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7.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 The sacred and the profane by Mircea Eliade, 1957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5. 2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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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GT8Pnl9m4Y

종교 역사가, 소설가, 철학자, 시카고 대학의 교수 였으며 비록 "나의 경솔한 행동과 어린 시절에 저지른 실수"를 반성했지만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연루되었던 극우 민족주의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방대한 학식으로 유명했고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등 5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 3개 언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종교사에 대한 그의 작업 가운데, 샤머니즘과 요가, 우주적 신화에 대한 글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종교 연구의 패러다임을 확립한 종교 경험의 선도적인 해석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어렵고, 골치 아프고, 고민스러운 학문의 내용을 수려한 문학적 상상력에 담아 너무도 깔끔하게 표현해내곤 했던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적 학자였습니다. 종교 연구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신화와 의식이 단순히 성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종교인의 마음 속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영원회귀 이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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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현실 경험이 신성하고 속된 공간과 시간으로 나뉘어 종교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 그의 종교이론입니다. 하지만, 그의 종교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과 고대에 대한 지나친 환상적 접근으로 인해 현대 종교학 이론에서는 천대를 받고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낭만적인 학문세계는 많은 학자들을 종교학이라는 비주류 학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고나면, 천박한 정치적 격변마다 종교적인 인간이건 비종교적인 인간이건 ‘역사는 반복된다’느니 ‘어느 예언서에 나와있다’느니 ‘정감록에 전두환이 있다’느니하는 "역사의 공포"에 빠져드는 신을 두 번 잃어버린 인간들의 꼴을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자 지금부터 현대의 어떤 현상 안에라도 숨어 있을 ‘종교적인 구조’를 재발견하기 위해 자기만의 해석학을 전개했던 미르체아 엘리아데를 살펴보고, 그의 ‘성과 속’을 통해 ‘비종교의 종교성’을 밝혀 비종교조차도 ‘종교적 상징’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사상을 따라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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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생애 – Life of Mircea Eli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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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년 4월 22일)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본래성이 이레미아(Ieremia) 였던 루마니아 육군 장교 게오르게 엘리아데(Gheorghe Eliade)와 자나 리 벨리시큐(Jeana née Vasilescu)의 아들로 1907년 3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정교회 신자인 부친 게오르게 엘리아데는 세바스테 40인 순교자 전례축일과 같은날로 하려고 실제 태어난 날보다 4일 전에 아들 미르체아의 출생을 신고했습니다. 미르체아의 실제 탄생일은 1907년 3월 17일인 셈입니다. 모친 자나 리 벨리시큐는 기호학자인 소린 알렉산드레스쿠(Sorin Alexandrescu)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10대 후반까지 살았던 로제티 광장(Piața Rosetti) 근처의 멜로디 가(Melodiei Street)에 대한 추억을 그의 작품에 다양한 에피소드로 녹여냈습니다. 엘리아데는 만툴레아사 가(Mântuleasa Street)에 있는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후스피로 하레국립대(Spiru Haret National College)에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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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엘리아데는 첫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자연세계와 루마니아 민속학과 농민의 기독교 신앙에 매료 되었습니다. 엘리아데는 자라면서 모든 종교적 전통의 공통된 근원을 찾고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엘리아데는 등산과 항해를 좋아했고 루마니아 보이스카우트에도 가입했습니다. 엘리아데는 친구들과 함께 배를 설계하고 툴체아에서 흑해까지 다뉴브강을 항해했습니다. 엘리아데는 학교규율에 환멸을 느껴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남보다 못나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의지력을 기르겠다고 벌레를 삼키고 하루에 네 다섯시간만 잤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언어연구를 포함하여 네 가지 과목에서 낙제했습니다. 반면에 자연과학과 화학 뿐만 아니라 신비학 오컬트(occult)에도 관심을 갖었고 곤충학 주제에 대한 짧은 글도 썼습니다. 아버지가 시력이 나빠질까 걱정해도 엘리아데는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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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1925년에서 1928년 사이에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초기 근대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에 대한 연구로 1928년에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27년 엘리아데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파피니를 만났고 학자 주세페 투치와 연구했습니다. 