 교관이 진흙을 한줌 쥐고 사고를 쳤다. “이 안에 세균 4억 마리가 우글거린다. 중국 인구와 똑같다.” 학생 한 명이 교단으로 돌진했다.
 
 
교관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리고 진흙을 나꿔챘다. 진흙을 8등분해 교관의 면상에 문질러댔다.
 
“너희 나라 인구가 5000만 명이라고 들었다. 이 안에 5000만 마리의 세균이 있다.” 당황한 교관은 정신을 추스르자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냐? 혁명당원이냐?” 학생은 주저하지 않았다. “저장(浙江) 출신 장제스다. 내가 혁명당인지 아닌지는 알 것 없다.”
 
 
교관에게 항의한 학생은 무조건 퇴학이었다. 일본인 교관은 교장에게 학칙대로 할 것을 요구했다. 교장 자오리타이(趙理泰·조리태)는 장제스를 불렀다. 한차례 훈화를 마친 후 목소리를 낮췄다. “교관의 비유가 심했지만, 너도 잘한 건 없다. 교칙대로라면 너는 퇴교대상이다. 내가 방법을 일러주마. 일본 갈 준비를 해라. 일본어 반 학생이 아니면 일본 유학시험 응시가 불가능하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보마.” 장제스는 자오리타이의 융통성 덕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2 장바이리 부부와 딸들. 오른쪽 첫번째가 훗날 천쉐썬의 부인이 된 장잉(蔣英). [사진 김명호 제공
1912년 중화민국 총통에 즉위한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를 육군총장에 임명했다. 돤치루이는 육군 속성학당을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육군대학으로 개명한 후, 속성학당 터에 바오딩 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에 자오리타이를 임명했다.
 
 
 
자오리타이는 전형적인 옛날 군인이었다. 고집이 어찌나 센지 타협을 할 줄 몰랐다. 대신 호감 가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지독한 아편 중독자였고, 여자도 유난히 밝혔다. 집무실, 빈 교실, 갈대밭 등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소문이 자자했지만 끄떡도 안했다. “여자가 남자 밝히는 것보다는 낫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런 자오리타이를 좋아했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은 없다. 아편 중독 외에는 나와 성격이 맞는다.”
 
 
 
남방의 혁명정부 학생군이 “군사학을 배우겠다”며 바오딩 군관학교로 몰려왔다. 자오리타이는 혁명군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입학을 거부했다. 교내에 혁명세력이 침투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학교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나 돤치루이의 생각도 자오리타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군관 학교에 자금 지원을 끊어버렸다. 교관들도 봉급 날 빈손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모든 원인을 교장 자오리타이에게 돌렸다.
 
 
연일 교내에서 규탄 시위가 벌어지자 자오리타이는 “군관학교건 뭐건 폐교해 버리겠다”고 응수했다. 자오리타이는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베이징에 있는 육군부로 몰려갔다.
 
 
 
학생들의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안스카이가 직접 나섰다. 자오리타이를 해임하고 후임 교장을 물색했다. 시종무관이 장바이리를 천거했다. “일본과 독일에서 명성을 떨쳤다. 학생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적임자다.” 독일에서 포병교육을 받은 돤치루이도 겉으로는 장바이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큰소리쳤다.
 
 
 
군관학교 교장 취임을 앞둔 장바이리는 친구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생들은 배움만 구할 목적으로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장직을 수락했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못할게 없다. 네 아들 쉐썬에게 좋은 음악 많이 들려줘라. 글을 익히면 이 편지를 보여줘라.”
 
 
 
취임식날 장바이리는 학생들에게 불량한 생활 습관을 고치라며 청결과 엄숙을 요구했다. “나는 너희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 교재를 새로 만들고 교관들을 직접 교육시켰다. “군사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군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직업이다.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임기응변 능력을 키우게 해라.”
 
 
 
매주 토요일, 장바이리는 학생들에게 특강을 했다. 동서고금, 명장들의 언행을 소개하며 학생들을 분발시켰다. 휴가중인 교관들의 강의도 대강(代講)했다. 강의 내용은 흡입력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관들이 휴가 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1913년 6월 19일, 신문을 접한 국민들은 어리둥절했다. “어제 새벽, 바오딩 군관학교 교장 장바이리 장군이 학생들 앞에서 자살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중앙Sunday
 
 
 
 
 
4. 자살 시도한 장바이리, 실탄 늑골 스쳐 살아
장바이리와 일본인 간호사 쭤메이(左梅). 홋카이도 출신인 쭤메이는 장바이리와 결혼 후 일본과 단절했다
바오딩(保定)군관학교 교장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의 자살 소식은 전국을 진동시켰다. 며칠 지나자 원인이 밝혀졌다. 정부의 지원을 믿고 부임한 장바이리는 자신이 넘쳤다. 생도들에게 긍지를 심어줬다.
 
 
“오늘날 육군을 논하는 사람들은 독일과 일본을 부러워한다. 나는 두 나라를 두루 경험했다. 군사훈련과 실습에 참여하고, 군 부대 시찰도 기회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가 세 개 달리고 손발이 여섯 개 있는 괴물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전법이나 전술도 특별한 게 없었다. 애국심이 투철하고, 상하가 한마음으로 노력하다 보니 오늘의 성취를 이뤘을 뿐이다. 나는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다. 우리나라가 영원히 빈약하고, 군대가 저들만 못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제군들이 장차 군을 다스릴 우수한 장교가 되도록 헌신하겠다. 그러지 못하면, 천하를 향해 사죄하겠다.”
 
 
육군부(陸軍部)는 장바이리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멋대로 교관을 갈아치우고, 교재도 제때 보내주지 않았다. 기병과에 말이 한 필도 없었고 포병과는 박격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장바이리는 애가 탔다. 베이징을 여러 차례 오갔다. 도처에 장벽투성이였다.
 
 
 
“나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관료사회는 중국의 출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음침했다. 죽음으로 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1913년 6월 17일 밤, 베이징의 육군부에서 온종일 시달리다 돌아온 장바이리의 몰골은 처참했다. 교장실 부관이 구술을 남겼다. “기색이 초췌했다. 감히 말을 걸기 힘들 정도였다. 먹을 갈아달라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바이리와 쭤메이는 딸만 다섯을 뒀다. 1947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셋째딸 장잉(蔣英)과 천쉐썬(왼쪽)의 결혼식. [사진 김명호 제공]
[군관학교 교육장에 보낼 유서 작성]장바이리는 자살을 결심했다. 군관학교 교육장과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노모, 일본육사 동기인 윈난(雲南)성 도독(都督) 차이어(蔡鍔·채악)에게 보낼 장편의 유서를 작성했다. 참모총장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에게 보내는 편지는 썼다가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교육장 앞으로 쓴 유서가 남아있다.
 