엘리아데가 논리학을 강의하는 내 이오네스쿠(Nae Ionescu)를 만나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된 것은 학생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이오네스쿠의 급진적인 사상과 종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엘리아데의 학문연구는 영국령 인도 캘커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선가인 카심 바자르의 마하자라가 인도에 유학하는 유럽학자의 장학금을 주자 지원하여 4년 동안 수당을 받았고 나중에 루마니아 장학금까지 받아 넉넉하게 공부했습니다. 1928년 가을, 그는 5권의 인도 철학사(History of Indian Philosophy)를 저술한 캘커타 대학의 교수이자 캠브리지 졸업생인 벵골 출신 수렌드라나트 다스굽타(Surendranath Dasgupta) 밑에서 인도 철학의 기초와 요가를 공부했고 동시에 다스굽타의 지도 아래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벵골어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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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1930년 다스굽타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그의 딸 마이트레이 데비(Maitreyi Devi)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엘리아데는 1972년 소설 “벵갈의 저녁(La Nuit Bengali)"에 그녀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남겼습니다. 1914년에 태어난 마이트레이 데비도 1989년 죽을때까지 시인과 소설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엘리아데는 1933년에 요가 수련 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3년 후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 논문은 루마니아와 해외 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책이 인도의 종교 관습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한 초기 단계였다고 회상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엘리아데는 스리랑카 태생의 철학자 아안다 쿠마라스와미와 서신을 시작했습니다. 1936 ~1937년에 그는 이오네스쿠의 명예 조교로 일하면서 형이상학을 강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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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엘리아데는 여배우 소라나 토파(Sorana Țopa)와 육체적 관계를 가졌지만, 1934년 엘리아데는 친구 미하일 세바스찬이 소개한 기자(Giza)라는 딸이 딸린 이혼녀 니나 마레스(Nina Mareș (m. 1934–1944))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이후 엘리아데는 Giza를 입양했고 세 사람은 141 다시아 블로바드(Dacia Boulevard)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해서 1936년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 독일의 베를린을 여행할때까지 살았습니다. 대학 잡지에 다양하고 일반적으로 논쟁적인 글을 기고한 후 엘리아데는 기자 팜필 셰이카루(Pamfil Șeicaru, 1894-1980)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는 거친 어조로 유명한 민족주의 신문 쿠판툴(Cuvântul)에 공동 편집자로 엘리아데를 초빙했습니다. 그때까지 쿠판툴 신문은 내 이오네스쿠의 논설도 연재했습니다. 엘리아데는 극우 세력 크라이테리온 문학 협회(1933~1934)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아데는 반유대주의적 논쟁을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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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하게도 1933년에 그는 나치 독일의 국가 강제적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1934년, 세바스찬과 내 이오네스쿠의 반유대주의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내 이오네스쿠의 언급은 하느님의 전능함 이라는 개념과 모순되지만 반유대주의의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1936년 루마니아 왕국과 그 유대인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는 루마니아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추방된 것을 개탄했습니다. 당시 엘리아데의 관점은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엘리아데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모든 측면에서 지식인과 접촉을 유지했습니다. 엘리아데의 측근에는 우익 단 보타(Dan Botta)와 미르체아 불카네스쿠(Mircea Vulcănescu), 비정치적인 Pet Rescu와 불법 루마니아 공산당원인 이오넬 지아누(Ionel Jianu), 벨루 질버(Belu Zilber)가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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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르네 게농(René Guénon)의 작품을 소개한 전직 초현실주의 작가인 마르셀 아브라메스쿠(Marcel Avramescu)와 가까웠습니다. 카발라의 의사이자 이후 루마니아 정교회 성직자가 된 아브라메스쿠 (Avramescu)가 엘리아데에 합류하여 루마니아에서 유일한 비밀 결사 잡지인 멤라(Memra)를 편집했습니다. 엘리아데의 비밀 결사에 참석한 지식인 중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학생미하이 쇼라(Mihai Şora), 오이겐 쉴레르(Eugen Schileru) 및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들은 각각 철학자, 미술 평론가, 사회학자 및 공산 정권의 정치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쇼라의 아내가 된 마리아나 크라인(Mariana Klein)은 엘리아데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고 나중에 그의 장학금으로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엘리아데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질버를 쿠판툴 기고자로 영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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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의 관계는 세바스찬이 1935년 엘리아데가 비밀경찰 시구란차 스타툴루이(Siguranța Statului)의 요원으로 일했다고 공개적으로 고발하면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후일 질버가 비밀 요원이엇고 엘리아데는 첩자가 아니라며 고발을 철회했습니다. 1927년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가 창설한 철근위대, 아이언 가드(Iron Guard) 미카엘 군단 운동은 1848년 왈라키아 혁명의 현대화 목표가 된 "인류에 대한 추상적인 변명" 및 "서유럽의 유인원 같은 모방"으로 인식된 자유주의에 대한 엘리아데의 거부와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를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아데는 "국가 부흥에 대한 모든 시도를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고 비난하고, 이탈리아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최단 시간 내에 최고 직위로 승진했다는 이유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칭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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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1934년에 젊은 지식인 들에게 "교회로의 복귀"를 권고하며 "파시즘도 쇼비니즘도 아닌 루마니아주의"라는 민족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엘리아데는 특히 대공황으로 인한 지식인의 실업에 불만을 나타 냈습니다. 1936년에 엘리아데가 출간한 소설 ‘도니소아라 크리스티나(Domnișoara Christina)’와 ‘이사벨 시 아펠레 디아볼룰루이(Isabel și apele diavolului)’가 "음란물"이라는 극우 언론 캠페인의 표적되었습니다. 비슷한 비난이 투더 아르게지(Tudor Arghezi)와 지오 보그자(Geo Bogza)를 포함한 다른 문화적 인물들에게도 겨냥되었습니다. 엘리아데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1936년에 엘리아데는 1934년부터 회원이었던 루마니아 작가 협회로부터 상을 받았습니다. 1937년 여름에는,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강사 지위를 박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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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1 레우(leu)의 상징적 보상을 요구하면서 교육부를 고소했고 재판에서 이겨 내 이오네스쿠의 조교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까지 그는 "새로운 루마니아를 창조하기 위한 기독교 혁명"과 "루마니아를 신과 화해시킬 수 있는" 그룹으로 여겨서 철근위대(Iron Guard)에 대한 논리 지원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결국 철근위대의 정당인 ‘토툴 펜트루 타라(Totul pentru Țară, 조국을 위한 모든 것)’에 입당했고1937년 프라호바 카운티의 선거운동에 기여했습니다. 1938년 7월 14일 국왕 캐롤 2 세는 이 파시스트 정치 조직인 철근위대(아이언 가드, Iron Guard)를 단속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엘리아데는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당시 그는 아르망 칼리네스쿠(Armand Călinescu) 총리가 철근위대(Iron Guard) 선전물로 지목 한 브레미아(Vremea) 의 The Province and Legionary Ideology칼럼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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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철근위대(Iron Guard)의 탈퇴서에 서명하라며 시구란차 스타툴루이(Siguranța Statului) 국가안보국 청사 감방에 3 주간 김금되었지만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8월 첫째 주에 그는 미에르쿠레아 시우크(Miercurea-Ciuc)에 있는 임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38년 10월 엘리아데가 피를 토하기 시작하자 모로에니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엘리아데는 11월 12일에 석방된 후 그리스 신화를 다룬 연극 이피게니아(Iphigenia)대본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1940년 4 월 알렉산드루 로제티의 도움으로 그는 영국공사관의 문화주재관이 되어 루마니아와 영국의 외교 관계가 단절될때까지 근무했습니다. 런던을 떠난 후 그는 포르투갈에 있는 루마니아 대사관의 고문 및 공보 담당관을 거쳐 문화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업무는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정권에 유리한 선전이론을 개발하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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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피비린내 나는 철근위대 반란이 안토네스쿠 정권에 의해 진압된 직후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에서 이피게니아(Iphigenia)가 상연되었습니다. 1942년에 엘리아데는 포르투칼 정치인 안토니오 지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에 설립한 조합주의 포르투칼 국가인 에스타도 노보(Estado Novo)를 찬양 하는 책을 저술 했습니다. 1943년 가을, 그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에밀 시오란(Emil Cioran)과 다시 합류했으며 학자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 및 협력 작가 촐 모랑(Paul Morand)도 만났습니다. 전쟁 중에 엘리아데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논란이 많은 정치 이론가인 칼 슈미트를 만나 대화를 나눴으며 프랑코주의 스페인을 자주 방문하고 1944년 코르도바에서 열린 루시타노-스페인 과학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1934년에 결혼한 니나 엘리아데는 자궁암 에 걸려 1944년 후반에 리스본 에 머무는 동안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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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루마니아 추축국 동맹군이 동부 전선에서 큰 패배를 겪으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군인이나 수도사로서 루마니아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하면서 그는 효과적인 항우울제를 찾았고 패션 플라워 추출물과 메스암페타민으로 우울증을 치료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아데의 첫 번째 마약 경험이었습니다. 