 
 
 
“내 통장에 500원이 있다. 딸 결혼에 쓰도록 해라. 노모는 젊어서 홀몸이 됐다. 직접 사정을 고하고, 틈나면 찾아가 적막을 달래주기 바란다. 너와 사귄 지 10여년, 그간 반년을 함께 일했다. 말 하자면 끝이 있을 리 없고, 안 해도 내 심정을 알리라 믿는다. 수십 년 후, 혼백(魂魄)이라도 다시 만나자.”
 
 
 
날이 밝자 장바이리는 비상을 걸었다. 전교생 2000여 명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정장을 하고 나타나 엄숙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한차례 둘러봤다. 생도들은 교장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고 직감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예감은 했지만, 자살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교장의 침통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그간 너희에게 많은 요구를 했다. 어김없이 잘 따라줬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 스스로 벌을 내리려 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건 미안해 할 것 없다. 교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고, 너희를 볼 면목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안되는 일이 저기서는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동요하지 마라. 중국의 미래가 너희에게 달려있다.”
 
 
 
학생들은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총성과 함께 장바이리가 뒤로 쓰러졌다. 교정이 혼란에 빠졌다. “교장이 자살했다.”
 
 
 
[“자살은 용감한 행동이 아닙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단 밑에 있던 교관은 평소 교장이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의아해 하며 장바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장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가 총을 나꿔챘다. 총구가 약간 왼쪽으로 틀어지며 탕 소리가 났다. 실탄이 늑골을 스치고 지나나가는 바람에 심장은 상하지 않았다. 교장은 목숨을 건졌다. 생도들의 통곡이 바람 소리를 삼켰다.”
 
 
​보고를 받은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의료진을 바오딩으로 파견했다. 생도들도 무심치 않았다. 돌아가며 교장의 병실 주변을 지켰다.
 
 
 
 
장바이리의 자살 사건이 퍼지자 정부 실책을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장바이리의 쾌유를 기원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윈난 도독 차이어는 이유를 밝히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위안스카이는 민심을 읽을 줄 알았다. 일본 최고의 의사와 간호사를 베이징으로 초빙했다.
 
 
 
34년 후,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장모가 될 일본간호사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장바이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첫 대면 날, 장바이리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자살은 용감한 행동이 아닙니다. 참을 줄 알아야 용감한 사람입니다. 자살은 책임을 피하려는 행위입니다. 위대한 이상을 실현해야 할 분이, 가볍게 자신을 희생시키려 한다면, 그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장바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훗날 차이어에게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내가 개만도 못한 것들이 몰려있는 당파의 삼류 군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병상에서 일어나면 이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중앙Sunday
 
 
 
 
 
5. 카먼, 첸쉐썬에게 “작은 걸음으로는 창신 불가능”
1 상하이 교통대학 재학시절 고향을 찾은 첸쉐썬(맨왼쪽). 부모(왼쪽 둘째와 셋째)와 조모(오른쪽 둘째)를 만났다. 1931년 4월 항저우
고등학교 시절,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은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쑨원은 중국이 쇠퇴한 원인이 교통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중국이 부흥하려면 교통이 발달해야 한다. 철도는 인체의 혈관과 같다.” 당시 중국은 철도 기술자가 부족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교통대학으로 몰렸다.
 
 
 
첸쉐썬도 철도 공정사가 꿈이었다. 교통대학 기계공정학원에 입학했다. 3학년 때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국민정부가 저항을 포기하자 전국의 대학이 술렁거렸다. 교통대학도 정부의 출병을 촉구하기 위해 수도 난징에 파견할 청원단을 조직했다. 첸쉐썬은 하모니카를 들고 참여했다. 난징 구경만 실컷 하고 돌아왔다.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다. 첸쉐썬은 일본군 전폭기의 폭탄 투하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충격이
 
컸다. 철도보다 항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있는 항공 관련 책을 깡그리 독파했다. 진로를 상의하기 위해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허사였다.
 
 
후난(湖南)에서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정권 전복을 기도하던 장바이리는 기병에 실패, 국가 전복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2 첸쉐썬은 카먼(뒷줄 왼쪽 넷째) 남매와 가까웠다. 남매도 중국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제공]
[공기역학 권위자 카먼 만난 첸쉐썬]
 
 
첸쉐썬은 항공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자 미국 관비유학생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전균부)는 아들의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조국에 대한 감정이 없으면 충성도 불가능하다. 출국하기 전에 중국 고전과 역사 서적을 충분히 읽고 가라. 조국의 역사를 정독하며 인생관을 확립해라. 그런 바탕 없이 자연과학을 하면 국가에 해가 된다.”
 
 
 
 
1935년 8월 천쉐썬은 MIT에 입학해 미국인과 경쟁했다. 1년 만에 항공공정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제는 실습이었다. 미국의 비행기 제조창은 외국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실습이 불가능한 첸쉐썬은 진로를 놓고 방황했다.
 
 
 
장제스와 화해한 장바이리가 군사위원회 최고고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장바이리를 만난 첸쉐썬은 사정을 털어놨다. 장바이리는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행기 만드는 건 배울 필요 없다. 유럽과 미국의 군사시설을 둘러보니 앞으로는 육군보다 공군이다. 나도 귀국하면 공군 창설을 건의할 생각이다. 소수 정예를 배양하는 칼텍(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가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그곳에 있다.”
 
 
 
공기역학(空氣力學)의 권위자이며 미국 우주과학의 개척자 카먼(Theodore von Karman)은 중국에서 온 젊은 과학자가 맘에 들었다. “1936년 가을, 첸쉐썬이 진일보한 연구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엄숙하고 단정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그는 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했다. 사유가 민첩하고 지혜가 넘쳤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카먼은 첸쉐썬에게 칼텍에 오라고 권유했다. “이곳에 와라. 네가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손 잡으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확신한다.” 카먼 55세, 첸쉐썬 25세 때였다.
 
 
 
[“남들이 생각 못 하는 것을 생각하라”]첸쉐썬은 칼텍 공대 박사반에 입학했다. 입학 첫날, 지도교수 카먼이 부인과 함께 저녁을 사줬다. “빼어난 인재가 많은 곳이다. 경쟁하며 한걸음씩 나가라. 작은 걸음으론 창신(創新)이 불가능하다. 긴 보폭으로 빠르고 높게 뛰어야 한다. 남들이 생각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남들이 말한 적 없는 것을 말해라. 그것이 바로 창신이다.”
 