그의 노트에서 캘커타로 여행하는 동안 아편을 복용했다고 밝혔습니다. 나중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작품에 대해 논의하면서 엘리아데는 영국 작가가 메스칼린을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한 것이 자신의 경험과 공통점이 있다고 썼습니다. 루마니아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조짐을 보이자 엘리아데는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1945년 9월 16일 그는 양녀 기자(Giza)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아데는 학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 뒤메질(Dumézil)과 다시 연락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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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메질의 추천에 따라 그는 파리 의 고등종교역사학교인 ‘에콜 프라티크 데 오트 에튀드(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서 가르쳤습니다. 당시 그는 하루 15시간 일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아데는 루마니아 망명자인 크리스티넬 코테스쿠(Christinel Cotescu, m. 1948–1986)와 두 번째로 결혼했습니다. 보야르의 후손인 두 번째 부인은 지휘자 이오넬 페를레아의 처제였습니다. 에밀 시오란(Emil Cioran) 및 기타 루마니아 국외 거주자들과 함께 엘리아데는 전 외교관 알렉산드루 부수이오시아누(Alexandru Busuioceanu)와 함께 결사하여 서유럽 대중에게 반공주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또한 루체아퍼룰(Luceafărul, "The Morning Star")라는 제목의 루마니아어 잡지 출판에 잠시 관여했으며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은 미하이 쇼라(Mihai Șora)와 쇼라(Șora)의 아내 마리아나(Mariana)와 다시 연락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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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년에 엘리아데는 가난에 직면했고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의 도움으로 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9월에 쿠마라스와미가 사망하면서 없던일이 되었습니다. 1948년부터 엘리아데는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가 편집한 비평(Critical)저널에 글을 썼습니다. 이듬해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소설 ‘금단의 숲, 노압테아 드 산지엔(Noaptea de Sânziene)의 처음 300페이지를 썼습니다. 그는 1949년 핸리 코빈(Henry Corbin)이 그를 추천한 후 칼융(Carl Jung) 및 에라노스(Eranos) 재단과 협력했으며 에른스트 융거(Ernst Jünger)가 편집하는 안타이오스(Antaios) 잡지에 글을 썼습니다. 1950년에 엘리아데는 에라노스 재단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융을 만났습니다. 그는 에라노스 재단 참석을 "현대 서구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문화적 경험 중 하나"라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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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월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기 전까지 엘리아데의 중요한 학문적 저작은 대부분 파리 시절에 집필된 것들입니다. 엘리아데는 요아힘 바흐(Joachim Wach)의 초대를 받아 바흐(Wach)의 본거지인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로인해 엘리아데와 바흐는20세기 후반의 종교 연구를 기본적으로 정의한 "시카고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강의 시작직후 바흐가 사망하자 엘리아데는 바흐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1964년 세월 에이버리(Sewell Avery) 종교사 특별 공로 교수가 되었습니다. 1954년부터 ‘영원회귀(Eternal Return)’에 대한 초판을 시작으로 엘리아데는 상업적 성공도 누렸습니다. 이 책은 다른 제목으로 여러 판을 거쳐 100,000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1966년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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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멕밀란 출판사(Macmillan Publishers)의 종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1968년에는 산타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종교사를 강의했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종교사에 대한 그의 주요한 독창적인 해석의 개요를 함께 그룹화한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종교사상사(History of Religious Ideas)를 완성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처음에 엘리아데는 유럽에서의 정치적 참여를 이유로 그와 극우 친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 리버러(România Liberă)와 같은 루마니아 공산당 언론에 의해 맹렬한 비판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엘리아데를 "철근위대(Iron Guard)의 이데올로기, 노동 계급의 적, 살라자르(Salazar) 독재의 옹호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정권은 엘리아데의 지원을 받기 위해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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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정권은 친분이 있던 연극 감독 헤이그 액터리안(Haig Acterian)의 미망인 여배우 마리에타 사도바(Marietta Sadova, 1897~1981)를 엘리아데와 접촉시키기 위해 파리로 보냈습니다. 이 작전은 루마니아 공산관리들이 계획했지만 그녀의 만남은 1960년 2월 반역죄 재판에서 그녀를 유죄 판결하는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루마니아의 비밀 경찰인 세꼬리따데(Securitate)는 엘리아데를 영국 비밀 정보국 의 스파이이자 전 게슈타포 요원으로 묘사했습니다. 