 
 
 
카먼은 성격이 급했다. 한번은 첸쉐썬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견해 차이가 심하자 물건을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첸쉐썬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이튿날 카먼이 첸쉐썬을 방문했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제는 내가 틀렸다. 네 주장이 맞다.” 이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학생에서 시작해 신임하는 제자, 조수를 거쳐 공동 연구자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먼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1937년 6월 말, 소련 방문을 마치고 중국을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열흘 만에 만주 땅을 밟았다. 만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칭화대학 총장이 장제스의 청이라며 난징에 가자고 했다. 7월 7일 오후 6시, 난징행 열차를 탔다. 알고 보니 이날이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내가 탄 열차를 끝으로 12년간 베이징발 난징행 열차는 운행이 중단됐다.”
 
 
​장제스는 중국 자력으로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했다. 카먼에게 방법을 물었다.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첸쉐썬이라는 우수한 청년이 미국에 유학 중이다. 조만간 귀국하면 비행기 제조가 가능하다.”
 
 
 
장제스는 카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카먼은 애가 탔다. “그간 나는 유대인이 가장 우수하다고 믿었다. 첸쉐썬을 보며 중국인도 우수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도 장제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카먼은 첸쉐썬을 불렀다. “미국에 계속 있어라. 중국은 네가 있을 곳이 못 된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중앙Sunday
 
 
 
 
 
 
 
6. 폰 브라운, 첸쉐썬·카먼 청 받아들여 미국행
1 칼텍 교수시절, 로켓 원리를 강의하는 첸쉐썬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1주일 후 독일군이 프랑스 북부의 발사장에서 로켓을 영국으로 날렸다. 3일간 쏴댄 4361발 중 2500발이 영국에 떨어졌다. 연합군이 발사장을 점령하자 독일군은 네델란드의 헤이그 인근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듬해 3월 헤이그가 점령될 때까지 새로운 로켓 1400발을 영국으로 발사했다. 517발이 런던에 명중했다.
 
 
 
1944년 12월 1일 펜타곤(Pentagon·미국 국방부)은 육군항공사령부 과학고문단을 발족시켰다. 단장에 카먼(Theodore von Karman)을 임명했다. 카먼은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을 워싱턴으로 불렀다. 훗날 당시를 회고했다.
 
 
“내 친구 첸쉐썬은 칼텍 공학원 로켓 소조의 창립멤버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로켓 개발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36세가 되도록 미혼이었던 첸쉐썬은 공인된 천재였다. 그의 연구는 미국의 고속 공기동력학(空氣動力學)과 분기추진(噴氣推進) 기술을 촉진시켰다. 나는 그를 고문단 단원으로 추천했다.”
 
 
 
일류 스파이 독일에 잠입, 과학자 확보 나서
 
 
 
펜타곤에 진입한 첸쉐썬은 미국의 최고 군사기밀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 첸쉐썬이 펜타곤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칼텍의 분기추진 실험실이 로켓 개발에 열중하는 동안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무조건 투항했다. 일본도 백기를 들었다.
 
 
전쟁시절 연합국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독일 과학자 쟁탈전이 벌어졌다. 두 나라는 종전 전부터 독일의 로켓 제조 기지와 과학자 명단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일류 스파이들을 독일에 잠입시켰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밀보(密報)를 받은 루스벨트가 즉석에서 지시했다. “인재가 제일이다. 두뇌가 영토보다 중요하다. 독일 본토에 진입하면 로켓 전문가부터 확보해라.” CIA는 폰 브라운(Von Braun)을 비롯한 독일 과학자 체포 계획안을 짰다.
 
 
펜타곤도 독일 로켓 기지 조사와 전문가 심문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명단 첫머리에 카먼의 이름이 있었다. 첸쉐썬이 빠질 리 없었다.
 
 
​펜타곤 과학고문단장 맡은 카먼-​워싱턴으로 첸쉐썬 불러 공동 연구함께-
 
​독일 들어가 폰 브라운 설득
 
 
 
펜타곤은 독일에 파견한 심문조도 고문단이라 명명했다. 고문단은 군인으로 위장했다. 카먼은 육군 소장, 첸쉐썬은 소령 계급장을 달고 독일 땅을 밟았다. 로켓 기지는 소련군 점령지역이었다. 미군은 약정이건 뭐건 개의치 않았다. 로켓 기지에 밀고 들어가 과학자 492명과 가족 644명, 제작이 끝난 로켓 100여 개와 설계도면 등을 차량 300대에 싣고 사라졌다. 소련군은 6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첸쉐썬과 카먼은 미군 막사에서 폰 브라운을 심문했다. 브라운은 한 살 위인 첸쉐썬의 심문에 순순히 응하며 자신의 연구 경력을 상세히 진술했다. 한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이 꿈이었다. 스물두 살 때 첫 번째 로켓을 만들었다. 1800m까지 솟아 올랐다. 군의 관심 대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험실과 발사대 등 모든 시설을 만들어줬다. 1939년 스물일곱 번째 생일 날 히틀러가 발사대에 장착된 로켓을 참관했다.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던 중 히틀러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로켓의 군사적 용도를 설명했다. 히틀러는 딴사람으로 변했다. 귀를 쫑긋거리며 두 눈에 빛이 났다.”
 
 
브라운은 카먼과 첸쉐썬의 청을 받아들였다. 미국행을 결심했다. 9월 16일 새벽 대형 수송선 한 척이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상에는 귀국 병사 수천명과 독일 교향악단으로 위장한 로켓 전문가 120명이 타고 있었다
2 1945년 4월 미군 장교 신분으로 독일에 도착한 첸쉐썬(오른쪽 넷째)과 고문단 단장 카먼(오른쪽 여섯째).   [사진 김명호 제공]
MIT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된 첸쉐썬
 
 
 
첸쉐썬의 독일 체험은 효과가 있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학문적으로 얻는 바가 많았다.
 
 
“귀국길에 영국과 프랑스를 둘러봤다. 프랑스는 만신창이였다. 그 와중에서도 공군 건설에 열중이었다. 영국에서는 독일 로켓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독일의 제조 능력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명중하면 파괴력이 상당했지만, 명중률이 높지 않았다. 미국이 따라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카먼은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대학 측과 마찰이 많았다. MIT의 초빙을 받아들였다. 첸쉐썬도 칼텍을 떠났다. MIT는 첸쉐썬을 존중했다. 정교수와 종신교수 임명장을 동시에 줬다. 37세,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였다. 카먼의 추천서를 소개한다.
 
 
“첸쉐썬은 동년배 중 가장 뛰어난 과학자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숙한 인격과 조직능력도 갖췄다. 지식과 도덕에 대한 충성은 전심전력, 과학에 대한 봉헌을 가능하게 했다.”
 
 
 
1947년 여름, 첸쉐썬은 부친의 위장수술 소식을 접하자 일시 귀국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참이었다. 후쫑난(胡宗南·호종남)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23만이 홍색수도 옌안을 점령하고 중공도 전략을 수정, 반격에 나섰다. 상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화류계의 홍등만 여전할 뿐, 물가가 전쟁 전에 비해 1만2000배나 폭등했다.
 
 
 
국민정부는 첸쉐썬의 귀국을 반겼다. 여러 대학에서 손을 내밀었다. 첸쉐썬은 모두 거절했다. 귀국목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
 
 
 
 
 
7. “꽃도 들고 올 줄 모르는 남자 싫다”던 장잉, 첸쉐썬과 결혼
1 결혼 9일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첸쉐썬을 전송하는 장잉. 1947년 9월 17일 상하이
1947년 여름, 12년 만에 귀국한 첸쉐썬(錢學森·전학삼)에게 모교 자오퉁(交通)대학과 칭화(淸華)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다. 베이징대학 교장 후스(胡適·호적)가 공학원 원장을 제의하자 교육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론기관에 첸쉐썬을 자오퉁대학 교장에 내정했다고 발표해 버렸다.
 
 
카먼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훗날 다른 사람이 내게 말해줬다. 첸쉐썬은 모교와 베이징대학의 초빙을 미국에서 더 연구할 게 있다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내게 보낸 편지는 국민당 정부가 너무 무능하고 부패했다며 짜증 섞인 투였다. 이런 정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헤어질 때 16살이었던 장잉(蔣英·장영)도 다시 만났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성악을 전공한 장잉은 성황리에 끝난 독창회 덕에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장잉은 아버지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가 첸쉐썬을 사윗감으로 점 찍은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는 쉐썬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미국에 간다며 내 사진을 들고 갔다. 쉐썬에게 주려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귀국한 것을 알았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쉐썬은 36살이 되도록 여자친구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루는 쉐썬의 부친이 우리 엄마에게 장잉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주 많다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라 성에는 차지 않았다. 쉐썬도 마찬가지였다. 오죽 주변머리 없으면 그 나이 되도록 혼자인가 싶었다.”
 
 
 
[“멋대가리 없는 남자를 왜 귀여워했을까”]
 
 
 
첸쥔푸(錢均夫·전균부)는 매주 아들 쉐썬과 함께 먹을 것을 들고 장잉의 집을 찾아왔다. 주변에서 장잉에게 부탁했다. “쉐썬에게 여자친구 한 명 소개해 줘라.” 장잉은 언니와 함께 적당한 사람을 물색했다.
 
 
 
첸쉐썬은 장잉이 소개해준 여자에게 흥미가 없었다. 장잉은 난처했다.
 
“쉐썬은 올 때마다 우리 엄마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하루는 쉐썬이 돌아가자 엄마가 나를 불렀다. 쉐썬이 뻔질나게 오는 이유를 설명하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꽃도 들고 올 줄 모르는 남자는 싫다고 했다. 엄마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챘다. 네 아버지 같은 남자는 없다며 훌쩍거렸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할 때 매화나무 200그루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쉐썬처럼 멋대가리 없는 남자를 왜 귀여워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장잉의 언니들도 첸쉐썬을 마땅해하지 않았다.
 
“저런 남자와 가까이하면 큰일난다.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니 명심해라.” 첸쉐썬은 끈질겼다. 매일 찾아와 앉아만 있다 가곤 했다. 하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미국에 가자. 이번 귀국 목적은 단 하나, 너를 데리러 왔다.”
 
 
장잉은 거절했다. “싫다. 편지나 주고받자.” 첸쉐썬은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말만 계속했다. 장잉이 투항할 기미를 보이자 큰언니가 끼어들었다. 언니는 미국에서 첸쉐썬과 같은 도시에 산 적이 있었다. 미국시절, 어법학자 자오위안런(趙元任·조원임)에게 들었던 얘기를 해줬다.
 
 
“자오 선생이 옆집에 사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애를 쉐썬에게 소개했다. 쉐썬은 툭하면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고, 나왔다가도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연구실로 달려가기가 일쑤였다. 자오 선생은 망신당하려면 쉐썬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줘라는 말을 자주했다.” 언니의 말을 들은 장잉은 첸쉐썬과 결혼을 결심했다.
 
 
 
[태어나자마자 사윗감이라 좋아해 ]

 

2 사망 2년전, 장제스와 함께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에게 억류됐다 풀려난 직후의 장바이리. 1936년 12월 28일 상하이.   [사진 김명호 제공
장잉은 아버지 장바이리가 첸쉐썬이 태어나자 장차 사윗감이라며 좋아했던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두 집안 이야기를 술회했다. ​
 
“우리 아버지와 쉐썬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자주 왕래했다. 쉐썬은 외아들, 우리는 딸만 다섯이었다. 쉐썬의 엄마는 딸 많은 우리 엄마를 부러워했다. 정 부러우면 한 명을 줄 테니 고르라고 하자 셋째 딸을 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 따라 쉐썬의 집으로 갔다. 이름도 첸쉐잉(錢學英·전학영)으로 개명했다. 다섯 살 때였다.
 
열 몇 살이었던 쉐썬은 나와 잘 놀지 않았다. 내 기억에 쉐썬은 하모니카가 있었다. 내가 불어보려 하자 못 불게 했다. 울화통이 터져서 쉐썬의 아버지에게 일렀더니 나 데리고 나가 새 하모니카를 사줬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쉐썬이 내 하모니카를 자기 것과 바꿔치기 한 것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얼굴만 마주치면 대판 싸웠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쉐썬의 엄마가 도저히 안되겠다며 나를 다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커가면서 쉐썬의 부모들을 양아버지, 양어머니라 불렀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쉐썬은 자주 놀러 왔다. 내가 피아노 치면 옆에서 노래도 불렀다.
 
미국 떠나는 날 아버지와 함께 부두에 나갔다. 얼마 후 나도 독일로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는 내가 사진을 찍으면 한 장씩 들고 갔다. 훗날, 쉐썬의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아버지에게 있어야 할 사진들이 쉐썬의 책갈피에 있었다. 멋쟁이 아버지가 쉐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비로소 알았다.”
 
 
 
장잉과 결혼식을 마친 첸쉐썬은 MIT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일 개월 후, 장잉도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다.
 
<계속>
 
 
 
 
 
8. 첸쉐썬, 신중국 수립 소식 듣고 귀국 결심
 
1 칼텍 공학원 교수시절, 동료들과 토론하는 첸쉐썬(왼쪽 셋째). 1949년 8월, 칼텍의 구겐하임 분기(噴氣)추진센터 문전(門前).
무슨 일이건 운(運)도 따라야 한다. 2년만 늦었어도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출국은 불가능했다. 내친김에 중국의 해외유학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한다.
 