엘리아데는 게오르게 게오르규-데즈(Gheorghe Gheorghiu-Dej)의 통치하의 1960년대 초부터 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은 엘리아데를 귀국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엘리아데에게 접근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70년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시카고를 방문한 시인 아드리안 퍼우네스쿠(Adrian Păunescu)와의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민족주의와 동구권으로부터 루마니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바람에 차우셰스쿠 정권은 엘리아데의 주장과 명성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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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우네스쿠의 시카고 방문에 이어 민족주의 공식 작가 오이겐 바르부(Eugen Barbu)와 엘리아데의 친구 콘스탄틴 노이카(Constantin Noica)가 방문했습니다. 당시 엘리아데는 루마니아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망명 중인 라디오 자유 유럽의 버질 이에룬카(Virgil Ierunca)와 모니카 로비네스쿠(Monica Lovinescu)를 포함한 동료 루마니아 지식인들이 공산당의 제안을 거부 하도록 설득 했습니다. 1977 년에 그는 차우셰스쿠 정권이 새롭게 시행한 억압적 조치에 항의하는 전보에 서명하는 다른 망명 루마니아 지식인들과 합류했습니다. 말년에 엘리아데의 이러한 과거 전력이 폭로되어,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엘리아데의 건강 악화에 기여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심각한 관절염은 저작활동을 방해했습니다. 그에게 수여된 마지막 학문적 영예는 1977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보르댕 상과 1985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가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였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1986년 4월 버나드 미첼(Bernard Mitchell)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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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전에 그는 에밀 시오란(Emil Cioran)의 감탄 연습을 읽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언어 기능을 잃었습니다. 그가 징조로 해석한4개월 전 화재사건으로 미드빌 롬바드 신학교(Meadville Lombard Theological School)에 있는 그의 사무실 일부가 소실되었습니다. 엘리아데의 죽음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을 회상한 엘리아데의 루마니아 제자 이오안 페트루 쿨리아누 는 엘리아데의 죽음을 "마하파라열반"으로 묘사하여 고타마 붓다의 죽음과 비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시카고에서 화장되었고 장례식은 대학 운동장인 록펠러 채플에서 열렸습니다. 1,200명이 참석했으며 엘리아데의 대학 동료인 소설가 사울 벨로(Saul Bellow)가 어린시절의 깨달음을 회상하는 엘리아데의 글을 낭독했습니다. 그의 제자이자 그의 유산을 물려받은 시카고 대학 종교사(History of Religions) 위원회의 공동 창립자인 찰스 H. 롱(Charles H. Long)이 추도사를 전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시카고의 옥우즈묘지(Oak Woods Cemetery)에 붇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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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사상 – Thought of Mircea Eliade

 

엘리아데는 종교, 특히 신화에서 광범위하고 문화 간 유사점과 통일성을 찾으려 시도했습니다. 그는 전통 사회에서 신화가 원시 시간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을 나타낸다고 지적했습니다. 엘리아데는 고대 사상에서 잘 알려진 "순환적" 시간관을 영원회귀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신화적 시대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 "역사의 공포"를 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엘리아데는 많은 신화, 의식 및 신비적 경험이 "반대의 일치" 또는 일치 반대를 포함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그의 성스러운 시간과 영원회귀 이론에 기술된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전통은 선형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을 신성시하거나 성화가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일부 동양 전통은 대체로 신성한 시간의 개념을 거부하고 시간의 순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의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순환 시간의 의미를 유지한다고 엘리아데는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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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에 따르면 우주 중심은 현실을 신성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는데 필요한 결과입니다. 신성한 것은 모든 가치를 담고 있으며, 세상은 상형문자를 통해서만 목적과 의미를 얻습니다. 엘리아데는 전통 사회가 새로운 영토를 발견할 때 종종 중심을 세우고 세계를 설립한 성현을 재현하는 봉헌 의식을 수행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엘리아데는 많은 전통 사회가 신화적 지리학에서 공통된 개요를 공유한다고 주장합니다. 문화는 애니미즘 과 다신교 에서 일신교로 자연스럽게 발전합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무당이나 사제같은 종교의 매개자들은 죽음과 부활 등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 일종의 정신병자들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고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기 위해 죽고 죽음과 부활이 반복되는 죽음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샤머니즘적 현상을 보여줍니다. 