 
 
1847년 1월, 홍콩에 와있던 미국 선교사가 스무 살이 채 안된 중국청년을 데리고 귀국했다. 광둥(廣東)의 빈농집안 출신인 이 청년은 7년 후 예일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청년은 청(淸)나라 정부에 제의했다. “중국이 부강해지려면 서구의 학술과 문화를 들여와야 한다. 어린애들로 구성된 관비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자.” 고관이나 돈 많은 집안 자식들은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평범한 집안 자제 120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청 제국은 신정(新政)을 실시했다. 과거제 폐지와 학교 설립, 해외유학을 장려했다. 청년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며 짐을 꾸렸다. 90% 이상이 가깝고, 저렴한 일본으로 몰려갔다. 이 시기의 유학생들은 정치의식이 강했다. 정치학, 법학 등을 공부하며 반청(反淸) 혁명에 뛰어들었다. 제대로 된 대학을 이수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2년만 늦었어도 미국 유학 불가능]
 
 
 
청나라가 멸망하고 민국이 수립되자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쪽으로 중국청년들이 많이 몰렸다. 귀국하면 적어도 대학 교수 자리는 꿰찼다. 우수한 사람도 많고, 엉터리들도 많았다. “저것들 때문에 세상만 더 시끄럽고 복잡해졌다”는 불평도 심심치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 약 15만명이 해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국민정부는 해외유학을 중지시켰다. 앞서 2년 전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미국유학을 떠난 첸쉐썬은 행운아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최고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전후 건설에 투입할 과학인재 결핍을 우려했다.
 
 
정부 기관에 직접 지시했다. “교육부는 유학생 파견 10년 계획을 수립해라. 각 부처는 이공 계통에 종사할 중간 간부 숫자를 필요한 만큼 파악하고 충당 방안을 제출해라. 선발된 인재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공산당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민당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가며 지하당원과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을 선발했다. 정식으로 교육부가 실시한 유학시험에 응시케 했다. 거의 대부분이 합격해 중국을 떠났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천안문 성루(城樓)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미국에 와있던 중국유학생은 6200명이었다. 그 중 80% 이상이 이공계였다.
 
 
정권을 장악한 중공은 과학기술 인재가 필요했다. 장제스의 과학인재 양성정책으로 미국에 체류 중인 과학자들의 학업이 거의 끝났을 때였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중공 남방국 지휘시절 국민당에 잠입시켜 미국유학에 성공한 과학자 한 명을 귀국시켰다.
 
 
재미 유학생 동향을 보고받자 명단을 주며 즉석에서 지시했다. “당이 파견한 과학자들이다. 돌아가서 이 사람들과 접촉해라. 재미 중국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일류 과학자들에게 신중국 건설에 참여하자고 설득해라.”
 
 
저우언라이의 지시는 효과가 있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재미 중국 과학 공작자 협회’가 열렸다. 첸쉐썬도 참석한 회의에서 지역 대표 50여명은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귀국을 준비하자”고 결의했다.
 
 
저우언라이는 귀국 유학생 전담기구를 신설하고 베이징·상하이·우한(武漢)·선양(瀋陽) 등 대도시에 귀국한 후 과학자들이 묵을 숙소까지 마련했다. 해외에 흩어져있는 유학생들의 전공과 출신성분도 파악해 나갔다. 첸쉐썬이 미국시민이 됐다는 말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2 첸쉐썬(뒷줄 오른쪽 첫째)은 우수한 중국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조국 소식을 듣곤했다. 재미 중국 과학 공작자회의에 참석한 첸쉐썬. 1949년 6월. [사진=김명호 제공]
[미국에 평생 머물 생각은 안해]
 
 
 
첸쉐썬은 미국 시민권 취득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직접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추방당할 때까지 20년간 미국 생활을 했다. 초기 3년은 학생시절이었고 나머지 10여년은 일만 했다. 조국에 돌아와 동포들에게 충성할 준비기간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한동안 미국시민이 된 적이 있었다.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한 후에도 미국은 국민당을 지지했다. 나는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대만으로 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어찌나 집요하고 귀찮게 구는지, 미국 시민이 되는 것 외에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평생 미국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는 근거도 설명했다.
 
“미국인들은 퇴직 후를 위해 월급의 일부를 보험회사에 예치한다. 내게 예치 금액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한 푼도 없다고 하면 이상한 표정들을 지었다. 미국에 영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신중국 수립 소식을 접하자 귀국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6월 6일, 첸쉐썬은 평생 이날을 잊지 못했다. 칼텍 공학원의 연구실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연방수사국(FBI) 신분증을 제시했다. 엄숙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국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를 포착했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첸쉐썬은 부인했다. 곤혹스러운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
 
 
 
 
 
9. 킴벌, “첸쉐썬이 중국 가게 한 게 미국이 한 가장 멍청한 짓”
 
1 전인대 부위원장을 역임한 천수퉁(오른쪽)은 마오쩌둥이 존경하는 민주인사이며 저명한 서예가였다. 1954년 5월1일 텐안먼 성루(城樓).
1981년 2월, 전 칼텍 총장 두브리지(Lee Alvin DuBridge)가 첸쉐썬(錢學森·전학삼)에 관한 발언을 했다. “첸쉐썬은 미국의 매카시즘(McCarthyism)이 중국에 보낸 거대한 선물이었다. 전쟁 기간, 우리는 각종 항공과 분기추진(噴氣推進) 계획에서 그가 필요했다. 당분간 중국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연구 환경이 좋은 미국에 한동안 머물 계획이었다.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끝날 조짐이 보이자 미국에 귀화했다. 비범한 사람이었다.”
 
 
 
6·25전쟁 발발 1개월 전, 첸쉐썬이 두브리지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중국에 연로한 아버지가 있다. 손자를 보고 싶어한다. 그간 국공내전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휴가를 허락해주기 바란다.” 두브리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녀오라며 기간을 물었다. 첸쉐썬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정해진 바 없다. 아버지 건강만 회복되면 돌아오겠다. 몇 개월이면 족하다.”
 
 
첸쉐썬이 조국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학내에 퍼지자 동료 한 사람이 해군 참모차장 킴벌(Dan Kimball)에게 일러바쳤다. 킴벌은 첸쉐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절대 안 된다며 발을 굴렀다. “우리의 미사일 연구와 제조, 첨단무기 발전계획에 참여한 사람이다. 미국의 가장 우수한 로켓 전문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중국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한다.”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 국무부 내에 200여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명단까지 발표하는 바람에, 아인슈타인이나 미국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Robert Openheimer)까지 빨갱이로 몰릴 때였다.

 

2 1950년 8월, 첸쉐썬이 중국으로 보낼 짐을 수색하는 미 세관원과 FBI요원. 몇 차례 뒤져도 기밀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자 쳰쉐썬에게 돌려줬다. [사진=김명호 제공]
[첸쉐썬의 비밀취급 인가증 회수]
 
 
 
연방수사국(FBI)이 첸쉐썬의 행적을 추적했다. 칼텍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학습조 책임자 웨인바움(S Weinbaum)을 체포했다. 웨인바움은 첸쉐썬의 추천으로 분기추진실에 들어온 화학자였다. 두브리지의 회고를 소개한다.
 
 
“웨인바움은 미국 공산당원이었다. 첸쉐썬과 함께 엥겔스의 저작물을 읽으며 토론한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FBI는 첸쉐썬을 방문하기 전 내게 통보했다. 첸쉐썬에게 물었더니 그런 모임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순수한 사교 활동이었고, 어떤 방식이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같은 날 오후, 칼텍은 미 6군단 사령부가 보낸 비밀문건을 수령했다. “이 시간 이후 군사기밀을 요하는 연구에 첸쉐썬의 접근을 엄금한다. 헌병사령부가 발급한 비밀취급 인가증도 회수해라.” 연구에서 손을 떼라는 것과 그게 그거였다. 첸쉐썬은 마음이 급했다. 서적과 원고, 생활용품을 나무상자에 꾸렸다. 캐나다와 홍콩을 거쳐 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갈 심산이었다. 우선 짐부터 부쳤다.
 
 
두브리지는 첸쉐썬이 미국을 완전히 등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싱턴에 가서 해군 참모차장 킴벌을 만나보라고 건의했다. 킴벌이 나서면 첸쉐썬의 신분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킴벌은 노련했다. 걱정말라며 변호사를 구해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겸손했다. 한숨을 돌린 첸쉐썬은 귀국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변호사는 질질 시간만 끌었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자 다시 킴벌을 찾아갔다. “비밀취급 인가증이 없으면 미국에 머물 이유가 없다. 6일 후 조국으로 가겠다.”
 
 
 
[“쏴 죽여버릴지언정 중국 못가게 해야”]
 
 
 
첸쉐썬이 돌아가자 킴벌은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첸쉐썬은 미국 미사일 제작의 핵심기밀을 꿰뚫고 있다. 한 사람이지만, 미국 해병대 5개사단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쏴 죽여버릴지언정 붉은 중국으로 보낼 수는 없다.”
 
 
5년 후 첸쉐썬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도 킴벌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첸쉐썬이 중국에 돌아가도록 풀어놓은 것은 미국이 한 일 중에 가장 멍청한 짓이다.” 맞는 말이었다.
 
 
 
미국 이민국은 민첩했다. 워싱턴에서 빈손으로 로스앤젤레스(LA)에 돌아온 첸쉐썬을 구치소에 가둬버렸다. 면회 다녀온 두브리지가 기록을 남겼다. “감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쾌적한 작은 방이었다. 전등이 딸린 책상과 식탁도 멀쩡했다. 구금이다 보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미국을 위해 나름대로 봉사한 사람이다 보니 분할 만도 했다.”
 
 
 
중국 과학원과 과학자 동맹이 항의 성명을 내고, 두브리지와 카먼도 백방으로 구명을 호소했다. 14일 만에 풀려난 첸쉐썬은 자유를 상실했다. 도청과 서신검열은 기본이고, 가는 곳마다 FBI가 따라다녔다. 미국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중국이 첸쉐썬의 귀국을 요청할 때마다 미국 측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귀국을 희망하는 중국인 유학생들은 보내겠다. 첸쉐썬은 미국 시민이다. 본인이 귀국을 바라지 않는다.”
 
 
5년이 흘렀다. 하루는 카먼이 보내온 과일 상자 밑에 깔린 중문판 화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낯익은 노인의 사진이 있었다. 천수퉁(陳叔統·진숙통)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첸쉐썬은 천수퉁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주소를 알 턱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감시원들은 중국 주소에 민감했다. 벨기에에 있는 처제 생각이 났다. <계속>
 
 
 
 
 
10. 저우언라이 “첸쉐썬 돌려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
1 중·미 대사급 회담장의 왕빙난(왼쪽 둘째)과 요한슨(오른쪽 둘째). 1955년 8월, 제네바.
1955년 6월 15일 밤,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은 중국 전인대(全國人民代表者大會) 부위원장 천수퉁(陳叔通·전숙통)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수년 전 저의 착오로 미국 정부에 구류된 지 5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조국의 건설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제가 겪는 고충은 표현이 힘들 정도입니다. 미국은 귀국을 원하는 중국학생들은 모두 돌려보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말들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저 외에도 조국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유학생들이 많습니다. 저의 뜻을 정부에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도 오려서 동봉했다.
 
“한때 칼텍 공학원의 저명한 로켓 전문가 첸쉐썬을 중국으로 추방하려 했다. 거의 동시에 이민국은 미국의 최고 이익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FBI)은 중요 자료들의 중국 반출 기도 혐의로 첸쉐썬을 체포했다. 조사 결과 비밀 자료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 벨기에에 있는 처제 장화(蔣華·장화)의 주소는 부인 장잉(蔣永·장영)이 왼손으로 애들 글씨를 모방해서 썼다.
 
2 연금 시절의 첸쉐썬. 1954년 봄, LA. [사진=김명호 제공]
[첸쉐썬, 전인대 부위원장에게 편지]
 
 
첸쉐썬이 발송 방법을 난감해 하자 장잉이 꾀를 냈다. “마을 인근, 대형 상점 찻집에 우편함이 있는 걸 봤다.” 장잉과 함께 상점에 간 첸쉐썬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 부부가 장 보러 왔을 때, 남자가 상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미국에서는 정상이었다. 뒤따라온 FBI 요원들은 첸쉐썬의 행동만 주시했다. 상점에 들어간 장잉은 주위를 살폈다. 보는 사람이 없자 민첩하게 우편함에 편지를 투입했다. 편지는 별 탈 없이 벨기에까지 갔다.
 
 
장화는 상하이에 있는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게 형부의 편지를 보냈다. 첸쥔푸도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옛 친구 천수퉁에게 아들의 편지를 보냈다. 천수퉁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찾아가 첸쉐썬의 편지를 보여줬다.
 
 
저우언라이가 황급히 외교부에 지시했다. “중·미 회담이 열리는 제네바로 보내라. 미국이 중국인의 귀국을 방해하는 증거가 이 안에 있다.”
 
 
1954년 4월, 19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집결했다. 흐지부지 끝날 무렵, 중국 대표단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 교민과 유학생들을 무리하게 억류하고 있다. 미국과 직접 담판하고 싶다”며 대사급 회담을 제의했다. 미국 측도 동의했다. 중국은 폴란드 대사 왕빙난(王炳南·왕병남)을, 미국은 판문점 회담에도 참여했던 체코주재 대사 요한슨을 대표로 지명했다.
 