무당이나 사제들은 신과 소통하고 죽은 자의 땅으로 내려갈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주술사 역할을 합니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인간을 기다리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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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노동이나 출산에 의해 결정되는 영광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나 마법의 금욕주의의 길입니다. 엘리아데는 지나친 일반화와 "본질주의" 심지어 역사적 학문을 가장하여 신학적 의제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아데는 종교적 현상이 문화와 역사의 산물로 축소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전통적인 인간은 사물이 "초월적 현실에 참여하는 정도까지만 현실과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느낍니다. 다양한 종교의 다양한 문화적 형태 뒤에 엘리아데는 보편적인 것을 제안합니다. 종교적 사고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신화적 사건에 의해 확립된 객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이에 순응해야 합니다. 세속적 사고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목적 이든 인간이 발명하고 세상에 부과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실존적 상황" 때문에 엘리아데는 신성한 것이 비종교인의 "자유"에 대한 주된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엘리아데는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사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세속주의는 정체성을 종교에 의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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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모델에 저항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든다고 주장함으로써, 세속적 인간은 오직 종교적 사상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만 자신을 식별합니다. 엘리아데는 19세기 유물론의 부상으로 인해 "기원"에 대한 종교적 향수가 과학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고 믿습니다. 엘리아데는 19세기에 기원에 집착했던 분야 중 하나로 자신의 분야인 종교사를 언급합니다. 종교사라는 새로운 분야는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엘리아데는 현대 정치 이데올로기를 세속화된 신화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주의는 "중동과 지중해 세계의 위대한 종말론적 신화 중 하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아데는 나치즘이 고대 게르만 종교에 기반을 둔 가짜 이교도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현대인은 신성한 시간과 영원회귀를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화적 행위'의 '흔적'을 보입니다. 비종교적이라는 현대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는 궁극적으로 역사적 사건의 선형적 진행에서 가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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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조차도 "역사의 공포"를 느낍니다. 이 "역사의 공포"는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역사적 사건이 현대인과 맞닥뜨릴 때 특히 심각해집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단순한 사실, 그것이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은 그것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거의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엘리아데는 수사학적으로 현대인이 "집단 추방과 학살에서 원자폭탄 투하까지 역사의 재앙과 공포를 넘어선 흔적이나 초역사적 의미를 엿볼 수 없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는 신화적 사건의 반복이 고대인의 눈에 역사의 신성한 가치와 의미를 제공했다면 현대인은 신성한 것을 부정했으며 따라서 스스로 가치와 목적을 발명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엘리아데는 현대인이 전통문화로부터 배움으로써 '역사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엘리아데는 전통적 사고가 "세상 종말에 대한 우리의 모호한 예감, 더 정확하게는 우리 세계, 우리 문명의 종말"에 의해 야기되는 막연한 불안감을 덜어준다고 제안합니다. 엘리아데는 서양의 영적 재탄생이 서양의 영적 전통의 틀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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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이러한 부활을 시작하려면 서양인이 비서구 문화의 아이디어에 의해 자극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초역사적 메시지'는 현대인이 역사의 공포에 맞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인간은 시간을 신화적 원형의 끝없는 반복으로 봅니다. 대조적으로, 현대인은 신화적 원형을 버리고 선형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역사적 시간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리하여 엘리아데는 기독교는 틀림없이 '타락한 인간'의 종교임을 증명하고, "원형과 반복의 낙원"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종교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종교적 요소는 세속 문화에서 새로운 "위장된"형태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현대인이 과거의 요소를 보존해야 하지만 반동 정치를 통해 원래의 형태를 복원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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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의 배경 – Background of The Sacred and the Profane

 