 

 

 

1955년 8월 2일, 중·미 대사급 두 번째 회담에서 요한슨이 중국 측에 억류된 미국 교민과 군인 명단을 내밀었다. “이 사람들이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바란다.” 왕빙난이 입을 열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쌍방의 성의가 중요하다, 중국에 있는 미국 교민들은 중국 법률만 준수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중국 경내에 거주하며 합법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형사나 민사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언제건 출국이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래 미국 교민 1485명이 중국을 떠났다. 현재 남아있는 극소수는 간첩이나 파괴활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 받은 명단은 충분히 검토하겠다. 다음 회담 때 미국에 억류 중인 중국인 유학생 귀국 문제와 함께 답하겠다.”
 
 
 
[“첸쉐썬은 조국의 품을 그리워한다”]
세 번째 회의에서 왕빙난은 첸쉐썬을 거론했다.
 
“신중국 성립 소식을 들은 첸쉐썬은 조국의 품을 그리워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억류하고 위협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요한슨은 미국 법률을 거론했다.
 
“한국전쟁 기간, 미국은 로켓과 원자탄 제조에 관련된 중국인의 출국을 법률로 금지한 바가 있다”. 왕빙난도 맞받았다. “무리한 규정은 폐기시켜야 한다.”
 
 
 
첸쉐썬이 천수퉁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받은 왕빙난은 요한슨에게 비밀 접촉을 제의했다. 제네바의 조용한 카페에서 요한슨을 만난 왕빙난은 첸쉐썬의 편지를 읽어줬다. 며칠 후 대사급 회담이 열렸다.
 
 
시작과 동시에 왕빙난이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중국 정부는 미국 간첩 11명을 석방하기로 했다.” 다음날 회의에서 왕빙난은 미국에 억류 중인 중국인 명단을 요한슨에게 전달했다. 첸쉐썬의 이름이 맨 앞에 있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첸쉐썬은 베이징의 천수퉁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네가 보낸 편지는 잘 받았다. 제네바 주재 미국 대사가 너에 대한 모든 금지는 취소됐다고 우리 측에 통보했다. 귀국 날짜를 알려주기 바란다.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해라.”
 
 
스승이며 동료였던 카먼이 제일 기뻐했다. “너는 학문적으로 이미 나를 추월했다. 조국에 돌아가면 더욱 분발해라. 과학은 국경을 가릴 필요가 없다.”
 
 
 
훗날 저우언라이는 이런 말을 했다.
 
“중·미 대사급 회담은 세계 외교사에 남을 마라톤 회담이었다. 15년간 136차례 열렸다.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첸쉐썬을 돌려받은 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김명호의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근현대』를 더 보실려면
 
아래 포스트 목록의 해당 URL을 클릭하세요
 
 
●『청의 미국 수교와 미·중 관계』 https://blog.naver.com/ohyh45/222404189767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82693196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32917042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582189809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630229852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Ⅲ https://blog.naver.com/ohyh45/222666371310
 
 
 
 
○중화민국 국가원수였던 마적 출신 동북왕 장쭤린[ 1~8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143886598
 
○『'동북왕' 장쭤린(張作霖)』 https://blog.naver.com/ohyh45/20208358169
 
○즈펑(直奉)전쟁 주역 우페이푸(吳佩孚)와 장쭤린[1~2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12169325
 
○베이징 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①[1~7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13095004
 
○베이징 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②[1~3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92938720
 
○『중일전쟁중 민주의 보루,위난(雲南)을 지배한 룽윈(龍雲)』Ⅰhttps://blog.naver.com/ohyh45/222304954948
 
○『중일전쟁중 민주의 보루,위난(雲南)을 지배한 룽윈(龍雲)』Ⅱhttps://blog.naver.com/ohyh45/222343054874
 
 
○중국여성교육선구자 우이팡 https://blog.naver.com/ohyh45/222068369294
 
○중공공군 창설·한국전쟁 https://blog.naver.com/ohyh45/222030882658
 
 
○대만의 5·24 반미운동 https://blog.naver.com/ohyh45/221975316522
 
○중국의 홍콩통일전선전략 https://blog.naver.com/ohyh45/221832127283
 
○중국의 한국 국호인정 https://blog.naver.com/ohyh45/221793352948
 
○6·25전쟁과 중국의 항미원조 ① https://blog.naver.com/ohyh45/221580656954
 
 
○상하이 시장 우궈쩐 https://blog.naver.com/ohyh45/221506795007
 
○둔황 수호신 창수훙 https://blog.naver.com/ohyh45/221196714587
 
 
○33년연금 된 항일전 명장 쑨리런https://blog.naver.com/ohyh45/221179374022
 
○광둥상단 단장 첸렌보 https://blog.naver.com/ohyh45/221154790356
 
○국공내전 화이하이 전역 패장 황웨이 https://blog.naver.com/ohyh45/221149265831
 
○장제스 신4군 지휘한 홍군출신 샹잉 https://blog.naver.com/ohyh45/221131474329
 
 
○중공 지하조직 이끈 판한넨 https://blog.naver.com/ohyh45/221089366857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 https://blog.naver.com/ohyh45/221013298311
 
○덩샤오핑의 젊은 인재발굴 https://blog.naver.com/ohyh45/221009305674
 
○마오쩌뚱이 칭찬한 왕홍원 https://blog.naver.com/ohyh45/221009294165
 
○중공의 핵무기 개발 https://blog.naver.com/ohyh45/220962898036
 
 
○쑨원부인 숭칭링과 혁명외교관 천유런 https://blog.naver.com/ohyh45/220921156907
 
○중국우주개발아버지 첸쉐싼 https://blog.naver.com/ohyh45/220842459731
 
○대만 여성혁명가쎼쉐홍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607453
 
○漢語병음표기법 만든 저우유광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94061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88520
 
○제왕의 기상 칭찬에 취한 가오강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78907
 
○중국의 민족철도 건설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47725
 
○대한간 처벌된 루쉰동생 우쮜린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40112
 
○추방 60년만에 항조우에 묻힌 연경대 설립자 존 레이턴 슈트워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25939
 
○버마 금삼각 국민당 패전부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23297
 
 
○色에 빠진잡기의달인 추민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19293
 
○소년들'참새의 추억'이 10년뒤 홍위병 완장으로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16604
 
○타고르의 비폭력은 환영받지 못했다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040253
 
 
○북양정부 최대 파벌 교통계의 영수 량스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818167619
 
○두부장수 출신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https://blog.naver.com/ohyh45/220818121708
 