엘리아데는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시절에 1949년 출판한 ‘종교형태론(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과 ‘영원회귀의 신화(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 1951년 출간한 ‘샤머니즘(Shamanism)’, 1952년에 출간한 ‘이미지와 상징(Images and Symbols)’, 1933년에 출간한 ‘요가(Yoga)’, 1956년에 출간한 ‘대장장이와 연금술사(Forgerons et Alchimistes)’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포괄성을 겸비한 일련의 저술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초기의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미국에 건너간 이후에 그가 보여준 학문적 내용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적인 학문이 엘리아데의 창조력을 감퇴시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펴볼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은 1957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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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출간된 배경은1955년에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학회에서 엘리아데는 당시에 ‘로볼트 독일 백과사전’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던 ‘엔리코 그라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아데는 1956년 1월까지 160페이지 분량의 ‘성과 속’을 쓰도록 요청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과 속’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엘리아데가 독일 출판사를 통해 그의 파리 시절 학문을 요약 정리한 소책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과 속’은 주로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이미지와 상징’의 세 권이 결합되어 응축된 책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기존 저술의 단순 요약본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엘리아데는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다소 난해한 자신의 중심 사상을 매우 자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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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의 내용 – Content of The Sacred and the Profane, 1957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은 “세계 안에서의 두 가지 존재 방식”입니다. 그리고 성은 속의 정반대입니다. 성은 종교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이고, 속은 비종교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장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과연 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한 엘리아데의 답변은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을 설명하는 이 책의 맨 처음 두 장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공간은 그저 아득히 펼쳐져 있는 균질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인간은 ‘공간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종교적인 인간은 위(하늘)와 아래(지하)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 즉 저 너머의 세계로 이행하는 통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를 창조합니다. 바로 이 장소가 ‘세계의 중심’입니다. 중심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흡수한 성스러운 힘을 다른 모든 장소에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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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잡혔을 때 세계는 비로소 ‘인간적인 세계’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과 만나는 신전이나 사원만이 중심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사는 국가, 도시, 집, 심지어는 인간의 신체조차도 다른 세계로의 출구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중심을 창조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새로이 창조한다는 것이므로, 중심의 창조는 항상 신의 세계창조를 모방하며 이루어집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인간은 축제나 의례에 의해 ‘시간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축제나 의례는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모범적인 행위를 인간이 모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은 신과 동시대인이 되어 신화적 시간을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이 태초에 시간을 창조했던 것처럼 자신을 위해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게 됩니다. 녹슬고 낡은 시간을 새로이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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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축제와 의례에 의해 주기적으로 ‘성스러운 시간’으로의 탈출을 감행하여, 태초의 성스러운 힘의 샘물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모방’(Imitation of God, imitatio dei)을 통해 어느 공간이든 어느 시간이든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의식적인 모방이든 무의식적인 모방이든 간에, ‘신화의 성스러움’과 연관되기만 한다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을 향해 열리는 순간 공간의 모든 사물은 ‘중심’이 되고 시간의 모든 순간은 ‘축제’가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3장에서 엘리아데는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를 이야기합니다. 종교적인 인간은 우주를 신의 창조물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자연은 신성의 온갖 징후를 머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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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주적 종교’는 자연이라는 상징을 해독하여 성스러움을 읽어내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원래 높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강력했던 ‘하늘의 신’은 우주를 창조한 후에 나머지 잔무를 ‘폭풍의 신’, ‘땅의 여신’, ‘식물의 신’에게 이양하고 뒤로 후퇴합니다. 