○전시 8년간 문을 연 중국최고학부 서남연합대학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98922
 
○칭화대학이 배출한 최고의 재사 뤄궁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88029
 
○대만의 사마천 언론인 렌야탕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84825
 
○국적 속인 친일여배우 리샹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74980
 
○별명으로 조롱받던 군벌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58576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48074
 
○1950년대 동남아 최대갑부 호퉁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67323
 
○영화 '색계'의 실제 모델 띵무춘과 쩡핀루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45527
 
○중국에 '자본론'을 처음 들여온 마이후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36758
 
○루쉰 이후는최대 작가란 말을 듣는 짱아이링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019613
 
○'신인구론' 주장한 베이징총장 마인추https://blog.naver.com/ohyh45/220817015432
 
○20세기 화타 샤오룽유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995202
 
○난징학살 주범 히사오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39281
 
○중국올림픽이 아버지 왕정팅과 류창춘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27502
 
○세살에 황제가 된 광서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09613
 
 
○중국 최초의 누드 모델 파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01939
 
○중국최후의 고전 시인 천싼리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787570
 
 
○우파두목으로 몰린 장보쥔과그의 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705638
 
○은둔화가 류전샤의 가족사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688610
 
○천커푸,천리푸형제와 삼촌 천치메이의 장제스와 은원 https://blog.naver.com/ohyh45/220798106428
 
○타이완의 좌익 사조 https://blog.naver.com/ohyh45/220760880792
 
○중공 옌안시절의 5대 원로(五老) https://blog.naver.com/ohyh45/220704282831
 
○중국5대 영수중 가장 어렸던 린비스 https://blog.naver.com/ohyh45/220670822460
 
○항일전과 승려-타이쉬,쉬윈,쥐잔, https://blog.naver.com/ohyh45/220633645278
 
 
○중칭 천도와 류원차이, 류원후이 형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593148619
 
○외교의 달인 구웨이쥔 https://blog.naver.com/ohyh45/220492673010
 
○장제스에게 변절자로 의심되어 암살된 초대총리 탕샤오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492527037
 
○항일의 피흘린 동북의용군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11600
 
○장제스와 스탈린이 탐낸 린뱌오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08736
 
○중국 리더 제조창 황포군관학교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01313
 
 
○마지막황제 푸이와 동생 푸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078276817
 
○'동북의 왕' 장쭤린 https://blog.naver.com/ohyh45/20208358169
 
○탄원루이, 양안 화해 초석깔다 https://blog.naver.com/ohyh45/20206496685
 
 
○장제스에게 항모건조제안한 38세 함대사령관 천샤오콴 https://blog.naver.com/ohyh45/20205207367
 
○실용파 대교육자 장멍린https://blog.naver.com/ohyh45/20203935022
 
○1910년대 폐스트 대재앙과 우렌더 https://blog.naver.com/ohyh45/20203451707
 
○화궈펑과 덩샤오핑 https://blog.naver.com/ohyh45/20200658926
 
○'그림자 실세'왕둥싱과 덩샤오핑 https://blog.naver.com/ohyh45/20199585594
 
○장칭과 4인방의 제거 https://blog.naver.com/ohyh45/20198722247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부 섭정왕 짜이펑 https://blog.naver.com/ohyh45/20190631034
 
○국·공의 인재쟁탈전 0순위였던 위유런 https://blog.naver.com/ohyh45/20188836483
 
○펑더화이 문화혁명의 먹구름 속으로 https://blog.naver.com/ohyh45/20179693912
 
 
 
○쑹자왕조의 창시자 쑹자수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68859
 
○신해혁명과 쑨원,쑹칭링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64598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38819
 
○의원을 매수하여 쑨원을 누르고 총통이된 차오쿤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32410
 
○허리우드 漢流스타 황류솽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28551
 
○옌안의 홍색공주 쑨웨이스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50002
 
○26세의 무학 작가 선충원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48313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二流堂)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45751
 
○혁명가들의 연애사-쑨원,장제스,마오쩌둥, 천비란,뤄이눙,리리싼,예첸위 https://blog.naver.com/ohyh45/20153301212
 
 
○대만 해협 금문도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33075
 
 
○'상하이의 황제'두웨셩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5787
 
○마오쩌둥이 극진이 대우한 량수밍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3617
 
○나라 좌지우지한 량스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1269
 
○청년 혁명가들 프랑스 유학 https://blog.naver.com/ohyh45/20135716593
 
○저우언라이와 키진저의 미·중 수교 https://blog.naver.com/ohyh45/20132306156
 
○청방(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https://blog.naver.com/ohyh45/20132303029
 
○중공군의 6·25참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73602
 
○중국 외교 기틀 딱는데 공헌한 궁펑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31269
 
 
○중국 국방위원회 창설 주역들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17444
 
 
○중국 공산당의 특수공작원 엔바오항과 우스 https://blog.naver.com/ohyh45/20116713181
 
○김일성과 저우얼라이의 마지막 만남 https://blog.naver.com/ohyh45/20109178408
 
○홍위병이 탄생하던 그날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6437
 
○국민당 비밀 첩보조직 이끈 다이리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6074
 
○마지막 황제 푸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5563
 
 
 
○장칭의 첫번째 남자 황징과 그의 가문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4152
 
 
○중국 근대화 앞장선 120명의 관비 유학생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3839
 
 
○5·4운동의 지도자 돤시펑(段錫朋)의 변절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3146
 
○90세 노정객 장스자오의 못다 이룬 국공 담판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2976
 
○중국국가 작곡한 니에얼 한국인 영화황제(진옌:김덕린)에게 연인뺏기다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2212
 
○린뱌오 며느리 간택 작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810
 
○암살된 제갈량 양융타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503
 
○장하오 마오쩌둥이 유일하게 관을 멘 동지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323
 
○손자 구명하지 안한 주덕의 아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096
 
○직접 인분 뒤져' 굶는 농촌' 밝혀 낸 류사오치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910
 
 
○3조(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시대 원로 리센녠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773
 
○중국의 프로메테우스,천두슈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629
 
○부패한 관료 자본의 상징, 쑹쯔원 사후 청념 인정 받아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417
 
○문화혁명기의 4인방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130
 
○저우언라이,주더 가르치고 입당시킨 장선푸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9632
 
 
○공화제 꿈꾸는 호랑이 차이어와 황제 꿈꾸는 위안스카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5292
 
○신중국 전야 동북해방- 베이징 입성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0241
 
○난징정부 주석 왕정웨 이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3991
 
○중국국보의 대만 피난 작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3118
 
 
○위안스카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0940
 
○전쟁의 천재 린뱌오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0275
 
○장쉐량의 반세기 연금 생활 https://blog.naver.com/ohyh45/2010343902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