이렇게 신의 권력이 이동하는 현상은 주로 인간이 농경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농경을 통해 인간은 우주창조의 ‘성스러움’보다는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농경을 통해서 폭풍, 땅, 식물의 성스러움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엘리아데는 농경이 자연계의 성스러움을 재해석, 재발견하는 종교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세계의 비종교적인 인간은 하늘, 물, 식물, 태양, 달, 땅 등에 깃들인 우주적 성스러움을 더 이상 해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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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더 이상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비종교적인 인간은 인간이 신적인 모델 없이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탈성화(脫聖化)된 ‘비극적인 실존’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4장에서 엘리아데는 ‘비종교인의 종교성’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엘리아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가장 탈성화된 현대사회라 할지라도, 순수한 상태에서의 비종교적인 인간은 비교적 드문 현상입니다. ‘비종교인’의 대다수는 비록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엘리아데는 몇 가지 예를 듭니다. 현대인은 영화라는 ‘꿈의 공장’을 통해 여전히 신과 괴물의 투쟁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독서를 통해 여전히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도피’를 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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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신분석도 환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기고 귀환하는 입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인의 무의식은 꿈, 공상, 환영의 형태로 여전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비종교인의 종교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엘리아데에게 종교는 ‘신을 잃어버린 인간이 신을 찾도록 도와주는 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아데가 보기에 비종교적인 현대인은 그 지도마저 잃어버린 셈입니다. 신을 두 번 잃어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아데는 현대의 어떤 현상 안에라도 숨어 있을 ‘종교적인 구조’를 재발견하기 위해 자기만의 해석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비종교의 종교성’을 밝힘으로써 비종교조차도 ‘종교적 상징’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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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의 의미 – Meaning of the sacred and the prof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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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과 속이라는 대립된 개념을 가지고 종교를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과 속이라는 두 개의 대칭적인 잣대를 들이대보면 원시인과 현대인이 ‘종교적 인간’으로서 동일한 지평에 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아데의 종교사와 종교현상에 관한 해박한 지식, 독창성 등이 없었다면 이런 저작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성과 속의 잣대를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 우주와 자연, 인간의 삶 자체를 꿰뚫어봄으로써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이 실상 동일한 실재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비종교적 인간이라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감추어진 형태로 남아 있는 현대의 신화나 의례에 의해 여전히 성스러움의 기억을 무의식 가운데 감추고 있음을 그는 실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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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종교학의 기본 안내서이지만 관점은 철학적 인간학이나 현상학, 심리학을 포괄하고 있으며 잠재적인 인간 실존의 여러 차원을 동시에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사와 종교현상에 대한 전세계적인 자료들이 백과사전적이라 할 만큼 풍부하게 나열되어 있지만 그런 자료들이 현학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시 종교적인 자료와 현대의 자료들이 동일한 문맥 속에 동원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책이 문학적이라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자신이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인간 실존의 본원을 회복하게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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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은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을 통해 천박한 정치적 격변마다 종교적인 인간이건 비종교적인 인간이건 ‘역사는 반복된다’느니 ‘어느 예언서에 나와있다’느니 ‘정감록에 전두환이 있다’느니하는 "역사의 공포"에 빠져드는 신을 두 번 잃어버린 인간들의 꼴을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47번째 책 인문학 부문 17번째 책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이 1957년에 출간한 된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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